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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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정령사가 맞더군요.”
메리골드 상단의 마법사, 에셀리드가 확인해 주었다.
“맞는다고요?”
줄리엣은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영 수상쩍은 돌로레스의 주장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은 역시 마법사들밖에 없었다.
줄리엣이 돌로레스를 데리고 온 곳은 모나드 백작 저였다.
비어 있는 백작저에 에셀리드와 그의 마법사 동료들이 머물도록 허락해 줬던 것이다. 마법사들의 호의를 사 둬서 나쁠 것 없었다.
“예, 미약하지만 특유의 마력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확실하군요!”
"와, 이거 책에서나 본 건데!"
돌로레스를 열성적으로 관찰하는 마법사들에게선 광기마저 느껴졌다.
새끼 용과 사념체를 직접 본 지얼마 지나지 않아 정령사를 관찰하게 된 에셀리드의 동료 마법사들은 한결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눈으로 줄리엣을 보기 시작했다.
“모나드 백작님께서는 마법사필요 없으십니까?”
하지만 마법사들의 몸값이 얼마나 비싼지 아는 줄리엣으로서는 싱긋 웃고 말았다.
“저는 마법사 여러분을 고용할만한 형편이 안 된답니다."
“이런.......”
“아쉽군요. 백작님 곁에 있다보면 재밌는 사고가 많이 터질 것 같았는데요.”
칭찬인가 미묘한 발언을 두고 고민하는 대신 줄리엣은 돌로레스를 힐끔 보고 말했다.
“그런데 저 애는 자기가 어떤 정령을 불러냈는지 모른대요."
“허?”
“그게 가능한가요?”
“확실히 그건 좀 수상하군요."
마법사들은 다시 우르르 돌로레스를 둘러쌌다.
“뭐가 문제지? 눈이 안 보입니까?”
"아, 아뇨.”
“그럼 혹시 정령이 투명한 종류인가요?”
에셀리드의 마법사 동료들은 예리한 눈으로 돌로레스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취조하기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인 돌로레스는 조금 겁먹은 기색이었다.
“도, 돌로레스는 정령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찔끔한 돌로레스는 줄리엣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돌로레스는 눈을 가리고 있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 눈을 가린 상태에서 정령을 불러내는 게 가능합니까?"
"돌로레스는 어려운 얘기는 잘 몰라요. 그치만 기네스 후작의 다른 부하 정령사들도 돌로레스가 정령을 불러냈다고 말해 줬어요.”
두 번째 듣는 이야기라 줄리엣은 별 감흥이 없었지만 함께 듣던 마법사들은 한결 표정이 심각해졌다.
"근데 무슨 정령을 불러냈는지는 못 봤다고? 그게 가능해?"
“그런데도 정령을 제어할 수 있나? 그럼 그 정령은 지금 어딨는데?”
"너 학회 중에 졸았냐? 정령을 제어하긴 뭘 제어해? 보지도 못했는데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냥 돌아다니고 있겠지."
“그럼 이 경우는 단순히 정령사가 정령을 불러내는 용으로 이용 당한 거 아니냐?"
마법사들은 저희들끼리 쑥덕쑥덕하더니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뭐. 정령사의 자질을 각성하는 계기는 저마다 다르니까요.”
“이상하긴 해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령이라고는 해도 워낙 각양각색이라. 그런 식으로 소환할 수 있는 정령도 있나 보죠.”
“하지만 그 후작이란 인간이 수상하긴 하군요.”
"근데 기네스 후작이 누구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수도가 발칵 뒤집혔는데 과연 자기들 관심사 외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마법사들다웠다.
다행히 에셀리드는 기네스 후작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에셀은 심각한 얼굴로 줄리엣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기네스 후작의 아내인가, 혹은 양녀라면서요. 저 여자를 믿어도 되는 겁니까?"
“돌로레스는 그냥 후작이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
줄리엣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돌로레스가 외쳤다.
“양녀인 건 맞지만 그건 후작이 돈을 준다고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후작도 돌로레스에게 친절히 대해 주지 않았어요."
돌로레스는 후다닥 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보물을 잔뜩 가지고 있으면서, 돌로레스에게는 예쁜 머리핀에 손대는 것도 못하게 했어요. 돌로레스보다는 그 여자를 훨씬 더 예뻐했...….”
“그 여자?"
"네!"
“그게 누군데?”
“돌로레스도 잘은 몰라요. 맨날흰 옷을 입고 다니는 젊은 여자인데, 후작이 무척 잘해 줬어요.
제일 좋은 방을 내주고, 존댓말쓰고…….”
흰 옷.
줄리엣은 문득 기억해 냈다. 신전의 사제복 역시 흰색이었다.
“그 여자 이름이 뭐였는데?"
“그건……. 어라?"
돌로레스는 당황한 눈치였다.
“이상하다? 분명 알았는데? 그, 금방 생각날 거예요!”
돌로레스는 한참 끙끙거렸지만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런 돌로레스를 물끄러미 보던 줄리엣이 불쑥 말했다.
“달리아.”
“아?”
“그 여자 이름, 달리아 아니었어?”
“모, 모르겠어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죄송해요.”
사과하는 돌로레스를 보고 다른 마법사들이 기막히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니, 이름을 들었다면서 그게 맞는지 틀린지도 기억 못해요?"
"뭐야. 역시 정령을 불러내는 는실험을 하다 기억력 중추가 망가진 거 아닙니까?"
“헉! 기억력 중추를 망가뜨리면 정령사가 될 수 있는 건가?"
줄리엣은 톡톡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에셀리드를 불러냈다.
"에셀, 잠시만요.”
“예.”
에셀리드가 눈치껏 알아듣고 슬쩍 구석으로 빠져나왔다.
“어떻게 생각해요?"
“편의상 '정령'이라고 묶어서 부르긴 하지만, 정령사들이 다루는 것은 마냥 선량한 존재들은 아닙니다. 알고 계시지요?”
“네, 알고 있어요.
'정령'이라고 하면 흔히 작고 선 량한 요정들을 떠올릴 테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차원을 건너온 이세계의 존재들은 요정처럼 생긴 것이 드물고 선량한 것은 더 드물었다. 간단히 말해 이세계에서 소환된 마물인 것이다.
“어쩌면 소환사라고 부르는 게 보다 더 정확한 명칭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소환된 것들은"
“사악하다고요?”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그것도 알아요.”
"예. 차원 너머에서 어떤 존재를 불러내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에셀리드는 줄리엣에게 이전에도 몇 번 경고한 적 있었다. 그녀의 마물 나비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그런 건 정령이나 마물 수준이 아니라, 악마에 가까운 능력이라고 말이다.
“이세계의 존재들이 차원을 넘어와서 형체를 갖추고, 이곳에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정령사들은 드물게 독특한 파장의 마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마력이 풍부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이계의 존재를 불러낼 수 있을 만큼이면 충분하다.
“정령사'라고 불리는 계약자들은 그들의 통로이자 충전지인 겁니다.”
“이해했어요.”
줄리엣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나비 마물들 역시 그렇다.
여기서는 깜찍한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진짜 본체는 눈으로 보는 순간 미쳐 버릴 만큼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줄리엣은 에셀리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짐작이 갔다.
“그리고 그 능력도 각양각색이겠죠.”
"예, 그렇습니다.”
자연계의 정령들은 비를 부르거나 불을 일으킬 수도, 혹은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혹은 놀라운 치유 능력을 가진 것도 있었고, 단순히 거대한 괴수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위험한 것은 인간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종류죠.”
“그리고 사람의 정신에 관여할 수 있는 마물일수록 위험하다는 거죠?”
에셀리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시잖습니까.”
“쉽게 말해 악마라는 거네요?"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에셀리드는 아무래도 그녀의 나비 마물이 얼마나 수상한지 다시 경고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줄리 엣이 묻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럼요, 에셀. 만약 아주 강력한 정신계 마물이 있다고 쳐요.
그게 악마는 정령이든."
“예.”
“그럼 그게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예?”
에셀리드는 의아한 눈치였지만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그녀 혼자만이 기억할 터였던 회귀 전의 기억을 갑자기 레녹스가 알게 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지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기억을 곱씹어 본 줄리 엣은 깨달았다.
어쩌면 그녀의 어떤 기억들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거나 조작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사각사각.
다음 날, 줄리엣은 응접실에 앉아 유려한 필체로 동부에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다.
한참 뒤 펜을 내려놓은 다음, 줄리엣은 느릿하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때마침 나비 두어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그녀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후작가. 남부, 영지.)
(처벌. 재산. 몰수.)
그러더니 더듬더듬 단어를 말했다.
이 나비들은 줄리엣이 지난번 황궁에 갔을 때 몰래 심어 둔 나비들이었다.
황궁의 대회의장에서 오간 대화를 전해 주는 것이다.
물론 유창한 말투 대신 단어를 주워섬길 뿐이라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제대로 알아들었다.
“후작가의 재산을 몰수하겠다.
고?"
줄리엣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황제파 귀족들이 은밀히 의논하고 있는 것은 반역죄로 체포된 기네스 후작의 처분 문제였다.
"고생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엉뚱하게 그 영지를 탐내?"
물론 줄리엣은 남부 영지 따위관심도 없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저들의 오만함에 비웃음이 나왔다.
기네스 후작의 사병들의 검끝이 황궁을 겨누었을 때, 상황을 정리한 것은 칼라일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몇몇 대귀족 가문들이 상황이 모두 종료된 다음에야 은근슬쩍 사병들을 이끌고 수도에 얼쩡거 거렸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생겼을 때는 칼라일 공작가의 병력 뒤에 숨어 벌벌 떨던 주제에.
황제나 다른 귀족들이 이제 와서 은근슬쩍 공을 탐내는 것을 보니 못마땅했다.
줄리엣은 기네스 후작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기에 해묵은 원한을 청산한 것뿐이다.
‘덤으로 수상한 점만 잔뜩 포착했지.’
돌로레스는 기네스 후작의 배후에 어떤 '여자'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줄리엣이 생각하기에 그 여자는 달리아가 분명했다.
칼라일 공작가의 기사들에 의해 남부의 기네스 후작가는 지금쯤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줄리엣은 달리아가 아직 거기 남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적이 뭔데?'
어쨌거나 달리 아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뭔가를 꾸며 왔다는 것만은 알겠다.
기네스 후작처럼 그녀를 세뇌하는 게 목적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매번 위기 직전에 달리아와 스쳐 갔던 것도 같은데….…."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