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레녹스는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침실에서 벗어났다.
기네스 후작. 체벌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걷다가 아무도 없는 어두운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새카만 검을 꺼내 들었다.
레녹스는 오른손으로 검날 부분을 감싼 다음 망설임 없이 손을 움직였다.
서걱.
섬뜩한 감촉과 함께 그의 손에 피가 묻어났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붉은 핏줄기는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대신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마치 검이 게걸스럽게 그 피를 흡수해버린 것처럼.
(언제 맛봐도 탐나는 피야.)
그리고 이제는 익숙한 거대한 흑표범이 그의 눈 앞에 나타났다.
“이제야 나타나는군."
(우리가 부른다고 재깍재깍 나와야 할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잖아. 안 그래?)
검은 표범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네 입으로 네가 그랬잖아? 악마와 계약하는 건 사양이라고.)
“상관없어.”
레녹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인지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좋아.)
기분이 좋은 듯 흑표범은 꼬리를 살랑거렸다.
(용건이 뭐야?)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이봐. 악몽을 꾸게 하는 것도,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도 모두 내 영역은 아니라고.)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의 요구를 알아들은 검은 표범은 투덜거렸다.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못 하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검은 표정은 조금 발끈한 듯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커다란 고양이처럼 앞발을 핥은 다음, 마지못해 말했다.
(악마가 못하는 건 없어. 하지.
만 기억을 왜곡하거나 악몽을 꾸게 만든다던가. 그런 시시한 짓은 내 능력의 전부가 아니란 걸 알아두란 거지.)
흑표범은 어쩐지 잔뜩 뽐내는 투로 말했다.
(나는 내 형제들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그럼 네 능력은 뭐지?”
(인간의 영혼을 먹어치우는 거지.)
최대한 고통스럽게.
흑표범은 대단한 것처럼 자랑했지만 레녹스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보여 줄 수 있나?"
(……이번 한 번만이야.)
투덜거림과 동시에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다음 순간, 레녹스는 고풍스럽고 낯선 고성의 복도에 서 있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에서 들렸다. 낯설고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기네스 후작의 여덟 번째 아내 랍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낯선 방문앞에 멈춰섰다.
은밀히 숨겨진 듯한 방이었는 데,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풍경은 전쟁터 못지않게 살풍경했다.
그리고 그 안에 어떤 여자가 있었다.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그를 안내한 수하들이 한마디씩 덧붙였다.
"불길한 여자입니다.”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수하들의 충고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작은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붉은색으로 꾸며진 작은 방에는 손목이 묶인 여자가 매달려 있었다.
매질을 당한 것처럼 피투성이 등을 하고, 죽은 눈을 한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 * *
새벽녘.
어울리지 않게 수도의 감옥은 소란스러웠다.
“공작이 아니면 그 모나드 백작, 그 계집이라도 만나게 해 달란 말이다!”
“아, 글쎄 시끄럽다고!”
안에 갇힌 기네스 후작은 누구든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공작가의 기사는 잔뜩 짜증이 난 사태였다.
“계집이라니, 목 달아나고 싶지 않으면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후작님.”
공작가의 기사, 주드가 험악하게 후작을 노려보았다.
그는 사사건건 줄리엣을 깎아내리는 후작의 말버릇이 못마땅한 참이었다.
“멍청한 놈.”
기네스 후작이 정신을 못 차리고 코웃음 쳤다.
"나는 남부의 대영주다. 네 주인이 아무리 안하무인인들 나를 멋대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나?"
“입 닫으시지요, 후작 나리.”
험하게 대꾸했지만 주드는 속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기네스 후작은 점잖은 대귀족인척하지만 영 꺼림칙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일곱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같이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의 아내들이 정말 병으로 죽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남부의 대귀족인 후작을 조사할 만큼 간 큰 사람도 없었다.
칼라일 공작가가 북부에서 왕과 같은 지위를 누리는 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네스 후작은 제국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칼라일 공작은 뇌물이나 협상안 따위에 눈이 멀 사람이 아니었고, 줄리엣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후작을 가만히 둘 리 없었다.
그러나 황제나 귀족원은 다른 문제였다.
귀족원의 다른 귀족들은 얼마든지 매수될 수 있다. 기네스 후작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땅 부자였고, 남부의 비옥한 토지는 누구나 탐을 냈으니까.
주드 헤이온은 귀족 출신이다.
보니 귀족들의 사고방식을 잘 알았다.
귀족원이 꽁꽁 뭉쳐서 기네스후작에게 매수된다면 제아무리 칼라일 공작이라고 꽤 골치 아픈 상황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잔뜩 여유로운 척을 하는 기네스 후작 역시 속으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젠장, 그 계집이 대체 어떻게 최면에 걸리지 않은 거지?'
후작은 계획이 실패한 것을 모조리 멍청한 추기경의 탓으로 돌렸다.
'그따위 모자란 신관 놈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사실 기네스 후작이 초조해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보관을 누가 발견하기라도 하면…….’
기네스 후작이 걱정하는 것은 저택에 숨겨진 방이었다. 공작가의 기사들이 아무리 샅샅이 저택을 뒤져도 그 비밀의 방의 입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무시무시한 물건이다.
‘달리아 님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실 텐데…….'
기네스 후작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보다도 자신이 모시는 존재가 분노할까 봐 더 두려웠다.
기네스 후작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칼라일 공작을 회유하는 일임을 알았다.
그러나 칼라일 공작에게 온갖 달콤한 조건을 제시하고 구슬려도 그는 넘어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서신을 밖으로 반출하는 것조차 들어주지 않았다.
"이봐, 당장 칼라일 공작 놈이라도 데려오란 말이다!”
기네스 후작은 애써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위엄있게 호통쳤다.
그러나 주드 헤이온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아, 거 되게 시끄럽네!"
철컥.
후작을 노려보던 주드는 대뜸감옥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재갈을 물렸다.
"너, 너 이놈! 이게 뭐 하는짓……!”
"아, 예예.”
주드는 들은 척도 않았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 얌전히 잠이나 잡시다, 예?”
읍! 으읍!
그러나 주드의 바람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감옥 입구에서 수상쩍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철컹. 끼익.
기네스 후작은 놀라서 어둠 너머를 보았다.
'이 시간에 방문자라니?'
“누구냐!”
벼락같이 검을 뽑고 경계 태세를 취했던 주드는 다음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풀어.”
다가온 남자가 명령했다.
감옥 안은 온통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기네스 후작은 건방진 기사 놈이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도로 자신의 재갈을 풀어주는 것을 보았다.
“주드 헤이온.”
“예.”
“잠시 나가 있지.”
“……예.”
주드는 다른 경비병들을 데리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화륵.
그때 긴 복도 끝에서 화롯불 하나가 켜졌다.
그제야 기네스 후작은 상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레녹스 칼라일 공작이었다.
“흠흠, 그래. 칼라일 공작. 일단 얘기를 나누려면 사람을 물리는 게 편하겠지?”
'그럼 그렇지.' 아무리 북부의 공작가라도 대충 귀족원의 귀족 중 상당수를 자신이 매수해둔 상황에서 그들 모두를 적으로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음이 틀림없었다.
적않
기네스 후작은 그렇게 넘겨짚었다.
레녹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게다가 차분하다 못해 서늘한 무표정이라 조금 불안했지만 기네스 후작은 최대한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현명한 결단을 내렸군, 공작.
잘 생각했네.”
아무리 레녹스 칼라일이라도 그의 제안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남부의 비옥한 땅은 북부의 공작에게도 탐나는 물건일테니.
기네스 후작은 완전히 안도하곤 우쭐해졌다.
“나랑 손잡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거외다. 그럼 구체적인 얘기를 나눠 볼…….”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레녹스 칼라일은 감옥에 들어온 이래로 단 한마디도 그에게 건네지 않고 있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