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26화 (123/229)

126화.

***

결혼식을 위해 준비된 흰 비둘기들이 신전 이곳저곳에서 날아올랐다.

신전은 예식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다.

사실 며칠 전에 열렸어야 했던 결혼식이었지만, 시작되기도 전에 기네스 후작의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2황자와 파티마의 결혼식은 당연히 미뤄졌다.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하객들을 불러 모았지만 신전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하객들은 얼마 전 있었던 후작의 역모 사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기네스 후작의 처분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지요?"

“볼 게 더 있습니까? 반역죄지요.”

"후작의 작위와 영지가 몰수되면….”

“칼라일 공작의 세가 더 커지겠군요.”

줄리엣은 시시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실리카 법이 제대로 지켜진 덕분인지, 줄리엣을 보고도 사람들은 눈인사만 건넸다.

그녀가 공작의 살인범으로 몰린 일이나 칼라일 공작이 잠시 죽음을 가장했던 일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본관과는 조금 떨어진 외진 후원으로 걸음을 옮기던 줄리엣은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의아함에 고개를 든 줄리엣은 낯익은 남자를 발견했다. 줄리엣이 기다리던 상대는 아니었다.

"안녕, 로이.”

“오랜만이네요.”

줄리엣은 빙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꽤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오늘 로이는 다른 하객들처럼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 역시 결혼식 손님으로 온 모양이었다.

진회색 머리칼과 금빛 눈, 라이 칸슬로프 특유의 분위기가 아니라도 꼭 동화 속 왕자님처럼 예쁘고 단정한 생김새였다.

잘 어울렸지만 줄리엣은 어쩐지 그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 때문일까?

“줄리엣.”

로이는 인사말조차 생략하고 용건부터 꺼냈다.

“전에 내가 카티아로 초대하겠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네. 하지만 나중이라고 했잖아요.”

“지금 가지 않을래요?”

줄리엣은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갑자기요?"

“그곳에서는 안전하니까요."

“여기서도 안전해요.”

줄리엣은 농담처럼 대꾸했지만 로이는 웃지 않았다.

“반역 사건에 휘말리는 건 안전한 일이 아니죠.”

줄리엣이 미간을 좁혔다.

“...…나를 감시했어요?”

“그런 건 굳이 감시하지 않아도 알아요.”

로이가 당황하지도 않고 말했다.

“줄리엣의 나비들은 위험해요.

그 남자만큼이나요."

“나도 알아요.”

“아뇨, 줄리엣은 몰라서 하는 얘기예요. 스노우드롭이나 다른 아티팩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죠.”

줄리엣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분명 지금 스노우드롭과 '아티팩트들'이라고 말했다.

“… 로이는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어요? 엘자가 말해 줬어요?”

“왜 그런 연약한 꽃의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줄리엣이 물었지만 로이가 싱긋 웃었다.

“사람의 감정을 먹어 치우는, 차원 너머의 무시무시한 괴물인데. 안 어울리는 이름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건 줄리엣도 궁금하던 이야기였다. 스노우드롭이라니. 터무니없이 낭만적인 이름이 아닌가.

“그건 악마를 소환하는 아티팩트들이 은의 숲에서 처음 만들어져서 그래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티팩트들의 기원이 라이칸슬로프의 트의 숲과 관련이 있다고?

“줄리엣의 나비들은 숲 바깥, 그러니까 차원 너머에서 왔어요.

먼 옛날, 어리석은 인간의 왕들이 그것들을 불러들였고요.”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차원 너머에서 온 존재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비밀스러운 이름이 필요했다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어울리지 않게 은의 숲에서 자라는 가장 연약한 꽃들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죠.”

'꽃들…?' 줄리엣은 멈칫했다.

왜 복수형이지?

“이름이 알려진 것은 줄리엣의 아티팩트뿐이지만요."

거기까지 말한 로이는 싱긋 웃었다.

“어때요, 흥미가 생기나요?"

확실히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고맙지만 됐어요.”

하지만 줄리엣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 남자와의 계약 때문에요?"

줄리엣은 놀라서 고개를 반짝들었다.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로이의 얼굴에서 다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 남자는 줄리엣을 위험에 빠뜨릴 거예요. 줄리엣은 그 인간 옆에서 행복할 수 없어요."

줄리엣은 조금 웃었다.

다소 무례한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단호한 태도라서 화는 별로 나지 않았다.

"어떻게 장담해요?”

그러자 어쩐지 비웃는 것처럼 로이가 되물었다.

“그 남자가 줄리엣에게 가문의 광증에 대해서도 얘기하던가요?”

…광증?

“사악한 뱀처럼, 모체를 죽이고 태어나는 그 저주받은 핏줄 말입니다.”

“.……죽이고 태어나다뇨?”

“이런.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로이가 차갑게 웃었다.

“살모사라는 뱀을 알아요?"

줄리엣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갑작스러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줄리엣.”

로이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와 같이 가요. 나는 줄리엣을 보살펴 줄 수 있어요.”

* * *

말에서 내린 레녹스는 먼발치에서도 어렵지 않게 자신이 찾던 여자를 발견했다.

줄리엣은 신전의 본관과는 조금 외따로 떨어진 후원에 서 있었다.

긴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리고 한 손에 연보랏빛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어 당장 식장에 입장해도 손색없을 것 같은 차림새였다.

줄리엣은 아직 레녹스를 발견하지 못한 듯, 몸을 비스듬히 돌린채 누군가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그가 선 위치에서는 줄리엣의 대화 상대가 관목에 가려져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레녹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레녹스는 아직도 그날 자신이 본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악몽이는 환각이든 중요치 않았다. 눈을 감으면 흰 드레스를 피로 물들인 채 싸늘히 죽어 가는 줄리엣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이후로 검은 표범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제 그는 잠들지 않고도 악몽에 시달렸다.

불러내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음에도, 검은 표범은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확인해야 하는 게 있었다. 예를 들면, 험하게 매질 당한 듯한 줄리엣의 상처라거나.

처음 그는 순전히 자신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꾸며 낸 환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 고양이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지만 누가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단 한마디로 줄리엣이 이 친절히 확인해 주었다.

"전하, 그걸 어떻게 기억하세요?”

꾸며 낸 환상이나 함정 같은 게 아니라, 실재했던 일이라고.

쉽게 얼굴을 붉히고 제 나이에 걸맞게 밝은 웃음을 터뜨리던 여자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지금의 줄리엣은 결코 그에게 보여 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제가 예전에, 전하를 사랑했어요.”

어리석고 눈먼 남자는 그 고백이 왜 과거형인지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앞뒤 따지지 않고 무모한 계획을 실행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그러나 줄리엣이 말한 과거는 는그의 생각보다도 훨씬 까마득한 이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숨은 속뜻은 더는 줄리엣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이를 잃는 순간에, 혹은 목숨을 잃는 순간에 그녀의 순진하고 맹목적인 애정도 끝난 것이다.

그는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먼 과거의 일이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연약하고 가여운 것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여자가 제 아기는 얼마나 소중히 여겼을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더더욱 아이를 잃은 여자에게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

어떤 설명을 하더라도 줄리엣은 상처 입을 것이고, 진실을 알게 되면 떠나버릴 게 분명하니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레녹스는 걸음을 멈췄다.

줄리엣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안 가요, 로이.”

레녹스가 들은 것은 그 말뿐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만으로도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것인지 짐작이 갔다.

줄리엣은 단호하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레녹스와 눈이 마주치고도 줄리엣은 조금도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누구도 나를 지켜 줄 필요는 없어요.”

줄리엣은 레녹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말했다.

“...… 그렇습니까.”

줄리엣의 어깨 너머로 라이칸슬로프의 금빛 눈이 레녹스를 의미심장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줄리엣, 언제든 마음이 변하면."

로이는 보란 듯이 그의 눈앞에서 줄리엣의 뺨에 뺨을 맞대는 다정한 인사를 나눴다.

“……나를 찾아와도 좋아요. 알겠죠?”

줄리엣은 희미한 미소로 대답했다.

레녹스를 한 번 더 쏘아본 로이는 냉랭히 그의 바로 옆을 지나쳐 멀어져 갔다.

둘만 남은 후원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푸드득.

흰 비둘기 몇 마리만이 해를 쳤다.

줄리엣이 잠시 그의 옷차림을 살피는 것처럼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평소와 다른 청회색 정장 차림이 살짝 낯설었다. 성격대로 풀어헤친 셔츠 앞섶은 여전했지만.

“타이 주세요.”

줄리엣이 당연하다는 듯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고 레녹스는 순순히 주머니에 있던 보타이를 건네주었다.

그는 유독 답답한 걸 질색해 목에 순순히 뭘 매는 법이 없었다.

줄리엣은 그렇게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줄리엣이 모르는 것도 있었다.

"......"

줄리엣이 타이를 매 주는 동안, 그는 단정한 이마며 내리깐 눈매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지?"

"다 들으신 줄 알았는데요.”

줄리엣이 희미하게 웃었다.

레녹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간 줄리엣을 노골적으로 피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줄리엣은 침착했다.

그보다 훨씬 작은 여자는 그에게 어떤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줄리엣 모나드는 그에게 두려움을 가르친 유일한 여자였다.

6개월 뒤에는 어떤 억지로도 줄리엣을 붙잡아 둘 수 없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그는 조급해졌다.

“저도 여쭤볼 게 있어요.”

깔끔하게 매듭 모양을 바로잡은 다음, 줄리엣이 불시에 그를 올려다보며 천진하게 물었다.

“전하, 어머니를 죽이는 핏줄이 뭐예요?”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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