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공작? 나와 협상을 하러 온 것이 아닌가?”
결국 초조해진 후작이 입을 열었다.
“협상?”
그런데 칼라일 공작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그런 단어를 를처음 들어본다는 것처럼.
“그런 건 무고한 여자를 저주하기 전에나 가능하겠지.”
“저, 저주라니?나는 모……!”
후작이 잡아떼자 레녹스 칼라일이 뭔가를 품에서 꺼내 철장 사이에 올려놓았다.
작은 유리병이었다.
“이건 알아보겠지.”
눈을 끔뻑이던 후작은 다음 순간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다.
“어…… 어떻게……!"
후작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작은 유리병 안에 담긴 것은 파닥거리는 검고 반투명한 물체였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건 며칠전, 그들이 줄리엣 모나드를 세뇌하기 위해 보냈던 사념체였으니까.
“말도 안 되는……."
후작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유리병에 갇힌 조그만 사념체에 꽂혀 있었다.
줄리엣 모나드에게 보낸 사념체들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솔론과 기네스 후작은 당연히 그녀가 꼼짝없이 최면에 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리한 낙관론은 아니었다. 사념체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이미 오래 전 멸종했다고 했으니.
하지만 유리병 안에서 버둥거리는 것은 틀림없는 사념체였다.
“마법사들이 재밌는 얘기를 들려주더군.”
레녹스 칼라일은 단조로운 투로 말했다.
새끼 용이 수상한 사념체를 그 앞에 물어다 놓은 것은 운이 좋았었다.
그는 사념체를 생포한 즉시 고명한 마법사들을 잔뜩 불러들였다. 호출된 마법사들은 열정적으로 '보름달의 주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오래 전 금지된 저주입니다. "
"사람을 자기 의지 없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금술이지요.”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주 유명한 저주라던데.”
레녹스는 작은 유리병을 흔들었다. 그러자 안에 든 사념체가 잠에서 깨어나 팔딱거렸다.
후작은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념체를 어떻게 잡아서 가둔 것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저주가 실패하면 주술을 건 상대에게로 그 몇 배의 반작용이 돌아간다던가?”
"그…!"
그제야 기네스 후작은 정신을 차렸다. 솔론 추기경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었다. 저주가 강력할수록, 그 부작용도 강력하다고.
“덕분에 네 같잖은 추기경 동료는 저주의 부작용으로 손쉽게 죽어가고 있지.”
“그, 그런….”
기네스 후작이 움찔했다.
감옥에 갇힌 이후, 후작은 바깥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차단당했다. 그래서 솔론 추기경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사지가 썩어들어 간다던가.”
기네스 후작은 두려운 눈으로 작은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안에 갇힌 작은 사념체가 마구 날뛰고 있었다.
“히익.”
후작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안에 든 사념체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저 사념체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온다면……!
기네스 후작은 공포에 질렸다.
그는 사념체에게 조종당하는 노예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를 기억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모르지.”
후작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었다.
는 듯, 칼라일 공작이 조용히 말했다.
"이, 이봐! 칼라일 공! 잠시 내 말 좀 들어보게! 나는 속았을 뿐이야!”
후작은 다급해졌다.
그가 솔론 추기경의 계획에 찬성했던 것은 저주가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사념체가 칼라일의 손에 있었다. 즉, 그가 줄리엣 모나드를 저주했다는 증거가 남아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걸 쓰진 않을 거야."
"......?"
“그러니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아.”
"무……, 무엇을 말인가?"
기네스 후작은 긴장했다. 그러나 레녹스 칼라일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네놈의 저택에 체벌실이 있 있나?”
"그렇소. 하지만 쓰지 않은지 꽤 오래됐……!"
“그 방에서 몇 명이나 죽였지?"
"......"
레녹스 칼라일은 직접 보기라도한 것처럼 정확히 읊고 있었다.
설마, 후작 저를 뒤지다가 체벌방을 발견한 걸까?
기네스 후작은 불쾌했지만, 꾹참았다.
후작은 칼라일 공작이 그렇게 정의로운 인물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고작 아무 관련도 없는 여자 몇 명을 죽였다고……..
기네스 후작은 일단 잡아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모르는 일이요. 체벌실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여자를 죽이다니……!”
화륵.
그때, 복도 끝에서 불이 한 번 타올랐다.
움찔한 기네스 후작은 어쩐지 섬뜩하다고 생각했다.
이 감옥은 고위 귀족이나 정치 범을 수용하는 용도로, 현재 수감 되어 있는 것은 기네스 후작혼자뿐이었다.
조금 전 레녹스가 기사와 경비병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냈으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칼라일 공작과 기네스 후작, 단 두 사람 뿐이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복도에 놓인 화롯불이 저 멀리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깜빡거림은 서서히 그들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
변명을 주워섬기던 기네스 후작은 섬뜩해졌다.
레녹스 칼라일의 손에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장검이 들려있었다. 그는 귀검을 가지고 있다던 공작의 소문을 떠올렸다.
“여, 여보게. 칼라일 공!”
기네스 후작은 창살을 붙잡고 애걸했다.
“왜 이러는가? 목숨만 살려주면 뭐든 주겠네……!"
그러나 레녹스 칼라일은 태연하게 유리병을 도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걱정하지 마. 당장 죽진 않을 테니까.”
“뭐, 뭐야……?”
팟.
마침내 그들이 서 있는 감옥 바로 앞의 화로에도 불이 켜졌다.
눈 앞이 환해졌다.
덕분에 후작은 눈앞의 칼라일공작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다만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꼴을 당할 뿐이지.”
그는 놀랄 만큼 냉랭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기네스 후작은 기겁했다. 후작은 더 이상 칼라일 공작을 보고 있지 않았다.
크르르,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형체 없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냐!”
미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후작은 이상한 점을 하나 더 포착했다.
화롯불 덕분에 감옥 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그리고 감옥의 벽에는 존재할 리 없는 무수한 그림자들이 그의 주변에 늘어서 있었다.
"커헉…!"
빠각.
기네스 후작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 앞에는 만년설처럼 싸늘한 얼굴의 칼라일 공작이 서 있었고, 후작 자신은 바닥에 쓰러진 채 관절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어지간히도 시끄럽군.”
어느 틈엔가 감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칼라일 공작의 발이 쓰러진 후작의 가슴팍을 지그시 밟았다.
후작은 필사적으로 칼라일 공작과 눈을 맞추고 목숨을 구걸하려 했다. 그러나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난 그리 자비롭지 못해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화롯불이 칼라일 공작의 옆얼굴에 음영을 을드리웠다.
감정이 극도로 절제된 그의 얼굴은 신전의 성화에나 등장할 것처럼 금욕적이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날씨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담담히 말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해 주지.”
다음 순간, 감옥 안에는 끔찍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
줄리엣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떴다.
"흐윽.”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던 줄리엣은 다시 시트 위로 엎어졌다.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누가 머릿속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똑똑.
“네.”
마침 그 의문을 푸는 걸 도와줄 사람이 문밖에서 등장했다.
집사라도 되는 것처럼 어색하게 차 쟁반을 들고 온 엘리엇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흠흠,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네. 들어오세요.”
줄리엣은 재빨리 옷차림을 점검한 뒤 문을 열어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엘리엇은 간밤에 있었던 줄리엣의 기억을 일깨워주었다.
“어제 늦게 돌아오셨잖습니까."
“...…아.”
줄리엣은 단번에 지난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남부 후작가에서 일했다던 듈턴 부부에게 원하는 정보를 캐내려고 술을 받아마셨었다.
그들의 기억과 줄리엣의 추리가 맞다면, 레녹스가 찾는 공작가의 가보를 당장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남부, 기네스 후작의 저택에 말이지..'
하지만 당장은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단 술일수록 뒤끝이 나쁘다더니.
‘미쳤나 봐..'
얼핏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끌어다 마차에 태우던 레녹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뭔가 이상한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같이 마차에 탔던 것은 기억나는데, 이후에 저택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은근 걱정이 앞섰다.
엘리엇이 가져다준 수프를 몇 수저 떠먹던 줄리엣이 불쑥 말했다.
“엘리엇, 저 남부에 다녀오고 싶어요.”
"예? 남부에서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되셨잖습니까?"
하지만 줄리엣은 마음이 급했다.
공작가의 가보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기네 스 후작이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거긴 왜 가시려고요?"
“꼭 좀 찾을 게 있어서요.”
“기사들을 보내 찾아오라고 하면 안 됩니까?”
줄리엣은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직접 가야 해요.”
공작가의 기사들을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아니었다. 직접가서 눈으로 확인하는 게 옳았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의 진실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줄리엣은 딱히 레녹스의 허락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별로인 것은 맞았다.
“게다가 후작가의 저택은 황제폐하께서 사태가 마무리될 때까지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시겠다고.."
“안 돼요!”
그러자 줄리엣이 깜짝 놀라 외쳤다.
어제는 대충 엘리엇의 부탁으로 귀족원에서 표를 받아주겠다고 도와준 것뿐이었지만, 이제는 줄리엣이 진짜로 후작저택이 필요했다.
'거기에 보관이 있단 말이야.'
그리고 어쩌면 달리아도 거기 있을지 몰랐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