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그에겐 물을 자격조차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는 기어코 묻고 말았다.
빈정거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지만 일일이 부아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열심히 카드를 들여다보던 줄리엣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 왔다.
"아뇨.”
줄리엣이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어 넣었다. 담백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왜?”
양심도 없지.
레녹스는 순간 줄리엣이 저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다.
살살 눈치를 봐서 하는 입에 발린 말이라도 좋았다.
뻔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몸이 아프다는 핑계라도 괜찮았다.
좋아해서라는 답은 바라지도 않았다. 최소한 6개월간의 계약 관계의 도리를 들먹이더라도…….
“저는 착실하지 않잖아요.”
순간, 그는 허를 찔린 기분이 되었다.
“착실한 신랑감이라면 마찬가지로 착실한 신붓감을 찾을 거래요.”
그러나 줄리엣은 그를 보지도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귀부인들께서는 제가 걱정돼서해 주시는 말씀이겠지만,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줄리엣은 눈매를 얌전히 내리깔고 조곤조곤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가며 설명했다.
“소문도 나쁘고, 부모님도 안계시고, 가진 건 낡은 저택뿐이라. 불쌍하지만 좋은 집안과 결혼하기는 영 글렀댔어요.”
“제가 눈치 없이 정말로 아드님과 춤을 추면 슈나벨 후작 부인께서 좋아하지 않으시겠죠. 다른 부인들께서도 마찬가지이실 테고요.”
순간 레녹스 칼라일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런 순간에조차,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줄리엣은 손쉽게 그를 진창으로 처박는다. 고작 말 몇 마디만으로도 충분하다.
“줄리엣.”
“네?”
악의 없이 동그란 눈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대체 ”
그 시선이 꼭 날카로운 칼로 그의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레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에게는 그런 걸 물을 자격이 없었다.
줄리엣이 불시에 그를 떠나 버린 직후, 그는 이따금씩 그녀가 제가 아닌 누군가에게 안겨 있거나, 환하게 웃어 주는 상상을 했다.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 그때는 얼굴 모를 상대를 미워할 수라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줄리엣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은 그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스스로를 낮추는 대신 그녀는 는갖고 싶은 걸 다 발아래 둬야 옳았다. 어떤 의도도 없이 그를 나 락으로 처박아 버리는 것처럼.
그래야 마땅했다.
'제깟 것들이 뭐라고, 감히.' 대체 누가 네 자존심을 그리 깎아내리고 너를 그렇게 여기고 생각하게 만들었느냐 물을 필요도 없었다.
줄리엣이 그런 소리를 듣도록 내버려 두고, 제 연인이 무슨 소리를 듣든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레녹….”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때 줄리엣이 그의 팔에 고개를 기대고 걱정스럽게 웅얼거렸다.
"화 나셨어요?”
“....… 환장하겠군.”
눈이 마주치자 헛웃음이 났다.
레녹스는 줄리엣에게 술을 권한 것들이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죄다 찾아내서 가만두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마차가 공작저에 도착했을 즈음, 줄리엣은 스르륵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공작님? 저희가…….”
“조용히 해.”
하인들이 달려 나왔지만 레녹스는 최대한 줄리엣을 깨우지 않으려 조용히 안아다 침실에 눕혔다.
침대 위에 줄리엣을 곱게 내려놓고 하녀를 부를까 망설이던 레녹스는 그녀의 구두와 틀어 올린 머리가 불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구두를 벗기는 거야 수월했다만 머리핀을 풀어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전하.”
"왜.”
어느 순간 줄리엣이 잠에서 깨서 조용히 눈을 빛내며 그를 보고 있었다.
“젠장, 이건 어떻게 푸는 거야?”
레녹스가 투덜거렸지만 줄리엣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줄리엣이 갑자기 배시시 웃어버렸다.
“저, 알아냈어요.”
“뭘.”
“전하가 찾는 게 어디 있는지요.”
줄리엣이 갑자기 잠꼬대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레녹스는 엉킨 머리칼을 풀어내느라 정신이 팔려 흘려들었다.
“내가 알려 주면, 전하를 보내주면 그 여자를 찾아올 거죠?”
“여자?”
“그리고 또 나한테 독이 든 잔을 줄 거고요.”
“…뭐?”
레녹스는 일순간 멈칫했다.
“방금 그거 무슨 말이야."
"괜찮아요. 저도 알아요.”
“줄리엣.”
키득거리는 줄리엣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레녹스가 애먹던 머리핀을 너무 쉽게 빼낸 다음 무거운 드레스마저 벗어 버렸다.
드레스 아래 받쳐 입는 가벼운 슈미즈 차림이 된 줄리엣은 발그레한 뺨을 하고, 평소에는 절대 보여 주지 않는 몽롱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니까, 또 겪어도 괜찮을 거예요. 이번에는요."
줄리엣은 싱긋 웃은 다음 시트안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레녹스는 확신했다.
이런 얼굴로 웃는 여자를 자신이 사랑하지 않았을 리 없다. 제 손으로 독이 든 잔을 마시게 했을 리가 없다.
부드러운 연갈색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줄리엣은 뒤척이더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는 바람에 그녀의 흰 목덜미와 매끈한 등이 드러났다.
레녹스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반면 그가 얼핏 엿보았던 과거의 줄리엣은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매질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상처투성이였던 줄리엣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숨이 턱 막혔다.
“줄리엣.”
“네.”
“예전에 네 등에 있던 상처, 그건 어쩌다 생긴 거지?"
지금이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건 지난 며칠간 레녹스 칼라 일을 지독히도 괴롭혀 온 질문이었다.
잠시 보았을 뿐이지만 과거의 줄리엣은 보는 사람이 절로 안쓰러워질 만큼 오래된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꼭 채찍 같은 걸로 집요하게 학대당한 듯한 흔적이었다.
그가 엿본 것은 오직 단편적인 장면들뿐이었다. 레녹스는 왜 과거의 줄리엣이 그토록 안쓰러운 몰골을 하고 있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꿈속에서 자신이 줄리엣에게 얼마나 모질게 굴었는지 기억하는 레녹스로서는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 정말로 줄리엣의 몸에 손을 댄 것이 그 자신이라면 그것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도, 용서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는 그걸 반드시 확인해 봐야 했다.
레녹스는 검에 붙은 흑표범 악령을 몇 번이고 불러 보았으나 그 짐승은 응답하지 않았다.
물론 줄리엣에게 묻는 게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일 터였다.
그러나 줄리엣은 뭐든 잘도 대답하던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잠들었나?’
침묵이 길어지자 레녹스가 줄리 엣을 편히 눕혀주려고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레녹스.”
줄리엣이 그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때, 저를 왜 구해 주셨어요?"
“뭐?”
“제가 불쌍해서요?"
구해 주다니?
레녹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설마 처음 만났을 때를 이야기하는 걸까?
그거라면, 그는 줄리엣이 저 이외에는 의지할 데 없는 신세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었다. 부모님의 장례를 마치고도 의연하고 차분한 여자의 얼굴이 그를 자극했었다.
"제가, 첫눈에 반했거든요.”
돌이켜보면 첫눈에 반한 것은 그였다.
그러나 줄리엣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 레녹스는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보기 많이 흉했을 테니까요."
흉하다니.
줄리엣은 그 말과 함께 얇은 침대 시트를 얼른 어깨까지 끌어올려 버렸다.
마치 등을 보이기 싫다는 듯이.
줄리엣은 어쩐지 두려워하는 눈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이젠 아프지도 않은걸요. 흉터는 남는 댔지만……. 전하는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레녹스는 재빨리 눈치챘다.
지금의 줄리엣은 지난 삶의 기억과 현재를 혼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전의 삶에서 얻었던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전히 자신이 등에 흉터를 가진 것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했다.
잠결인지 취했기 때문인지 혼동한 것이다.
“줄리엣.”
레녹스는 다급히 줄리엣의 어깨를 붙잡고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필사적으로 줄리엣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어 낼 수 있을 만한 질문을 생각해 보았다.
방금 전처럼 직접적으로 누가 그랬느냐 물으면 또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어 버릴 게 틀림없었다.
“잘 생각해서 대답해 봐. 맞추면 상을 줄게.”
그를 어린애를 어르듯 부드럽게 달래며 물었다.
“상이요?”
“그래. 내가 널 처음 본 곳이 어디였지?”
반쯤 잠에 취한 줄리엣은 잠시 그가 왜 그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 유순히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기네스 후작의 체벌실이요.”
대답하는 줄리엣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레녹스 칼라일의 숨을 멎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