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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27화 (124/229)

1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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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은 축복의 말을 평생 기억한다.

던가.

"버러지 같은 것.”

레녹스 칼라일 역시 아버지로부터 처음 들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다만 그가 가진 부모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채 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칼라일 가문 사람다운 삐딱한 인성을 장착한 어린애는 고작 폭언정도에 상처받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어차피 툭하면 가주 자리를 놓고 골육상잔이 벌어지는 집안이었다. 부자간의 정 따위가 있다.

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레녹스의 부친이자 전대 칼라일공작이었던 율리시스 칼라일은 숱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율리시스는 형제들을 죽이고 가주 자리를 차지했지만 이후 술과 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레녹스는 유약한 아버지를 한심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 한심한 아버지는 어차피 일찌감치 독살당해 레녹스의 파란만장한 유년기에 일조했다.

그리고 레녹스의 모친은 조금 유명했다. 조롱거리로서.

포로 신분으로 잡혀 온, 멸문된 가문의 여식.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교만하고 어리석었던 여자는 석 달 안에 공작 부인이 되어 보이겠다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야심만만했던 여자는 결국 율리 시스 칼라일을 속여 아이를 갖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게나 원하던 공작 부인 자리를 얻지는 못했다.

아들을 낳음과 동시에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칼라일 가문의 아이들은 모친의 배 속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마력을 타고났다.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종종 비극적인 희생을 동반했다.

탐욕스럽게 모체의 마력을 먹어 치우는 걸로도 모자라, 종국에는 정신에도 영향을 끼친다.

아이를 가진 여자는 마력을 빼앗겨 서서히 말라가다가, 아이가 태어날 즈음에는 완전히 광증으로 미쳐 죽는 것이다.

"너 따위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부친으로부터 공공연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레녹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친부가 자신을 미워하는 이유를 굳이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친부를 속인 비천한 여자를 향 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짐작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전하.”

그러나 차분한 얼굴로 묻는 여자를 마주한 순간에야, 그는 어쩌면 그것이 온전히 자신을 향한 증오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아이를 낳으면, 목숨이 위험해지나요?”

줄리엣 모나드와의 관계에서 그가 바라는 유일한 것은 불변성이었다.

그의 연인으로 머무는 동안 줄리엣은 그가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레녹스는 그 상태가 언제까지고 지속되기를 원했다.

"결혼은 안 해”

그래서 모호한 말로 선을 그었다. 언제나처럼.

어차피 아이가 생길 가능성은 은한없이 0에 수렴했다. 만에 하나 줄리엣이 그 이상을 바라는 눈치여도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것쯤 눈감으면 어떻단 말인가. 까짓 거 눈감아 버리면, 뒤돌아 외면해 버리면 된다. 줄리 엣이 희망을 꺾지 않으면 제 쪽에서 먼저 잘라 내면 그만이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사이 미숙한 감정은 제멋대로 자라났다.

줄리엣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때, 레녹스 칼라일은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결코 줄리엣을 놓아줄 수 없었다.

"이상한 얘기죠?”

그에게 생소한 감정을 잔뜩 가르친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아이를 낳으면 죽는 저주라뇨?

그런 터무니없는……….”

줄리엣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와 동시에 일부러 꾸며낸 듯 밝았던 그녀의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

“줄리엣.”

“… 왜 부정하지 않으세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줄리엣의 손끝을 붙잡고 있었다.

줄리엣은 그를 뿌리치지 않았지만, 고개를 떨군 채 붙들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아니라고 해 주셔야죠."

레녹스는 차마 세게 쥐지도 못한 손안의 온기를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그가 엿본 것은 조각난 과거뿐이었지만 레녹스는 직접 본 것처럼 그 상황을 이해했다.

줄리엣이 알게 된다면 그녀는 는목숨을 잃을 각오로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혹은 그를 버리고 도망칠 게 뻔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도 뻔했다.

몇 번이고 똑같은 상황에 놓여도 그를 증오하도록 만들지언정 줄리엣을 탐욕스럽게 붙잡고 놓아주지 못할 것이다.

뎅그렁, 뎅그렁.

신전의 종탑에서 신성한 결혼식을 축복하는 맑은 종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소리가 어쩐지 장송곡처럼 들렸다.

* * *

줄리엣은 텅 빈 접견실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늦은 오후의 석양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는 잠시 낮에 신전에서 들었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살모사라는 뱀을 알아요?"

로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만해도 줄리엣은 믿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칼라일 가문에 대해서 줄리 엣은 알만큼 알았다. 붉은 눈을 가진 아이들만 태어난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지만, 모친을 죽이고 태어나는 핏줄이라니.

'그런 유전이 어딨어?'

하지만 대답은 레녹스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했다.

줄리엣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결국 그녀는 품에 안아 보지도 못할 아이였던 것이다.

덜컹.

그때, 접견실의 문이 열리더니 친절한 옥지기가 들어와 줄리엣에게 굽실거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귀부인.

곧 죄인이 내려올 겁니다.”

줄리엣은 가볍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네, 고마워요.”

무슨 말을 들었건, 줄리엣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불행히도 줄리엣은 기억력이 좋았다. 특히나 원한 관계는 결코 잊지 않았다.

기네스 후작.

그에게는 갚을 빚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기네스 후작보다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상대를 찾아왔다.

끼익. 철컹.

옥지기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하나가 접견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돌로레스.”

줄리엣은 여자를 향해 빙긋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그녀가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기네스 후작의 끄나풀이었던 돌로레스였다.

돌로레스는 제도의 시계탑에 갇혀 있었다. 줄리엣이 신원을 보증하고 꺼내 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 훌쩍.”

며칠 사이 수척해진 돌로레스가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줄리엣은 개의치 않았다.

“이리 와서 앉아.”

줄리엣은 한눈에 돌로레스를 뚫어 보았다.

돌로레스는 욕망에 충실한 타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돌로레스는 갈등하는 얼굴로 쭈뼛거리더니, 단번에 다가와서 줄리엣의 맞은편에 앉았다.

“먹어.”

줄리엣은 가져온 음식 바구니를 돌로레스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힐끗힐끗 줄리엣의 눈치를 보던 돌로레스는 답삭 빵을 집어 들었다.

“흐어엉….”

배가 많이 고팠는지 한참을 정신없이 먹다가 돌로레스는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씨는 돌로레스에게 친절하시네요.”

줄리엣은 돌로레스가 착각하게 내버려 두었다.

며칠을 굶은 듯 부지런히 빵을 먹는 돌로레스를 보며 줄리엣이 물었다.

“거짓말은 왜 한 거야?”

"기네스 후작이 시켰어요!"

돌로레스의 태세 전환은 생각보다 빨랐다. 돌로레스는 줄리엣이 묻는 모든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돌로레스는 그냥 이용당한 것 뿐이에요!”

묻지도 않은 사정을 줄줄이 늘어놓기도 했다.

돌로레스는 작은 남부 마을 출신 소녀라고 했다. 애초에 귀족도 아니었다.

"기네스 후작이 돌로레스에게 재능이 있다며 입양했어요."

“하지만 처음 봤을 때는 아내라고 소개했잖아?"

분명 그랬다.

남부에서 마주쳤을 때 후작은 돌로레스를 자신의 여덟 번째 아내라고 소개했었다.

그러나 정작 황제의 앞에서는 돌로레스를 자신의 양녀라고 소개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돌로레스 보고 아가씨랑 친해져야 한다고 말했거든요.”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돌로레스는 정말로 후작이 최근에 입적한 수양딸이 맞았다.

그런데 왜 처음 봤을 때는 후처라고 소개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것도 금방 들통날 사실을.

"그 편이 아가씨의 동정심을 사기 쉬울 거랬어요!"

줄리엣은 멈칫했다.

분명 후작의 전략은 유효했다.

전생에서 줄리엣은 기네스 후작의 여덟 번째 아내로 산 적이 있었다. 겉으로는 점잖은 대귀족인척 행세하지만 기네스 후작은 뒤에서 그녀를 학대했다.

짧지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기네스 후작이 자신의 새 아내라고 돌로레스를 소개했을 때, 줄리엣은 적지 않게 동요했다.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탓이다.

'아닌 걸 금방 알았지만.'

돌로레스에게는 그 흔한 멍 자국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동정심을 사기 쉽다'라고?

줄리엣은 그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잠깐이나마 속아서 돌로레스를 동정할 뻔했던 것은 줄리엣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기네스 후작이 알지 못하는 일일 텐데. 왜 돌로레스를 동정하리라 생각했을까?

"돌로레스도 잘은 몰라요……."

허겁지겁 음식을 먹던 돌로레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돌로레스는 아가씨가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

퍽이나 그렇겠다.

줄리엣은 심드렁했다. 손바닥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걸 봤는데 믿음이 갈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욕망에 솔직한 쪽이 다루기는 쉬울 것이다. 게다가 돌로레스의 연기력은 어설펐다. 거짓말을 하면 금방 표가 났다.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그럼 내 열쇠를 훔치려고 했던건?”

“그건 죄송해요……….”

돌로레스가 얼른 사과했다.

“후작이 그 열쇠가 정말 중요한 보물이라고 했거든요.”

줄리엣이 처음부터 가짜 은 열쇠를 넘겨줬다는 걸 알게 된 듯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턱을 괴고 물었다.

“그 열쇠를 훔쳐서 뭐하려고 그랬는데?”

줄리엣은 자신이 후작과 돌로레스에게 걸어 둔 환술 덕분에 돌로레스가 정령술을 보여 주겠다.

고 나섰다가 망신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정말 정령사야?"

줄리엣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었다.

“하지만 너는 네 정령을 직접 본 적이 없다며?"

"… 본 적은 없지만 정말이에요. 돌로레스는 정령사가 맞아요.”

머뭇거리던 돌로레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돌로레스는 눈을 가리고 있어서 아무것도 못 봤지만 후작이 말했는걸요. 돌로레스가 '가장 적합한 정령사'라고요.”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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