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37화 (134/229)

137화.

*

기네스 후작이 탈옥해 도주했다는 소식에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 줄리엣은 일부러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황궁의 살롱에 앉아있었다.

“소문 들으셨습니까? 기네스 후작이 간밤에...…."

“혹시 칼라일 공작의 짓은 아니겠지요?”

누군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했지만 다들 회의적이었다.

“허허. 뭘 모르시는군. 칼라일공작이 기네스 후작을 반드시 법정에 세우겠다고 단단히 벼르던걸 모르시오?”

“맞습니다. 공작의 입장에서는 가만히 시간만 끌면 해결되는 문제였을 텐데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까요?”

“기네스 후작이 실종되면 아무것도 받지 못할 텐데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창문을 열어놓고 오가는 대화를 엿듣던 줄리엣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레녹스가 꾸준히 기네스후작을 법정에 세우려고 했던 게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소행일까요?"

거기까지 몰래 듣던 줄리엣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부탁이 있어요, 전하."

줄리엣은 그에게 다가가 살갑게 팔짱을 꼈다.

“기네스 후작의 이름을 없애주세요. 애초에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들은 평범하게 팔짱을 끼고 무도회에서 퇴장하는 연인으로 보였을 터였다.

“그 땅에서 아무것도 자랄 수 없게 만들어 주세요."

줄리엣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대신 전하가 오랫동안 원하던걸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 내가 원하던 것?"

“네.”

줄리엣은 그의 눈에서 갈망을 읽어냈다.

“남부에 전하가 찾으시던 물건이 있어요. 공작가의 가보요.”

* * *

7일간의 축제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시점이라 황제는 어떻게든 칼라일 공작을 붙잡아두려고 애썼다.

남부 후작저를 방문하겠다는 공작에게 황제는 “게이트 사용을 허가할 수 없다”며 어깃장을 놓았지만 칼라일 공은 그렇다고 눈하나 깜짝할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의 허가는 필요 없어.”

“하지만 게이트를 통하지 않으면 남부까지 어떻게 가요? 한참 걸릴 텐데요.”

수도에서 남부까지 게이트를 이용하지 않으면 족히 2주는 걸리는 거리였다. 줄리엣은 지나치게 오래 걸리는 여정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레녹스는 간단하게 그녀의 염려를 일축했다.

“그럴 거 없어. 다른 게이트를 매입했으니까.”

줄리엣은 매번 이런식이니 황제가 칼라일 공작에게 애증을 품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통상적인 남부로 향하는 루트와는 달리 공작가가 새로이 매입했다는 게이트는 비교적 기네스 후작의 영지와 가까웠다.

게이트를 통과한 직후 인적 없는 광활한 숲을 지나쳐야 한다는 점을 빼면 꽤 획기적인 루트였다.

줄리엣은 말 한 마리를 골라 고삐를 쥐려다 저지당했다.

“뭐 하는 짓이야?”

“네?”

험악한 표정으로 레녹스가 물었지만, 그거야말로 말에 오르려다 저지당한 줄리엣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마차보다 말이 빠르잖아요.”

“내려와.”

화를 내는 레녹스가 이해 되지 않아 줄리엣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레녹스는 줄리엣이 마차에 안전하게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일행을 출발시켰다.

“출발해.”

먼 곳으로 향하는 행렬치고는 꽤 단촐했다. 마차 한 대를 제외하면 기사 여덟 명이 전부였다.

그때 레녹스가 불쑥 줄리엣에게 질문했다.

“왜 하필 말을 타고 도망쳤지?"

"네? 아…….”

그제야 줄리엣은 그가 왜 그토록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차에 밀어 넣었는지 이해했다.

이 전의 삶에서 줄리엣은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공작 성을 황급히 벗어갔다.

[내가 도와줄게요.]

줄리엣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말을 훔쳐 달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달리아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나?'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밤낮으로 귀하게 동쪽 탑에 모셔진 달리아와 줄리엣이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은.

“누가 말을 훔칠 수 있게 마구 간을 열어주겠다고 했거든요.”

별로 숨길 만한 이야기도 아니라, 줄리엣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래서였어요.”

그녀의 도주는 실패로 끝이 났다. 북부의 숲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그에게 따라잡혔고, 허둥거리다가 말에서 떨어졌으니까.

투르륵!

가속도가 붙은 말이 비틀거리다가 균형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그 말에 타고 있던, 겁에 질린 여자는 미친 듯이 뒤를 힐끔거리다가 말이 쓰러지는 것조차 한 박자 느리게 깨달았다. 목숨이 위험했던 마지막 순간 맹렬히 뒤쫓아오던 남자가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챘지만.

“그게 누구였지?”

“네?”

"네게 마구간을 열어줬다는, 그 사람. 누구였냐고."

“동쪽 탑에 머물던 여자였어요.”

하지만 레녹스는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줄리엣은 문득 궁금해졌다. 레녹스가 엿본 과거의 기억에 달리 아의 기억은 없는 걸까?

다음 날 아침.

느즈막히 농가에서 깨어난 줄리 엣은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래서요?"

"그게…….”

“그러니까……. 지금 저를 버리고 갔다는 얘기네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은 어떻게든 온건한 표현을 골랐다.

“전하께서는 아가씨의 안위를 염려하셔서……. 주, 줄리엣 님!”

엘리엇이 당황해 만류했지만 줄리엣은 화풀이하듯 종이를 천천히 반으로 찢어버렸다.

"나쁜 자식.”

줄리엣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너무 순순히 남부 후작저로 가는 것을 승낙했다고 생각했다. 기네스 후작에게 학대당했던 과거를 알아챈 이상 레녹스가 격렬히 반대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러나 레녹스는 잠에 취한 줄리엣으로부터 보관이 숨겨진 방을 찾아내는 법을 알아내기 무섭게 그녀를 남겨두고 가 버렸다.

후작가에 가서 보관을 찾아올테니, 얌전히 엘리엇과 함께 수도로 돌아가라는 용건이었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줄리엣이 화가 나는 것은 그녀자신을 트라우마도 극복하지 못하는 어린애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설령 기네스 후작에게 학대당했던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했다.

고 한들 그건 줄리엣이 알아서할 일이었다. 그가 멋대로 줄리 엣에게 위험하다고 생각해 돌려 보낼 권리 따위는 없는 것이었다.

그때 밖에서 한 무리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 기사들이 왔나 봅니다!”

줄리엣의 눈치를 살피던 엘리엇이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제, 제가 나가보지요!”

누가 와?

줄리엣은 의아해서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설마 레녹스가 착실하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기사들을 데리고 돌아온 걸까 싶었으나 말에서 내리는 기사들은 먼저 떠났던 기사들이 아니었다.

“케인 경!”

대신 줄리엣에게 반가운 사람이긴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기사단의 검술 사범인 케인이었다.

“설마 북부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줄리엣은 조금 전 화를 냈던 것도 잊고 놀라 물었다.

"예. 모시러 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반색하던 줄리엣은 그제야 레녹스가 자신을 따돌렸다는 사실을 다시 되새기고 화가 났다.

“이야, 이 분이 공작 부인이십니까 사범님?”

옆에서 껄렁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빙글거리며 말을 건넸다.

퍽.

“아가씨께 무례를 사과드려라, 제롬.”

케인이 거침없이 젊은 남자의 의머리를 쥐어박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숙인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거 참. 빡빡하게 구시기는.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롬입니다."

줄리엣은 마주 인사하는 대신 고개를 갸웃하며 케인에게 물었다. 공작가 기사들을 모두 알고 있는 줄리엣에게는 낯선 얼굴이었다.

“누구예요?"

“새로 들어온 신입입니다. 용병단 출신이라 버릇이 없지요."

케인이 어쩐지 수심 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버릇이 없다는 케인의 말은 겸양이 아니었다.

“그거 아십니까, 아가씨?"

왔던 길을 되짚어, 숲을 통과해 수도로 가는 내내 제롬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줄리엣을 지분거렸다.

“이런 숲에는 무시무시한 게 살지요.”

“무시무시한 거요?"

"예! 예를 들어, 이런 남부의 숲에서는 대표적으로 곤충형 마물이 출몰하는데………."

다른 기사들이 미쳤냐는 투로 제롬을 만류하려고 했지만 줄리 엣은 일부러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만류했다.

“곤충형 마물이요……?"

"예. 그리고 거미나 지네 마물도 종종 나타나지요."

“지네라니! 저는 다리 여럿 달린 건 딱 질색이에요.”

줄리엣이 정말로 겁먹은 척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북부에서 종종 마수 사냥에 참석하고 했던 그녀를 알던 다른 기사들, 예를 들어 케인 경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줄리엣은 대충 제롬의 허세에 적당이 변죽을 맞추는 한 편, 힐끔 그의 말안장에 매달린 술 주머니를 확인했다.

발효된 술은 후각이 예민한 숲의 마물을 불러들이는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하지만 제롬 경은 뛰어난 기사 시니, 저를 지켜주실 수 있겠죠?”

“허……. 아니, 뭐 그렇게까지.

흠흠, 예, 뭐. 그러지요.”

줄리엣은 우쭐대는 멍청이를 냉소적으로 보다가, 그의 어깨너머를 쳐다보았다.

“흠흠, 제가 이런 말까지 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실은 저는 지네 마물도 잡아본 적 있……?"

맨 선두에서 말을 타고 앞서나 가던 제롬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다른 일행들이 모두 조금 뒤쪽에 멈춰서 숲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숲 저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집게가 달린 지네 마물이었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무용담을 늘어놓던 제롬은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 잘 됐네요, 제롬 경."

줄리엣이 그런 그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디, 솜씨 구경 좀 할까요?"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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