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그게 무슨 말이에요?"
“프란 부부에게 아이가 있었단 이야기는 금시초문입니다.”
아연해진 줄리엣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 달리아 프란이라는 이름, 들어 본 적 없어요?”
“예, 처음 듣습니다.”
밀란은 단호하게 답했다. 허탈할 정도로 쉬운 대답이었다.
“제가 알기로, 그 무렵 공작성에는 공작 전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나이가 맞는 게 저희 가문의 막내였던 접니다.”
밀란은 줄리엣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러니 제가 전하의 놀이 친구 겸 대련 상대가 되었던 거고요.
공작성의 누구에게 물으셔도 같은 대답이 나올 겁니다.”
줄리엣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밀란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지체 높은 가문의 아이들은 사교계에 나가기 전 놀이 상대를 들였다. 주로 같은 성별, 그것도 가신 집안의 아이들 중 서너 살위의 아이를 고르는 게 보통이었다.
따지자면 그렇다. 신분이 낮은하녀의 어린 딸과 어울리게 하기 보다는 충성스러운 가신 가문의 막내아들을 놀이 상대로 붙이는 게 훨씬 공작가의 격에 맞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줄리엣은 그것이 워낙 격식이나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칼라일가의 특성 때문이었겠거니, 하고 넘겼었다.
'그렇지만 달리아는 프란 부부의 딸이라고 했는데?'
혹은 밀란이 고작 아이 돌보는 하녀의 딸인 달리아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밀란은 기사 가문 사람이고 공작성에 살지는 않았으니까 하녀에게 아이가 있었는지 알 게 뭔가.
“헌데 아가씨, 그 소꿉친구라는 이야기는 누구로부터 들으셨습니까?”
“그건.….”
밀란이 물었지만 줄리엣은 대답할 수 없었다.
'누구였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물론 달리아 프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진 것은 전생의 일이었다.
이제와 누구로부터 들었다고 말한들 밀란은 이해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만 분명 누군가 줄리엣에게 처음으로 달리아가 프란 부부의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있었을 텐데.
그게 누구였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이 잘못된 걸까?
'하지만 달리 아는…….'
동쪽 탑의 여자.
처음 공작성에 왔을 때, 달리아는 그렇게 불렸다.
달리아가 머물던 동쪽 탑은 줄리엣에게 단 한 번도 허락된 적없는 공간이었다.
동쪽 탑은 공작가의 진귀한 보물들을 보관하는 공간이었고, 전 생의 칼라일 공작은 달리아를 그곳에 두고 철저히 보호했다.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지만 줄리엣은 달리아를 본적 있었다. 그것도 단둘이.
기억을 되짚어 보던 줄리엣은 생각보다 달리아에 대한 기억이 분명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하네.
시도 때도 없이 과거의 기억들을 강제로 곱씹게 하는 마물 나비들 때문에, 줄리엣은 수년 전 겪었던 전생의 기억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짧았었나?'
순서상 줄리엣이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다음에 달리아가 북부로 온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달리아가 공작성에서 지냈던 것은 줄리엣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불길한 두근거림이었다.
얼마 전 나비들이 그녀에게 굳이 들여다보게 한 과거의 기억속에서도 달리아의 존재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드러났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줄리엣 자신이 초조해하고 낙담하고 괴로웠던 감정만 생생하게 기억났다.
꼭 누군가 고의적으로 그녀의 기억에서 그 부분만 섞어 놓은 것처럼.
'달리아를 직접 만난 게 언제였더라?'
"내가 도와줄게요.”
회귀 전의 삶에서, 겁에 질려 도망치려던 줄리엣에게 도움의 의손길을 내민 것이 달리아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다시 생각하니 미심쩍었다. 그 무모한 도주극이 어떻게 막을 내렸는지를 떠올려 보면 …..
“저, 줄리엣 양?"
“아, 네.”
생각에 잠겨 있던 줄리엣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밀란 경과 대화하던 중이라는 게 떠올랐다.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을하느라.”
“괜찮습니다."
밀란 경은 안락의자 위에서 앞발을 모으고 곤히 잠든 새끼용을 신기한 듯 힐끔거렸다.
그러는 사이 줄리엣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설령 달리아가 프란 부부의 딸이 아니라고 한들 이제 와서 달라지는 건 없어.’
게다가 달리아의 문제가 아니라도 당장 처리할 일들이 있었다.
"우선 급한 것부터 해결하자.”
기네스 후작의 일을 마무리 짓는 것부터, 레녹스는 대체 무슨 수로 줄리엣 혼자만 기억하던 과거를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까지.
'그리고…….'
대체 누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이곳으로 돌려보냈을까?
“밀란 경.”
줄리엣은 조금 전 그가 준 작은 초상화를 만지작거리다가 그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이거, 돌려 드릴게요."
밀란이 무슨 의도로 이런 선물을 가져다줬는지는 알지만, 검은 머리칼의 소년을 볼 때마다 그녀는 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릴 게 틀림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뇨. 너무 귀한 선물이라서요.”
"정 그러시다면야.”
밀란 경은 선물이 거절당했는데도 별로 실망한 눈치가 아니었다.
대신 태연하게 권했다.
“하지만 아가씨가 주군께 직접 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줄리엣은 조금 웃었다.
밀란 경은 충성스러운 기사였고, 정직한 사람답게 의도를 숨기지도 않았다.
애초에 선물이랍시고 초상화를 를들고 찾아온 것도 칼라일 공작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작가 사람들이 레녹스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줄리엣도 알았다. 그날 이후 칼라일 공작은 꽤나 험악하게 굴었다.
‘하지만 피한 건 내가 아닌데..'
지난 며칠간 줄리엣은 레녹스를 보지 못했다. 노골적으로 피해 다니는 것은 그쪽이었다.
“전하는 어디 계세요?”
*
끼이익.
낡은 감옥의 문이 열리고 칼라일 공작이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밖에 서 있던 몇몇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경하드립니다! 공작….….”
"기네스 후작을 잡아 큰 공을 세우셨다지요?”
어디에나 있는 아첨꾼들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레녹스 칼라 일이 기네스 후작을 신문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려온 것이다.
그러나 공을 세운 남자의 눈빛이 흉흉했다. 그에게 앞다투어 말을 붙이려던 이들은 일제히 기가 눌려 주춤주춤 물러났다.
“……괜찮으십니까?"
재빨리 공작의 곁으로 다가간 공작의 비서는 철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문 틈새를 엿보았다.
상상과는 달리 얼핏 보이는 감옥 안에 기네스 후작의 시체가 널려 있다든가 하지는 않았다.
엘리엇은 일단 안도했다.
이곳은 기네스 후작이 감금되어 있는 감옥 시설이었다.
“괜찮지 않으면?"
삭막한 목소리로 대꾸한 공작은 어두운 복도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 칼라일 공작은 홀연히 사라져서는 흠뻑 젖은 몰골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가신들 중 누구도 그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엘리엇은 공작이 어느 날 약을 먹고 발견된대도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 전, 멀쩡한 얼굴로 집무실에 앉아 있는 칼라일 공작을 보고 엘리엇은 혼절할 뻔했다.
엘리엇은 걱정스러웠다.
약에도 술에도 취하지 않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서 더 무서웠다. 심지어 그는 줄리엣을 찾지도 않았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날이 서 있다는 걸 제외하면 제대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제대로 기네 스 후작을 신문하러 직접 행차하기까지 했다.
비서는 조용히 공작을 힐끔거렸다. 며칠 만에 홀연히 돌아왔는데도 공작은 무사한데다 다행히 팔다리도 잘 붙어 있었다.
하지만 멀쩡해 보이니 이젠 또 이것대로 불안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며칠 전 공작이 줄리엣 모나드를 붙들고 뭐라 애걸하던 장면을 본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둘 사이에 오간 기묘한 대화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이후 공작은 곧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처럼 굴었다. 어렵게 마주칠 때마다 싸늘하다 못해 흉흉한 눈빛이 죽으러 가는 사람 같았다. 그러더니 며칠 만에 돌아와서는 무섭도록 일에만 몰두했다. 다소 선택적인 몰두였지만.
“황제 폐하께서 또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잰걸음으로 따라붙으며 엘리엇이 들고 있던 서한을 펼쳐 보였다. 공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칼라일 공작가가 기네스 후작의 죄를 밝혀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두 가문의 다툼에서 시작된 일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기네스 후작의 처분권은 공작가에게로 넘어왔다.
그러나 공작의 의중이 어떤 지짐작할 수 없으니 후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궁금한 황제가 자꾸 그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공작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여러 번 황제의 부름을 묵살해 버렸다.
“이번엔 꼭 입궁하시라고-"
“꺼지라고 해.”
“전하….”
탄식하며 엘리엇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기네스 후작이 갇혀 있는 이곳은 황성 감옥이었다. 수도 경비대가 경비를 서고 있는 앞에서 대놓고 불경죄를 저지르다니.
추궁 당해도 할 말 없었다.
'물론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분이 아니시지.'
엘리엇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비단 황제뿐 아니라 공작가로 들어오는 호출들을 다 무시해 버리고 있었다.
공작의 심기가 평소보다 사나운 것만은 확실했다.
“아, 그리고 전하."
허겁지겁 뒤쫓아 가던 엘리엇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줄리엣 양이 찾으셨습니다.”
빠르게 앞서 걷던 공작의 걸음이 멈췄다.
"줄리엣이?”
“예.”
지난 며칠간 공작이 누군가의 이름에 반응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엘리엇은 칼라일 공작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