138화.
“분명…….”
반 시간 뒤, 제롬은 하얗게 질려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다, 다리 많은 건 무섭다고 하셨잖습니까…….”
“글쎄. 내가 그랬나요?"
줄리엣이 심드렁히 로브를 고쳐 입으며 대꾸했다.
“누군가 열심히 검을 놓치는 걸 구경하느라.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푸훗.”
놀라서 달아났던 말들을 잡아온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의 포식이 만족스러웠던 듯 푸른 나비들이 이리저리 활개를 치며 날아다녔다.
제롬은 그런 나비들을 힐끔거렸다.
줄리엣은 제롬을 대놓고 멍청이 취급했지만 제롬의 실력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럭저럭 자기 몫을 하긴 했다.
하지만 첫인상이 나빴던 괘씸죄로 줄리엣은 제롬을 줄곧 무시중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나비들이 등장한 이후, 마물들은 공포에 미친 듯 날뛰다 저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이후로 제롬은 완전히 기가 죽은 눈치였다.
제롬은 더 이상 줄리엣을 무시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꽤나 두려워하는 눈으로 줄리엣의 주변을 쭈뼛거리며 맴돌았다.
"아니, 그런 걸 다루는데 대체 왜 호위기사가 필요합니까? 예?”
제롬은 퍽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귀찮아진 줄리엣이 건성으로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있나요?”
“예.”
의외로 제롬은 순순히 시인했다.
“그럼 그냥 물어봐요.”
“그럴까요? 그럼……. 아가씨께선 저 악령을 언제부터 다룬 겁니까?”
줄리엣은 고개를 들었다.
"나비들을 말하는 거면, 악령아니고 정령이에요.”
“하하. 농담도."
제롬은 진짜 농담을 들었다는 것처럼 웃었다가 줄리엣이 따라 웃지 않자 정색했다.
"크흠, 소위 정령사라는 말씀이시죠?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걸 정령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저건 정령이 아니라 악령이죠.
그러니까 아가씨도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줄리엣은 어깨를 으쓱했다.
감정을 먹어치우는 괴물이니 정령이 아니라 악령이라고 불려도 손색없긴 했다. 하지만 줄리엣이 그의 경고를 듣는 눈치가 아니 자, 제롬이 다시 말했다.
“제가 옛날 얘기를 하나 해 드리지요, 아가씨.”
줄리엣은 한숨을 폭 쉬었다.
부상자가 많아서 이쪽 일행을 을데리고 기네스 후작의 영지로 향하는 것은 무리한 결정이었다.
“한 십 년쯤 전에, 제가 몸담던 용병단에 훌리오라는 괴짜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롬은 말이 너무 많았고, 줄리 엣은 말 많은 남자는 딱 질색이었다.
“분수에 안 맞게 사치스럽고 좀스러운 놈인데 특이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놈은 또 돈만 생기면 쓸데없는 귀금속을 광적으로 사들이곤 했지요. 그런 거에 보물이 있다면서요.”
“그런데요?"
줄리엣은 심드렁히 되물었다.
제롬이 왜 새삼스레 과거 용병 동료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훌리오 놈은 골드 티어 용병이었습니다. 아시죠? 골드면 엄청난 거."
물론 몰랐다.
줄리엣은 대충 그런 게 있나 보다 하고 넘겼다.
“헌데 그 놈은 용병치고는 칼솜씨가 별로였습니다. 그런 놈이 골드 급 용병패를 가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놈이 정령사였기 때문입니다.”
“.....… 정령사요?”
줄리엣은 그제야 조금 흥미가 동했다.
왜 제롬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그리고 줄리엣에게 그가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예, 그렇습니다. 훌리오 놈은 아가씨처럼 이계에서 불러낸 괴물을 부렸습니다.”
괴물은 아닌데.
"아가씨의 괴물은 예쁜 나비지만, 녀석이 불러낸 마물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거든요. 뱀인지 용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거대한 노란 뱀이었는데. 그야말로 사람을 죽이는 데는 탁월했습니다.”
뱀?
줄리엣은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나비보다는 무시무시한 뱀 쪽이 좀 더 위엄있어 보일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훌리오 놈이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술에 취해서 자다가 일어나면 뱀마물이 밤마다 입을 쩍 하고 벌리고 있더랍니다.”
“...… 그래서요?"
“훌리오 놈은 그걸 자랑했어요.
충성스러운 자기 마물은 밤에도 보초를 선다고요.”
“좀 자세히 말해봐요. 그..…
훌리오란 사람이요. 지금도 용병 일을 하고 있나요?"
그러나 제롬은 어깨를 으쓱했 했다.
“별로 자세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은 죽었거든요."
“죽어요? 왜요?”
“그냥 어느 날 밤에, 훌리오는 사라졌습니다.”
줄리엣은 맥이 탁 풀렸지만 제 롬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용병단의 모두가 알았습니다. 놈은 뱀에게 잡아먹혔다는 걸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아가씨, 큰 뱀을 본 적 없으시죠?”
제롬이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큰 뱀이 입을 벌리고 한참 가만히 있다는 것은 자기가 삼킬만한 크기인지를 가늠하는 행동입니다.”
제롬은 자신 있는 어조로 장담했다.
“절대 보초를 서는 행동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뭐, 그것도 모르는 훌리오 놈은 멍청하게 그 뱀악령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좋아했지만 말이죠. 훌리오 놈은 자기가 다루던 뱀 마물에게 잡아먹힌 게 분명해요.”
뜻밖의 결론에 줄리엣은 멍해졌지만 제롬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여길 나가면 나는 돌아갈 겁니다. 기사단이고 뭐고. 여기 있다가 공연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꽤나 무례하고 솔직한 언사였지만 줄리엣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너무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제롬이 떠나고 난 뒤, 케인이 줄리엣에게 다가와 충고했다.
“제롬 저 놈은 다 괜찮은데, 허풍이 심한 편입니다. 저도 훌리 오라는 용병과 같은 용병단에 몸담고 있었지만, 훌리오가 뱀에게 잡아먹혔다는 건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왜요?”
“왜냐면 그 이후로 훌리오 놈이 몇 번인가 사막에서 목격된 적있거든요.”
“하지만 제롬 말로는…….”
“…”
“예, 훌리오가 행방불명됐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 놈은.”
케인은 줄리엣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하지만 기르던 뱀 정령에게 잡아먹혔다는 건 너무 허황된 이야기지요. 필시 도박 빚에 쫓겨서 행방불명된 척, 꾸미거나 속였을게 틀림없습니다. 본래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그런 번거로운 연기를 한 거죠.”
“그러니까 제롬 녀석의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것 없습니다, 아가씨. 용병이란 것들은 뱀을 잡고도 드래곤을 잡았노라 떠드는 것들입니다. 허풍이 심해서 걸러 들어야 합니다.”
케인은 진지하게 줄리엣에게 충고한 다음, 그녀를 마차까지 데려다 준 다음 막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줄리엣은 어쩐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차에 혼자 남은 줄리엣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노란 뱀이라.
줄리엣은 자신 외의 정령사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정령이란 것은 그녀의 나비들과는 퍽 다른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멋대로 소환자의 곁에 한참이나 머물지도, 자기 의지를 가지고 말을 걸지도 않는다고 했다.
말 그대로 짧은 시간 동안만 힘을 빌려주는 단순한 이계의 마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제롬이 말한 '노란 뱀’정령, 혹은 사령은 왠지 줄리엣의 마물 나비들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들이 있었다.
예컨대, 부르지도 않는데 제 멋대로 튀어나온다든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잠든 사람 주변을 맴돈다는 것 등.
(.....)
줄리엣은 고개를 들고 어느 틈에 나타나서 주변을 조용히 맴돌고 있는 나비들을 잠시 노려보았다.
"너희도 나를 잡아먹을 거야?"
(안. 먹어. 계약자!)
어쩐지 발끈한 것 같은 목소리로 나비들이 항의했다.
(우리. 계약자. 좋아.)
(계약자. 우리. 미워.)
(그래도. 거짓말, 안 해.)
(그것. 뱀. 노랗다.)
(나쁜. 뱀. 나쁜…….)
파직.
순간적으로 스파크가 튀었다.
줄리엣은 놀라서 흠칫했다.
동시에 나비들이 괴로운 듯 날개를 퍼득였다.
(우리. 아니야. 뱀.)
“알겠으니까 그만 해."
놀란 줄리엣이 다급히 만류했지만 나비들은 타격을 입은 듯 그녀가 내민 손바닥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몇몇은 이미 빛 가루로 부서지거나 푸른 불길에 휩싸여 화륵, 하고 역소환 되었다.
(우리는 말할 수 없어.)
(그렇게 되어있어.)
줄리엣은 문득 예전에 나비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 말할 수 없게 되어있다.
는 것은, 같은 동족 마물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게 아니었을까?
'오래된 유물을 수집했었다고했지.'
줄리엣은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그녀가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스노우드롭' 이라는 이름의 열쇠뿐이지만 어쩌면 훌리오도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만 .
그래서 수상한 악령인지 정령인지를 불러낸거고,
'뱀 마물을 불러내는 아티팩트라.'
줄리엣은 부쩍 궁금해졌다.
그녀가 아는 마물은 이 푸른 나비들 뿐이지만, 그 외의 악령의 의존재를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건 과연 무슨 능력을 가진 악령이었을까?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