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35화 (132/229)

135화.

줄리엣은 초조해졌다.

황실의 손에 남부 후작저가 넘어가면 보관을 되찾기 어려워진다.

"알고말고요. 후작의 개인실에 보관해 둔다고 하더군요.”

기네스 후작이 보물을 숨겨 두는 개인실. 듈턴 부부는 보석 관이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 비밀 방에 들어가는 방법은 오직 후작 혼자만이 알고 있는 데……."

하지만 그 비밀 공간에 드나드는 방법을 아는 것은 기네스 후작 외에도 한 사람 더 있었다.

줄리엣은 비밀 공간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서재의 맨 왼쪽 서가, 세 번째 줄의 초록색 책.’

정확히 그 책을 움직이면 비밀 공간으로 향하는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후작은 그 안에 각종 진귀한 수집품들을 모아 놓았다.

줄리엣은 체벌실 못지않게 그 방에도 자주 갇힌 기억이 있었다. 의심이 많은 기네스 후작은 그곳에 각종 비밀스러운 물건들을 숨겨 두었다.

“레녹스…… 전하는 어디 계세요?”

줄리엣은 마음이 급해졌다. 황실이 후작 저택을 차지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어제 자정에 나가셔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어디 가셨는데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줄리엣은 레녹스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공작가 사람들이 기겁해서 그녀를 만류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줄리엣은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욕실로 끌려왔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줄리 엣은 차례로 결론을 내렸다.

‘우선 정신을 차리고 레녹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기네스후작 저택의 비밀 방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러나 한나절 내내 레녹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줄리엣은 더운 물에 목욕을 하고 나와서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깜빡 졸았다.

침실에 앉아 잠깐 잠들었다가 눈을 반짝 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창밖이 어둑어둑했다.

초저녁쯤 되었나, 하고 램프를 를켜려던 줄리엣은 놀랐다.

“레녹스?”

어두운 침실 안, 한 남자가 창가에 기대 서 있었던 것이다. 줄리엣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전하, 왜 거기 계세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간 줄리엣은 의아해졌다. 쌀쌀한 계절에 에어울리지 않게 그는 머리칼이 젖어 있었다. 급히 물이라도 뒤집어쓰고 온 사람처럼.

'피 냄새.’

줄리엣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레녹스에게서는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났다.

“어디 다치셨어요?”

“아니.”

물어 놓고도 줄리엣은 쓰게 웃었다. 상대는 누구 피냐고 묻는 게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눈치 빠른 줄리엣은 레녹스의 기색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전하.”

"왜.”

“혹시 제가 어제 무슨 말을 했나요?”

하루 종일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었다. 줄리엣은 자신이 술에 취해서 그에게 뭔가 속내를 털어 놓았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그녀를 물끄러미 마주보던 레녹스는 대답대신 엉뚱한 걸 물었다.

"……안아 봐도 되나?"

“안 돼요.”

줄리엣은 미간을 좁히면서 슬쩍 피했다. 그리곤 재차 물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줄리엣.”

지난번 버려진 사원 유적에서 그랬던 것처럼, 혹시 레녹스가 또 그녀의 과거 어떤 기억을 엿본 것은 아닐까.

그것만큼은 싫었다.

특히나 기네스 후작에 대한 부분은. 줄리엣은 그것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레녹스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도 싫었고 그에게 치부를 내보이는 것도 싫었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안했다고요?"

“그래.”

줄리엣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곁에서 보낸 세월이 몇 년인데.

레녹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정도는 알았다.

줄리엣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레녹스.”

그녀는 레녹스가 어디에 다녀왔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설마, 기네스 후작을 벌써 죽여 버린 건 아니시겠죠?”

“죽이지 않았어.”

붉은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레녹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직은.”

줄리엣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죽이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줄리엣은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머뭇거렸다.

“후작은 아직 죽으면 안 돼요.”

곱게 죽여서도 안 되고, 최소한 공작가의 보관을 되찾을 때까지, 혹은 기네스 후작이 그걸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에 대해 추궁할 때까지는 살려 둘 가치가 있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줄리엣은 이 말이 레녹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걱정스러워 그를 힐끔거렸다. 혹시 기네스후작의 역성을 들거나 후작을 봐주자는 말처럼 들렸으면 어떡하 하지?

“그러니까 제 말은요……."

그러나 레녹스는 뜻밖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 했다.

“그래.”

줄리엣은 생각보다 순순한 레녹스의 태도에 위화감을 느꼈다.

“전하, 정말 괜찮으세요?"

줄리엣은 그가 조금 걱정스러워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아예 온몸이 젖어 있는 채라는 걸 깨달았다. 어디서 뭘 하고 온 건지.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밖에 비라도 오는 걸까?

“세상에, 안 추워요?"

“네가 피를 싫어하잖아.”

그래서 물을 뒤집어썼다고?

이런 논리의 비약이 어디 있담.

줄리엣이 미간을 좁혔다.

“일단 담요라도….….”

“줄리엣.”

그러나 줄리엣이 그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기도 전에, 레녹스가 손을 뻗어 조심스레 그녀의 손끝을 붙잡았다.

“입 맞춰도 되나?"

"......"

정말로 이상했다.

그녀가 아는 레녹스 칼라일은 일일이 이런 걸 묻는 남자가 절대 아니었다.

사람을 내키는 대로 취해서 착각할 만큼 극진히 대해 주다가도 싫증이 나면 언제든 가차 없이 버릴 것처럼 제멋대로 구는 남자였다.

줄리엣이 기억하는 레녹스 칼라 일은 그랬다. 거기에 그녀의 의사를 묻는다거나 허락을 구하는 장면 같은 건 없었다.

줄리엣은 거절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나 정말로 이상한 것은 레녹스의 다음 행동이었다.

"!"

말 그대로 입 맞출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레녹스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가락 끝에 입술을 눌렀다.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이.

그리고는 창틀에 걸터앉은 채로 마주 서 있는 줄리엣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줄리엣은 어쩐지 기분이 조금 이상해져서 그의 어깨를 잠시 토닥였다.

“전하,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레녹스는 간신히 떨리는 손을 그녀의 등허리에 얹고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는 결코 줄리엣에게 자신이 보았던 것을 털어놓지 못할 터였다.

* * *

감옥 안에서 잠시 혼절해 있던 기네스 후작은 차가운 돌바닥에서 퍼뜩 눈을 떴다.

'칼라일 공작, 그 애송이가…….’

목에서 꺽꺽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몇 번째 혼절했다 깨어난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평생을 대귀족으로 살아오면서 이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기네스 후작은 누군가를 학대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 부류였다.

추악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의 고통을 즐기는 일에만 익숙했지, 누군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일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나를…!'

후작은 지금껏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은 떠올리지 못하고 치를 떨었다.

"숨만 붙여 놔.”

칼라일 공작은 그렇게 명령했다. 가장 악랄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그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를 결코 죽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공작의 명령을 받은 자들은 시.

간에 맞춰 들어와 후작을 채찍질했다. 기막힌 것은 후작이 졸도한 틈을 타서 부러진 뼈를 맞춰주고 친절히 치료해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는 어김없이 매질이 이어졌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자 기네스 후작은 제발 편히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에 언제 사념체가 그를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감.

기네스 후작은 끔찍한 공포에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기네스 후작은 솔론 추기경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전해 들어 알았다. 솔론 추기경은 저주의 의부작용으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상태라고 들었다.

‘저주가 실패하는 바람에…….'

후작은 저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사념체가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가 저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 사념체에 잠식당한 인간은 자아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뿐이었다.

'젠장. 내 꼴이 이게 뭐냔 말이야!'

기네스 후작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남부의 대귀족이자 대부호였다. 그에게 이렇게 굴 수는 없었다.

칼라일 공작은 그를 살려놓았다.

가 법정에 세울 계획인 듯했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게지.'

기네스 후작은 이 감옥에서 벗어난 이후를 기대하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세도가 중에 그가 뇌물을 먹이지 않은 상대는 찾기 어려웠다. 이 상황만 넘기면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을 것이다.

“두고 보자.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제국은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철컥.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들려온 발소리에 기네스 후작은 흠칫 놀랐다.

뚜벅뚜벅.

기네스 후작은 이제는 발소리만 들어도 기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후작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벌벌떨면서 감옥 안의 벽으로 바싹붙었다.

“누, 누구냐?”

잊혀진 줄리엣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