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29화 (126/229)

129화.

*계약자.)

별안간 나비들이 나풀거리며 그녀의 생각을 방해했다. 주의를 끈 나비들은 한껏 연약한 척했다.

(우리. 힘들어.)

(힘썼어. 많이. 피곤.)

(칭찬, 줘.)

모처럼 시킬 일이 생겨서 불러냈더니 나비들은 기회라는 듯 잔뜩 생색을 내며 칭얼거렸다.

“삐약!”

그러나 테이블 아래에서 삐쭉고개를 내민, 호박색 눈의 마수가 호시탐탐 나비들을 노리고 있었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오닉스가 슬쩍 앞발을 휘두르자 나비들이 질색을 하며 피했다.

(하등, 생물.)

(멍청. 성가심.)

경멸스러운 투로 내뱉었지만 새끼 용이 알아듣기에는 지나치게 고급 어휘였다.

“?”

(........)

나비 마물은 불만스럽다는 듯 파닥거리며 줄리엣 쪽으로 몸을 피했지만 새끼 용은 쉽게 잡히지 않는 사냥감을 보고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줄리엣은 잠시 생각했다.

'나비들의 환술도 드래곤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네.'

오닉스가 저주를 담은 사념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어 치웠던 것처럼 말이다. 평소 하는 짓이 새끼 고양이 같긴 해도 아기 용은 은근 유능했다.

“이리 온, 닉스.”

줄리엣은 새끼 용에게 사과를 반으로 쪼개 나눠주었다.

“빡!”

오닉스는 금방 사과에 정신이 팔렸고 나비들은 새끼 용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똑똑.

누군가 응접실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칼라일 공작가의 주치의였다.

"안녕하십니까, 줄리엣 양.”

공작가의 주치의는 줄리엣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할베리 경.”

줄리엣 역시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예.”

주치의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자 줄리엣은 손수 찻잔에 차를 따라 내밀었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좋은 차군요."

테이블 아래에서 새끼 용이 사과를 아삭거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잠시 차만 음미했다.

“엘리엇 비서가 그러던데, 저를 찾으셨다고요?”

“네.”

“혹시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여쭤봐도 되나요 ?"

“저한테요? 허허.”

주치의는 잠시 사람 좋게 웃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든 물어보시죠.”

"감사해요, 할베리 경."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그리곤 웃는 얼굴 그대로 물었다.

“전하의 모친이 돌아가신 이유가 뭔가요?”

콜록콜록!

주치의가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사색이 된 주치의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아, 아가씨. 그걸 어디서 ……."

그 사색이 된 표정을 보고 줄리 엣은 확신했다. 역시 공작가의 주치의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대 모든 공작 부인들이 아이를 낳고 죽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주치의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침묵하다가 다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 제가 지금부터 바쁠 예정이라…"

“할베리 경.”

줄리엣이 웃지도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앉으세요.”

**

2황자의 결혼식을 맞아 황제는 이레 동안의 성대한 축제를 선포했다.

국고가 휘청일 만큼 화려한 축제였다. 외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마수들이 전시되었고 몸값 비싼마법사들이 연일 진귀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무리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네스 후작의 반역 사건이 채 마무리되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래서 더 황제 폐하께서 무리하시는 거죠.”

“황실의 권위가 흔들릴까 봐서요?”

뒤에서 귀족들이 뭐라고 비웃든, 축제가 제도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자 황제는 몹시 흐뭇해졌다.

게다가 번잡스러운 자리를 질색해서 평소에는 얼굴도 비치지 않는 칼라일 공작이 피로연에까지 참석하자 황제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만찬장에는 외국에서 온 손님들도 많았고, 황제는 칼라일 공작을 바로 곁에 두고 근사한 장식 품처럼 자랑했다.

“그래, 공작. 기네스 후작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황제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황제의 그 한마디에 피로연장이 일순 고요해졌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레녹스는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 그렇지요.”

"하하, 시간을 두고 현명하게 의논해 볼 일이지요.”

잠시의 시간차를 두고 저마다 꿍꿍이를 숨긴 가식적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기네스 후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남부의 비옥한 장원을 탐내는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애초 가문 간의 다툼으로 발생한 일이니 기네스후작의 처분권은 현재 레녹스 칼라일에게 있었다.

그러나 레녹스 칼라일은 후작가의 재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일언반구도 한 적 없었다.

만약 레녹스 칼라일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넘어간다.

면 다른 가문에도 가능성이 생긴다.

후작의 반역 사건 당시 사건이 거의 종료된 시점에 부랴부랴 사병을 이끌고 온 다른 귀족들, 혹은 후작에게 막대한 돈을 투자했던 사람들이 그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나저제나 호시탐탐레녹스 칼라일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레녹스는 그들이 무슨 헛물을 켜는 관심 없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연회장 한쪽의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줄리엣은 밝은 조명 아래 누군가와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와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칼라일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이었다.

엘리엇이 다소 비장하게 속닥거렸다.

"부탁하신 물건은 무사히 방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엘리엇은 안절부절못하며 칼라일 공작이 있는 쪽을 힐끔거렸다.

“부디 전하께는 들키지 말아 주십쇼.”

“고마워요, 엘리엇.”

줄리엣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가문의 가계도는 어디에 쓰시려고요?”

“그냥 좀 알아볼 게 있어서요.”

줄리엣은 가볍게 둘러댔다.

줄리엣이 엘리엇에게 부탁한 물건은 다름 아닌 칼라일가의 가계도 사본이었다.

칼라일 공작가는 긴 역사에 비해 후손이 많지 않았다.

때문에 다른 귀족 가문처럼 방계가 사방팔방 뻗어 있다거나 족보가 책 몇 권 분량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꽤 복잡한 역사를 자랑했는데, 사생아나 서자를 구분하지 않는 독특한 가풍 때문이었다.

요컨대, 생기면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자손이 귀한 가문이었다.

가문의 시조, 엘레노어 칼라일로부터 시작된 긴 역사.

줄리엣은 낮에 공작가의 주치의를 추궁했지만, 주치의는 자신도 잘 모른다며 가계도를 살펴보시는 게 나을 거라고 절절맸다.

“그런데 말입니다, 줄리엣 양.”

“네?”

“외람되지만, 전하와 다투셨습니까?”

줄리엣은 엘리엇을 물끄러미 보다가 반박자 뒤에 싱긋 웃었다.

“...…아뇨, 왜요?"

그러자 공작의 비서는 조심스레 본래 용건을 꺼냈다.

“기네스 후작의 처분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그거요.”

줄리엣은 대충 알아들었다.

레녹스가 아직 기네스 후작의 재산을 어떻게 하겠다고 의견을 내놓은 적 없다는 얘기 말이지.

“하지만 공은 우리 기사들이 다 세웠잖습니까! 그러니 후작가의 재산도 마땅히 전하가 가지셔야 죠! 안 그렇습니까?"

"음, 그렇죠.”

“생각해 보십쇼, 줄리엣 양. 남부의 비옥한 땅과 그 사치스러운 기네스 후작의 보석 컬렉션엘리엇은 열성적으로 줄리엣을 설득하다가 슬쩍 제안했다.

“혹시 갖고 싶은 보석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전하께 말씀드려서….”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갖고 싶은 게 있냐고? 그렇지는 않았다. 후작가의 재산은 대부분 남부의 토지인데 땅을 가져 봤자 뭘 하겠는가. 농사를 지을 것도 아니고,

'기네스 후작의 보석도 그다지…….'

줄리엣은 문득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였지?’

줄리엣이 잠시 생각을 되짚는 동안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실은 귀족원 회의로 후작가의 재산 처분권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엘리엇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워낙 눈에 불을 켜고 자기들도 공을 세우는 데에 한몫했노라 주장하는지라…….”

“그런가요?”

"예. 그런데 보시다시피 전하께서는 기네스 후작의 재산에는 별관심 없어 보이십니다.

엘리엇이 한탄했다.

줄리엣은 잠시 피로연장 안을 둘러보았다.

평소와 달리 줄리엣은 성가신 시선에서 자유로웠다.

하나같이 이국적이고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은 외국의 사신들이 줄지어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공연히 그녀에게 시비를 건다든지 하는 귀족들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간간이 줄리엣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힐끔거리는 외국인들뿐이었다.

“만약 칼라일 공작이 기네스 후작가를 집어삼키면 어떡하죠?"

그리고 레녹스 칼라일을 경계하는 제국의 귀족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행동을 같이하는 게 중요합니다. 칼라일 공작이라도 귀족원이 강하게 나가면 재산을 독식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폐하께서도 공작을 좀 더 경계 하셔야 할 텐데요.”

대놓고 공작을 적대시하지는 못했지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는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

“여론이 저런 식이니, 만약 안건이 귀족원으로 넘어가면 골치 아파집니다.”

엘리엇이 심각하게 소곤거렸다.

“물론 가짜 마력석 광산의 실체를 밝혀내신 것은 잘하셨습니다.”

엘리엇이 뿌듯한 얼굴로 칭찬했다.

“덕분에 다시 시장 점유율이 저희 쪽으로 넘어왔으니까요. 다만……."

“기네스 후작가의 재산도 차지하면 더 좋을 거다?"

줄리엣의 말에 얼굴이 환해진 엘리엇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말입니다.”

줄리엣은 잠시 고민했다.

“설마 귀족들의 표를 받아 달라는 부탁은 아니겠죠?”

“그런 건 꿈도 안 꿉니다. 그보다는 그냥 전하를 설득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얘기죠.”

“제가 설득이요?”

“아가씨 말은 귀담아 들으시잖습니까.”

'글쎄.’ 엘리엇이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줄리엣은 쓴웃음을 지으며 레녹스가 있던 자리를 힐끔거렸다.

레녹스는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지난 이틀 내내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그리 화기애애하지 못했다. 엘리엇이 싸웠느냐고 물었을 정도였으니.

피로연장까지 오는 동안 같은 마차를 타고 왔음에도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을 정도로 냉랭했다.

"엘리엇.”

줄리엣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음 싱긋 웃었다.

“예?”

“귀족들 표가 몇 표나 필요해요?”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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