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백작님, 잔을 받아 주시지요.”
“네.”
안 그래도 목이 타던 참이라, 줄리엣은 듈턴 자작 부부가 권하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술을 딱히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투명한 꿀술은 처음 맛보는 줄리엣의 입에도 달고 부드러워서 무리 없이 금방 목으로 넘어갔다.
로이가 그런 줄리엣을 힐끔거렸지만 줄리엣의 신경은 온통 듈턴부부에게 쏠려 있었다.
줄리엣은 태연하게 물었다.
"기네스 후작이 가지고 있었다던 보관 말인데요, 어떻게 생겼던가요?”
"아아, 네. 몹시 아름다운 보석관이었답니다.”
“제 평생 그런 물건은 처음 보았습니다.”
자작 부부는 신이 나서 줄리엣에게 이것저것 떠들어댔다.
기네스 후작의 가신으로 찍혀 눈칫밥을 먹고 있던 도중에 칼라일 공작의 연인인 줄리엣이 먼저 관심을 표해 오니 신이 날 만도 했다.
“청보라색 보석이 아로새겨진 황금 관이었지요.
“이건 비밀입니다만, 그 관은 지금도 남부 후작가에 그대로 있을 겁니다.”
듈턴 자작이 대단한 비밀을 자랑하듯 쑥덕거렸다.
“그 비밀 방에 들어가는 방법은 오직 후작 혼자만이 알고 있는 데, 그 후작은 수도의 감옥에 갇혀 있잖습니까. 수색해도 찾을 수가 없지요.”
“네, 그렇겠네요.”
줄리엣은 애써 침착하게 맞장구치려고 했지만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은, 세상에 그 비밀 방에 드나드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줄리엣은 그 보관이 숨겨진 장소와 들어가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당장 남부로 기사들을 보내면 찾을 수 있겠네.’
그리고 어쩌면 달리아도 함께 만나게 될 것이다.
불안으로 떨리는 손을 숨기려고 애쓰며 줄리엣은 다정하게 캐물었다.
“저, 듈턴 부인. 그 보관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 * *
레녹스는 안에서 누가 뭐라고 떠들든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주군.”
연회장 바깥의 테라스에 기대어 있는 그에게 다가온 기사가 보고 했다.
"기네스 후작이 만나 뵙기를 청해 왔습니다.”
몸값을 치르고 후작가의 재산절반을 넘기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자는 하나마나 한 제안이었다.
기네스 후작은 그로도 모자라 줄리엣을 직접 만나서 모든 게 오해임을 설명하겠노라 여러 번 간청했다.
“오해라."
레녹스는 대놓고 비웃었다.
수상한 주술까지 동원해 가며 먼저 줄리엣을 위험에 빠뜨린 쪽은 기네스 후작이었다.
정작 줄리엣 본인은 기네스 후작을 가두고 후작가를 무너뜨린 것으로 만족한 듯, 기네스 후작이 어떻게 되건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레녹스는 후작을 살려 줄 생각도 줄리엣과 만나게 해줄 생각도 조금도 없었다.
어떻게 죽여야 가장 고통스러운 복수가 될지 고민할 뿐이지.
“그리고…….”
하딘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줄리엣 양이 할베리 경을 불러들이셨습니다.”
레녹스는 잠시 멈칫했다. 할베리 경은 공작가의 주치의였다.
'줄리엣이 할베리를 왜?'
하딘의 보고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한 엘리엇 비서에게 공작가의 가계도 사본을 요청하신 듯합니다.”
“그럼 가져다주면 되겠군."
멈칫한 것도 잠시 레녹스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계도에 가문의 주치의까지.
레녹스는 줄리엣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달라는 건 뭐든 내줘.”
“예?”
레녹스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힐끗 바깥을 응시하다 다시 연회장 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테라스를 벗어나기 무섭게 그를 반긴 것은 달갑지 않은 환영 인사였다.
“아니, 공작 전하!"
“베풀어 주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거나하게 취한 귀족들이 그를 향해 달려와 요란하게 굽신거렸다. 평소라면 겁에 질려 눈도 못마주쳤을 자들이었다.
레녹스는 무슨 영문인가 싶어 미간을 찡그렸다. 몰려온 귀족들에게서는 하나같이 희미한 술 냄새가 풍겼다.
“귀족원 회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모두 공작님을 지지할 거랍니다!”
“암요, 저희는 칼라일 공작가에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습니다!"
하급 귀족들이 영문 모를 충성맹세를 주워섬기자 레녹스는 어이가 없어졌다.
“저게 무슨 개소리들이지?”
레녹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굳이 범인을 색출하거나 추궁할 필요도 없었다. 서늘한 시선이 닿기 무섭게 그의 비서가 움찔하더니 죄를 토설했던 것이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엘리엇.”
“그게 말이죠, 줄리엣 양이……
귀족원 회의 때문에……."
레녹스는 더 듣지도 않고 단번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줄리엣이 플로어 한가운데에서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생글거리고 있었다. 잔뜩 그녀를 둘러싼사람들을 보고 레녹스는 무심코미간을 찡그렸다.
“어휴, 참하기도 하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하나 같이 달갑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녀를 둘러싼 노귀족의 대부분은 죽은 모나드 백작 부부의 지인을 자처했다.
“우리가 그동안 모나드 백작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구려.”
"듣자 하니 백작위를 상속받았다지요? 게다가 미혼이시고?”
"네에.”
생글생글 대답하는 줄리엣은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니, 이렇게 참한 아가씨가 아직 미혼이시라고요?”
“모나드 백작님, 제가 꼭 좋은 신랑감을 아는데 한번 만나 보시겠어요?”
“네, 좋아요.”
"어머, 정말요?”
'..…뭐가 어째?'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대화를 엿듣던 레녹스는 기막혀했다. 고리타분한 피로연은 가문들이 결혼 상대를 물색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잘됐군! 슈나벨 자작은 훌륭한 젊은이라오.”
“암, 그렇고말고. 지금은 비록 가진 게 없어도 수도에 번듯한 기반만 닦으면 당장 중앙으로 진출할….”
예의바른 줄리엣은 생글거리며 그런 헛소리도 일일이 경청했다.
줄리엣이 웃으며 받아 주니 앞 다투어 자기들의 부족한 손자들이며 신랑감 후보들을 들이밀었다. 멘트들은 하나같이 누구네 아들이 능력은 없어도 착실하더라는 식의 이야기 였다.
'그것 외엔 장점이 없는 모양이지.’
“자, 제 잔도 받으시지요."
더 환장하겠는 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사람들이 권하는 잔을 납죽납죽 잘도 받아 마시는 줄리 엣이었다.
그 광경을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던 레녹스는 멈칫했다.
"........"
뭔가 이상했다. 줄리엣이 아까부터 줄곧 생글거리고만 있었다.
“말 나온 김에, 내 소개시켜 드리리다!”
“아, 안녕하십니까, 레이다. 저는 아서 슈나벨이라고 합……."
“네, 안녕하세요.”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휘청이면서도, 줄리엣은 지나치게 생글거렸다.
“어떻소, 백작 아가씨? 인물도 훤칠하니 근사한 신랑감 아니 오?”
"아뇨, 훤칠하진 않네요."
게다가 지나치게 솔직했다.
줄리엣이 방긋거리는 걸 보던 레녹스는 퍼뜩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아, 젠장.’
완벽하게 술 취한 사람의 행동이었다.
그는 앞뒤 재 보지도 않고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레녹스는 성큼성큼 플로어를 가로질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어, 뭐야.…?”
툭 하고 부딪치자 줄리엣을 둘러싸고 있던 한 명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 헉.”
“고, 공작 전하?”
게슴츠레한 눈으로 술 취한 흉내를 내고 있던 자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우르르 비켜났다.
바다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흩어진 사람들을 노려보며 레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줄리엣.”
“전하?”
“이리 나와.”
다행히 줄리엣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순순히 그가 내민 손을 잡고 그를 따라 나왔다.
연회장을 빠져나오는 짧은 사이에도 누가 그녀를 볼세라 조바심이 났다.
레녹스는 줄리엣에게 겉옷을 둘러 준 다음 밖에서 대기 중이던 공작가의 마차에 태웠다.
레녹스는 줄리엣을 마차 안쪽에 앉힌 다음 외투를 여며 주다가 금방 이 사태의 원인을 파악했다.
줄리엣의 어깨를 끌어안는 순간 달착지근한 특유의 향이 훅 풍겼다.
흔히 꿀술이라고 불리는, 결혼식에 나오는 밀주의 향이었다.
첫 모금은 달고 가볍지만 달착지근한 꿀술은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마시다가는 큰 낭패를 보는 술이었다.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가기 때문에 꿀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중간에 멈추지 못하고 심하게 취해 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줄리 엣은 이 술이 낯설었을 게 틀림없다.
“출발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줄리 엣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우리, 집에 가요?"
천진한 질문에 레녹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취한 줄리엣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영 낯설고 신기했다. 어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장 부근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유달리 눈을 빛내는 줄리엣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맞았다.
그는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얘기를 했어?"
“별 얘기 안 했는데…….”
조금 더운 듯 줄리엣이 한숨을 내쉬었다. 볼이 발그레했다.
뺨이 붉은 것을 제외하면 줄리 엣은 얼핏 멀쩡해 보였다. 그녀는 또박또박 손가락을 꼽아 가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재잘댔다.
"듈턴 부인 남편이 장물을 팔아서 큰돈을 벌었대요. 아, 그 사람이 기네스 후작에게도 보석을 팔았댔어요."
레녹스는 이야기 내용보다 줄리 엣의 반응이 흥미로워서 잠시 가만있었다.
“그리고 슈나벨 후작 부인의 아들이 아직 미혼인데 착실하대요.”
뺨을 붉힌 줄리엣이 그의 앞에서 이렇게 격의 없이 재잘거리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레녹스는 문득 그런 줄리엣의 모습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아주 먼 과거에, 레녹스 칼라일이라는 남자에게 잘못 걸려서 상처 입고 감정을 영영 닫아 버리기 전의 줄리엣은 꼭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았다.
줄리엣은 착한 어린애처럼 곧이 곧대로 그가 물은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했다.
물론 내용은 한참 모자란 것들이 감히 그녀에게 추근댔다는 레퍼토리였다. 레녹스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잘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또…….”
"술은 왜 받아 마셔?"
레녹스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엘리엇이 실토한 바에 따르면, 귀족원 회의가 열릴 경우에 대비해 줄리엣이 귀족들을 포섭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녹스는 줄리엣의 행동에 감동하기는커녕 부아가 치밀었다.
줄리엣에게 가당치도 않은 제 아들이며 손자들을 들이밀던 양심 없는 귀족 놈들을 그는 똑똑히 봐 두었다.
"할 일들이 그렇게 없나 보지?”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레녹스.”
뾰족한 빈정거림에도 점잖게 그를 타이른 줄리엣은 갑자기 주섬주섬 부채를 꺼냈다.
“그게 뭐야?”
그녀는 레녹스의 질문에도 아랑곳 않고 부채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부채 끝에는 자그마한 카드가 달려 있었다.
“..…뭘 보는 거야?"
레녹스는 부채를 슬쩍 빼앗아 카드를 뒤집어 보았다.
휴대용 깃펜으로 써 넣은 이름들이 가득했다.
무도회에서 춤을 신청한 상대들의 이름을 적어 넣는 카드였다.
카드에 적힌 순서대로 춤을 추는 고풍스러운 유행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부채에 빼곡히 적힌 한미한 귀족 나부랭이의 이름들을 보았을 때만 해도 레녹스는 이것으로 오늘 저녁 있을 최악의 일은 다 겪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주세요. 아직 덜 썼어요.”
줄리엣은 카드에 기어코 이름을 하나 더 써 넣었다.
레녹스는 조금 전까지 흥미로워하던 것도 잊고 불쑥 화가 치밀었다.
진짜 취한 건 맞나? 지금 누구속 뒤집히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물론 레녹스는 줄리엣에게 그런 의도가 손톱만큼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되묻는 그의 목소리는 는평소처럼 느긋했다. 그러나 레녹스는 자신의 유치함에 낯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거기 적힌 대로 점잖고 착실하신 맞선 상대들과 춤이라도 출건가? 그 다음은 결혼이고?"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