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36화 (133/229)

136화.

“후작님!”

이윽고 다가와서 불쑥 얼굴을 내민 것은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 돌로레스?”

“후작님, 돌로레스가 왔어요!"

기네스 후작은 뜻밖의 인물의 의등장에 어리둥절해졌다.

“돌로레스? 네가 어떻게 …….”

돌로레스는 얼른 그를 재촉했 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해요!"

기네스 후작은 정신이 없었다.

돌로레스가 어떻게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자신을 구하러 왔는지, 무엇보다 돌로레스가 여기에 왜 나타났는지 그는 판단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가 아는 돌로레스는 절대 양아버지를 구하러 올 아이가 아니었다. 정이 깊기는커녕 고작 몇 개월 돈으로 고용한 관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돌로레스는 순식간에 들고 온 열쇠로 감옥 문을 열고 기네스 후작을 탈출시켰다. 그것도 지나치게 수월하게.

나오면서 보니 어찌 된 영문인지 경비병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돌로레스가 데려온 하인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다음에야, 기네스 후작은 자신이 얼결에 탈출했다는 걸 깨달았다.

“돌로레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돌로레스는 명령을 받고 후작님을 꺼내드리러 왔어요!"

어쩐지 긴장한 표정의 돌로레스가 다급히 설명했다.

“명령이라니? 누구의?”

“그건 가 보시면 알아요!"

돌로레스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대체 누구지?'

얼결에 탈출한 기네스 후작을 을태운 마차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던 후작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헛. 그러면 그렇지!'

자신은 대귀족이었다. 자신을 구하려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기네스 후작이 마부석을 향해 물었다.

“?”

“여봐라, 어디로 가는 거냐?”

“안전한 곳으로 모시는 중입니 다나리.”

어느 틈에 돌로레스는 모습을 감췄지만 기네스 후작은 눈치를 채지도 못한 채 순종적인 마부의 말투에 안도 중이었다.

“그보다 나 좀…….”

긴장이 풀리자 기네스 후작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 쇠사슬에 묶인 채라는 것이 떠올랐다.

“이봐! 이것부터 풀어 주게!"

하지만 험한 산길을 내달리느라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마부는 한참을 내달린 다음에야 멈춰 섰다.

“내리시죠.”

그러더니 다짜고짜 기네스 후작을 밖으로 끌어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밖으로 끌려 나온 기네스 후작은 몇 걸음 걷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두운 산등성이에 야심한 시각에 어울리지 않게 사람과 말들이 많았다. 그리고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점잖게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생처음 보는 노인이었지만 곧은 허리와 흔치 않은 적발 하며 묘한 기백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이봐! 노인장이 날 여기로 데려온 건가? 목적이 뭐지?"

기네스 후작이 다소 짜증스레 외치자 노인의 시선이 힐끔 그를 향했다.

“혹시 돈이 목적이라면 사례는 충분히….”

난생 처음 보는 노인이었으므로 기네스 후작은 그가 누군가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누구일까?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돌로레스를 보내 칼라일공작가의 경비병들을 때려눕히고 그를 유유히 탈출시킨 깔끔한 일처리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보통이 아닌 인물임이 분명했다.

누구지? 함께 반역을 도모한 2황자? 아니면 뇌물로 매수한 귀족원의 귀족들?

"안녕하세요, 후작님."

그러나 후작을 불러세운 것은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니 너는…….”

무심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았던 기네스 후작은 흠칫했다.

“.……줄리엣 모나드?"

거기에는 장식 없는 검은 옷을 입은 줄리엣 모나드가 서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었다.

“네, 맞아요. 제가 후작님을 꺼내드렸어요.”

어째서?

기네스 후작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줄리엣 모나드는 칼라일 공작의 정부였다. 그런 줄리엣이 왜?

'……혹시?’

"그 계집은 과거 네 노예였다.'

'달리아 님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러니, 돌로레스를 네 후처라고 소개하면 그 계집의 동정을 사기 쉬울 거다."

줄리엣 모나드가 과거에 노예였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달리아 님이 보여주는 기적'에 홀딱 경도된 기네스 후작은 달리아의 말을 믿고 따랐다.

"조금만 윽박지르면 트라우마로 겁을 먹고 따를 테지.”

'하! 역시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보군.’ 상황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한 기네스 후작은 금방 득의양양해졌다.

'역시 달리아 님은 이런 상황까지도 예측해두신 거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줄리엣 모나드는 몹시 연약해 보였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멋대로 휘두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였다. 그에게 무서운 건 칼라일공작이었지 어린 계집애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감을 얻은 기네스 후작은 거만하게 명령했다.

“뭐가 됐든 잘했다. 칭찬해 줄테니 어서 이거나 풀어다오.”

“칭찬?”

줄리엣은 명령에 따르기는커녕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잠시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걸 보고 기네스 후작은 저 계집이 울음이라도 터뜨린 게 아닌가 의심했다.

“풋.”

그러나 다음 순간, 줄리엣은 마구 웃음을 터뜨렸다. 명랑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웃어?’

기네스 후작은 눈썹을 꿈틀했으나 습관적으로 마구 화를 냈다.

“이 비천한 것아! 매질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채찍질하기 전에 당장 이걸 풀어!”

“채찍이라…… 맞아. 기억나네.”

그러나 줄리엣은 겁을 먹지도,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금 메마르게 웃었다.

“그 붉은 방 말이지.”

기네스 후작은 움찔했다.

“그걸, 어떻게……. 칼라일 공작에게 들었나?”

“내가 당신의 역겨운 면상을 보러 온 이유는 궁금한 게 있어서야.”

줄리엣은 웃지도 않고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경멸어린 시선에 에흙바닥에 꿇어앉은 기네스 후작은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다.

맙소사.

왜 이런 여자가 제 명령에 따를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는지 알수 없었다.

색소가 옅은 싸늘한 푸른 눈은 꼭 무자비한 누군가를 연상시킬만큼 위압적이었다.

“구, 궁금한 거라니? 좋아. 나를 먼저 풀어준다고 약속하면 대답해주…….”

"돌로레스를 네 후처라고 속이면 내 동정심을 살 수 있을거라고 말했던 게, 달리아 프란이었지?"

“… 너 따위가 달리아 님을 어떻게 알고 있지?”

기네스 후작은 작전을 바꾸기로 했던 것도 잊고 무심코 되묻고 말았다.

줄리엣은 그것으로 충분히 대답이 됐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래, 역시 달리아가 맞구나.”

그녀는 홀가분하단 듯 뒤돌아서서 누군가에게 말했다.

“제 용건은 끝났어요."

“이, 이봐!”

혼자 남겨질까 봐 더럭 겁이 난 후작이 외쳤다.

그러나 줄리엣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한참 전부터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내 이름은 리오넬 르바탄일세."

기네스 후작을 물끄러미 보던 노인이 불쑥 말했다.

“예..…?”

기네스 후작은 그 말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작은 상단을 하나 운영하고 있던 기네스 후작이 노인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신음처럼 이름이 흘러나왔다.

“리, 리오넬 르바탄……?"

허황된 이야기였지만 기네스 후작은 도저히 노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부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는 붉은 머리칼의 남자. 빛바랜 것처럼 나이 들었지만 허리는 꼿꼿하고 눈빛은 형형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가 눈앞에 있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달리아 님이?'

기네스 후작은 또다시 근거 없는 희망에 부풀어 상황을 끼워 맞췄다. 조금도 이성적이지 않은 판단이었으나 기네스 후작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기이하게 눈을 번뜩였다.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줄리엣모나드 따위는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적왕, 리오넬 르바탄이라니!’

그 정도 되는 거물이라면 북부 공작의 손에서 그를 빼돌리는 것도 가능할 법했다.

전설적인 인물이 자신을 구해 준 것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기네스 후작은 흠모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르바탄 님.”

붉은 머리의 노인이 기네스 후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상태로 묶여 있느라 불편하겠군.”

"아, 예. 좀 그렇군요.”

기네스 후작은 멋쩍다는 듯 대답했다.

대화가 이쯤 오갔으면 그 다음은 당연히 적왕이 옆에 있는 부하들을 시켜 자신을 풀어 달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

그러나 적왕의 부하들은 멀뚱멀뚱 보기만 했다.

“저…… 르바탄 님?"

“달빛이 좋군.”

리오넬 르바탄은 한가하게 달구경을 했다. 달빛이 좋긴 했지만 오래 묶여 있어야 했던 기네스후작은 좀 짜증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르바탄이 불쑥 물었다.

“모나드 백작 부부가 죽던 날 밤에도 이렇게 달빛이 좋던가?”

“아, 아닙니다. 그날은 돌연 천둥번개가…….”

후작은 화들짝 놀라 말을 얼버무렸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흠흠.”

“실언이 아니라 증언이겠지."

"예?"

“그렇지 않은가? 네놈이 모나드부부의 죽음을 사주했으니.”

“무, 무슨 말씀이신지 당최"

기네스 후작은 허둥거렸다.

그가 백작 부부의 죽음을 사주한 것은 맞지만 대체 왜 리오넬르바탄이 이제 와서 그 일을 추궁하는 것인지, 후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리오넬 르바탄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 아닌가? 동부의 적왕과 모나드 백작가 같은 몰락 귀족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뭐,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애써 웃으며 부정하려던 기네스후작의 머릿속에 순간 어떤 기억이 스쳤다.

죽은 모나드 백작 부인.

그러니까 줄리엣 모나드의 모친. 한미한 기사의 딸이라고 알려졌던 그 여자는 필시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그래. 그 애가 내 딸이네."

리오넬 르바탄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

기네스 후작은 대답할 말을 몰라 멍하니 그를 보기만 했다.

리오넬 르바탄은 아랑곳 않고 품을 뒤져 뭔가를 끄집어냈다.

“그래, 내 딸을 죽인 걸로도 모자라, 내 손녀에게도 몹쓸 짓을 하려 했다지?”

기네스 후작은 그가 지칭하는 '손녀'가 누구인지 완벽히 이해했다. 굳이 칼라일 공작까지 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리오넬 르바탄의 말과 표정에는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리오넬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보자 기네스 후작은 하얗게 질렸다.

“사, 살려 주….….”

후작은 주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하지만 저것의 이름이 사념체고, 저것이 사람의 몸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는 똑똑히 목격했었다.

"듣자 하니, 요 이상한 걸 그림자에 집어넣으면 진실만을 말하게 된다지?”

그 사념체를 실험용 노예들에게도 시험 삼아 써 보고, 줄리엣모나드 역시 제 뜻대로 이용하려 계획을 꾸민 기네스 후작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할 처지가 못 됐다.

“그것 참 편리한 일이야. 이것만 있으면 네놈이 내 딸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속속들이 토해낼 게 아닌가?”

기네스 후작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제야 문득, 감옥에서 자신을 꺼내 준 돌로레스부터가 어떤 계획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럼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자고, 시간은 아주 많으니."

리오넬 르바탄은 태연히 유리병을 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 어르신! 살려 주…….”

“너무 걱정 말게. 증언을 듣고 난 다음, 판단은 공정하게 내 아들들이 해 줄 테니까.”

기네스 후작은 어떤 것을 더 공포스럽게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리병에서 빠져나온 사념체가 그의 그림자를 향해 맹렬히 달려 왔다. 그리고 꿇어앉은 그의 주변으로 험악한 얼굴을 한 장정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기네스 후작이 온전한 정신과 신체로 목격한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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