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30화 (127/229)

130화.

***

펑!

“어머!"

어쩐지 마법사들이 경쟁적으로 재주를 선보이자 관객석에서 박수갈채가 흘러나왔다.

“모나드 백작님이 이런 친분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맞아요. 덕분에 이렇게 즐거운 피로연이 얼마만인지…….”

“과찬이세요.”

줄리엣은 단 두 시간 만에 어렵지 않게 피로연장에 모인 어린 귀부인들의 환심을 샀다.

결혼식의 피로연장은 생각보다 격식을 차리는 자리라, 심심해하는 귀족들에게 약간의 오락거리만 제공해도 그들의 호감을 얻기 쉬웠다.

"어차피 한 표는 다 똑같잖아요. 그럼 하급 귀족들을 끌어들이면 그만이죠.”

“그런 거군요?”

공작의 비서, 엘리엇은 줄리엣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귀족원으로 안건을 끌어갈 궁리를 하는 대귀족들은 아무래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기네 스 후작의 재산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강력한 사병을 보유한 몇몇 대귀족들의 다툼에 불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극소수 몇몇을 제외하곤 다른 귀족들은 적당히 대세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했으니까.

게다가 제도 사교계에서 나고 자란 줄리엣은 누가 포섭될 만한 지, 어디에 표를 던질 만한 성향인지를 세세히 꿰뚫고 있었다.

엘리엇은 막막해서 줄리엣에게 한탄한 것이지만 그는 부탁할 사람을 제대로 고른 것이다.

거기에 은근슬쩍 칼라일 공작에게 줄을 대 줄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 금상첨화였다.

누가 봐도 세를 무섭게 불리고 있는 칼라일 공작가에 잘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일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반면, 줄리엣과 같은 공간에 있던 로이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줄리엣.”

"아……?”

발소리도 없이 다가온 로이 때문에 잠시 흠칫했던 줄리엣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었다.

“안녕, 로이.”

“아직도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요?”

"네, 카티아 숲은 다음에 방문할게요.”

줄리엣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로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말했잖습니까. 그 인간 남자는 당신에게 해를 끼칠 거라고요."

로이는 꾹꾹 눌러 참았지만 말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왜 자꾸 그 남자를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는 겁니까?”

로이는 얼마 전 신전 후원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줄리엣의 반응으로 보아 처음 듣는 사실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겠지. 칼라일가는 꺼림칙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려 주면 줄리엣이 속았다는 걸 깨닫고 틀림없이 그 인간 남자를 버릴 줄 알았는데.

“잠시만요, 로이.”

줄리엣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르르 사라졌다.

“그러니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내게 알려 주면 내가 레녹스를 떠날 줄 알았다는 거예요?”

"......."

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세상에.”

줄리엣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짧은 감탄사를 내놓았다.

"날 대체 뭐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곤 실망과 배신감이 반씩 뒤섞인 듯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나는 아이를 갖고 싶어서 누굴만나는 사람인가요?"

아차.

로이는 처음 보는 줄리엣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줄리엣이 왜 화를 내는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로이는 몹시 불안해졌다.

“로미오 바스칼.”

“…… 예, 줄리엣.”

로이는 조금 움찔했다.

줄리엣이 그를 그렇게 부른 것은 처음이었을 뿐더러, 그를 지그시 보는 줄리엣의 시선이 전에 없이 싸늘했던 것이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요.”

줄리엣은 로이를 냉랭하게 쏘아보았다.

“다시 한 번만 더 나를 멋대로 다루려고 들면 그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알아들어요?"

로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줄리엣은 화가 났다.

로이에게 악의가 없는 것은 알았다. 그는 줄리엣이 먼 과거에 낳지도 못한 아이를 가졌다가 잃었던 것을 꿈에도 모를 테니까.

"사악한 뱀처럼, 모체를 죽이고 태어나는 그 저주받은 핏줄 말입니다.”

“뱀으로 비유하자면 살모사 같은 겁니다.”

그 사실을 알고 줄리엣이 놀라고 서글펐던 것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로 로이가 자신을 멋대로 휘두르려 했다는 의도를 확인하자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줄리엣, 미안해요."

로이가 다급히 줄리엣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사과할게요. 아무리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로이가 애절하게 그녀의 장갑 낀 손을 잡아 뺨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줄리엣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을 뿐이다. 한번 괘씸해져서 그런지 쉽게 화가 풀리지, 않았다.

“알겠으니까 놔요.”

“.……그럼, 용서해 주는 건가요?”

줄리엣은 냉랭하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두 번은 없어요.”

“줄리엣….”

안절부절못하는 강아지처럼 로이가 줄리엣의 뒤를 쫓아 나왔지만 줄리엣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 복도를 걸었다.

“모나드 백작님! 여기 계셨군요."

조금 전까지 마법사들의 재주를 즐겁게 관람하던 귀부인 몇몇이 반갑게 알은체했다.

그러나 줄리엣의 어깨 너머로 뒤따라오는 로이를 확인하곤, 그녀들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저어, 줄리엣 양. 신사분은 누구신가요?”

"아, 이분은 그냥…….”

둘러대려던 줄리엣은 멈칫했다.

대은

“이쪽은 제 친구인 로이예요.

여러분께 소개시켜 드리려고요."

줄리엣이 무표정으로 로이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로이는 조금 의아했지만 줄리엣이 시켰으므로 일단 웃었다.

“어머, 이제 보니 그 유명한 공자님이시군요?”

“그러네요! 숲의 일족분이시죠?

지난번에 뵈었어요!”

귀부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세요?"

줄리엣이 조금 떨어진 곳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낯선 귀부인을 가리켰다.

"아…… 듈턴 자작 부인이랍니다.”

다른 귀부인들이 소곤소곤 가르쳐주었다.

“듈턴 자작은 아시지요? 그 장물아비요.”

듈턴 자작은 장물, 즉 도둑들이 훔쳐 온 물건들을 암시장에 내다 파는 사업을 하다가 작위를 사들인 사람이었다. 당연하게도 귀족사회에서는 듈턴 자작가를 백안시했다.

“게다가 이틀 전까지는 남부에 있었다더군요.”

“남부에요?”

"네. 듣자 하니 기네스 후작저에서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던데….”

"기네스 후작의 허영은 유명하잖아요? 그래서 경매품 같은 걸 낙찰 받아 주는 일을 했대요."

"후작의 역모가 들통나니 엮여서 잡혀 들어갈까 봐 부랴부랴 도망쳐 온 거죠.”

기네스 후작의 관리인?

줄리엣은 조금 놀란 얼굴로 듈턴 자작 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그녀의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듈턴 자작 부부는 누구와도 섞이지 못하고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네스 후작가와 엮이고 싶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최대한 그들로부터 멀어지려 애썼다.

하지만 줄리엣은 다르게 생각했다. 기네스 후작저의 일을 봐 줬다니?

'그렇다면 달리아에 대한 기억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

물론 달리아가 정말 기네스 후작의 배후라는 가정하에서 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돌로레스가 갑자기 기억에 문제가 생긴 사람처럼 달리아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황에서는 저 부부밖에 방법이 없었다.

줄리엣은 듈턴 부부에게 조심스레 접근했다.

"안녕하세요, 듈턴 부인.”

줄리엣은 최대한 상냥하게 자작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줄리엣 모나드예요."

"아…… 예, 백작님. 저는 듈턴자작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이고요.”

듈턴 자작이 허둥거리며 마주인사했다. 부인은 남편의 뒤에서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무…… 물론입니다!"

듈턴 자작 부인은 줄리엣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준 것에 꽤나 감격하는 눈치였다.

“백작님은 상냥한분이시네......."

몇 마디 나누다 말고 살짝 불안한 눈치로 듈턴 자작 부인이 지레 찔려서 먼저 털어놓았다.

“실은, 제 남편이 기네스 후작밑에서 잠시 일해 신세를 졌었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묻지도 않았는데 듈턴 부인이 변명했다.

기네스 후작이 칼라일 공작가에 시비를 걸었다가 역으로 역모의 꼬투리를 잡힌 상황이었으니. 오해를 살까 봐 걱정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네, 오해하지 않아요."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바로 그 기네스 후작과의 친분 때문에 접근한 것인걸.' 줄리엣이 넌지시 물었다.

“부인, 혹시 남부에 계실 때 기네스 후작가에서 이런 여자를 보신 적 없나요?”

줄리엣은 간단히 달리아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주홍빛 도는 금발에 청보라색 눈.

또한 줄리엣과 이번 생에서 얼핏 스쳐 지나갈 때마다 달리아는 흰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돌로레스 역시 기네스 후작의 곁에 있던 여자가 흰 사제복을 입고 다녔다고 했으므로, 줄리엣은 그녀가 분명 달리아라고 생각했다.

“하얀 사제복을 입고 다니는 젊은 여자예요.”

“글쎄요……. 사제복을 입고 다니는 여자는 본 기억이 없네요."

잠시 생각하다가 줄리엣은 질문을 바꿔 보았다.

“그렇다면 그 댁에 머물던 손님 중에 제 또래의 여자는 없었나요?”

“손님이요?”

"네, 후작이 극진히 대접하던 손님이요. 어쩌면…….”

줄리엣은 머뭇거렸다.

이전 생에 잠시 동안 후작의 후 처로 살았던 줄리엣은 의심 많은 성격의 기네스 후작이 저택에 비밀 거처를 만들어 놓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택의 비밀 공간, 뭐 그런 곳에 머무르는 손님이었을 수도 있어요.”

줄리엣은 최대한 의심스럽지 않게 들리도록 설명했지만 듈턴 부인의 반응은 영 미지근했다.

“죄송해요. 그런 손님은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줄리엣은 낙담하지 않았다. 인상착의만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다가, 이렇게 우연히 기네스 후작가에서 일하던 부부를 만나서 달리아의 존재를 확인받는다는 건 지나친 요행이니까.

듈턴 부인은 줄리엣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어떻게든 줄리엣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저, 비밀 공간 하니까 생각난 건데. 후작의 귀한 손님은 모르겠지만 기네스 후작이 목숨같이 여기는 귀한 보물들에 대해서는 조금 안답니다.”

“보물이요?”

"네, 심부름을 하느라 몇 번 후작의 비밀 공간에 드나든 적 있거든요. 문을 여는 법은 모르지 만요.”

“어머나, 신기하네요.”

줄리엣은 처음 듣는다는 투로 감탄했다. 사치스러운 기네스 후작의 취미가 값나가는 귀중품을 사들이는 것임은 알고 있었다.

줄리엣이 맞장구쳐 주자 신이 난 듯 듈턴 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요, 기네스 후작의 서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방이 있어요."

“그런 것도 만들어 뒀군요."

줄리엣은 감탄하는 척 했지만, 사실 그녀는 숨겨진 방에 들어가려면 서재의 어디를 건드려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네. 후작이 가장 아끼는 것만 모아 놓은 방인데 그중에서도 금으로 만들어진 보석 관이 가장 예뻤어요.”

그 말에는 줄리엣도 멈칫했다.

“…… 잠시만요. 머리에 쓰는 그 보관이요?”

"예!”

가슴이 두근거렸다.

줄리엣은 그제야 자신이 뭘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맙소사.’

얼마 전, 공작가의 기사인 밀란이 찾아와 말해 주었다. 수년 전에 프란 부부가 가지고 도망친 보물은 대대로 전해지는 휘황찬란한 보관이었노라고.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줄리엣은 직접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보석이 박힌 티아라라는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가스팔을 시켜 모나드 백작가의 가보인 열쇠를 훔쳐내라고 명령한 것도 기네스 후작의 짓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후작은 유서 깊은 가문들의 가보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난번 생에서 스노우드롭을 소유했던 건 기네스 후작이 아니었을까 의심했었잖아.'

만약 달리아가 기네스 후작과정말 한패라면, 그 티아라도 남부에 있을 터였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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