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24화 (121/229)

124화.

* * *

또각. 또각.

느린 걸음으로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연회장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손님들은 물론이고 연회장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선득한 시선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을 아랑곳 않고 그녀는 뻔뻔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죄송해요. 제가 늦었어요.]

사람들은 그녀의 화려한 차림새를 훑기 바빴다. 그렇게 보이기 싫어했던 오래된 등의 상처를 보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연회장을 눈으로 훑었지만 소문이 자자한, 동쪽 탑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탑에 삼엄한 경비를 세우고 출입하지 못하게 할 만큼 애지중지한다.

더니.

줄리엣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면을 쓴 것처럼 웃는 것이 어색했지만 줄리엣은 최대한 생글거렸다.

노골적인 멸시와 조롱은 웃어넘겼고, 은밀한 저의가 깔린 농담에는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권해 오는 술잔과 춤 신청을 거절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은 쉬웠다.

[아가씨께서 이렇게 재밌으신 분인 줄 몰랐습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훨씬 즐거웠을 텐데요.]

동시에 뒤에서 비웃음과 험담이 오가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공작은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죽일 듯 노려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줄리엣은 연회가 끝난 후 그에게 건넬 말을 고민했다.

어떻게 운을 떼야 할까.

그녀가 고민하던 무렵, 누군가 줄리엣에게 축사를 권했다.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생글거리고만 있는데, 옆에서 사람들이 부추겼다.

[공작 전하께서 잔을 내리시면 축원을 하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전하, 잔을.]

연회가 시작된 이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여전히 싸늘한 낯으로, 남자는 한마디 말도 없이 술이 든 은잔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생글거리며 잔을 받아 든 줄리엣은 잠시 흠칫했다.

그녀는 멍하니 은잔을 들여다보았다. 붉은 액체와 맞닿은 컵 안쪽이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잠시 당황했던 줄리엣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고, 싸늘한 시선으로 저를 노려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그렇구나.

이보다 더 명확한 의사 표현이 또 있을까.

그는 그녀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당황해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잔 안으로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뭐라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던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여기서 실수인 척 잔을 떨어뜨리거나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줄리엣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단둘뿐인 것 같았다.

실은 그녀는 연회가 파한 다음 그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고, 더 이상 아이를 잃은 일로 그를 원망하지도 않을 테니 이만 떠나게 해 달라고.

하지만 그녀의 연인은 이미 그 이상을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화를 낼 사람은 내가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별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문득 이런 마무리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줄리엣은 지쳐 버렸다. 모든 걸 그의 탓으로 돌리고 악을 쓰는 것도, 어떻게든 서로를 상처 입히려 날선 말을 주고받는 것도 더는 못할 짓이었다.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떠나서 어떻게 살 것인지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그녀를 나락에서 건져냈던 것은 저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음을 정한 줄리엣은 기꺼이 웃으며 잔을 들어 보였다.

[그간 감사했어요, 전하.]

예법에 맞는 축사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와 눈을 맞춘 채, 그녀는 천천히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붉고 달콤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너무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은잔을 놓치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눈앞이 흐릿해지는 순간, 놀란듯 자리를 박차고 다가온 남자가 저를 끌어당기는 것도 같았다.

* * *

“줄리엣 양.”

조용한 거실에 앉아있던 줄리엣은 반짝 고개를 들었다.

“밀란 경.”

“잠시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공작가 기사단의 부단장인 밀란이었다. 그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버려진 사원 유적에서 돌아온 이래, 공작가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기사들은 버려진 사원 유적에서 공작과 줄리엣 사이에 오간 대화를 엿들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물론이죠. 들어오세요."

“잠시, 전해 드릴 게 있어서 들렀습니다.”

밀란은 아무도 없는 응접실을 둘러보고는 품에서 자그마한 꾸러미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줄리엣은 미색 종이와 가느다란 노끈으로 포장한 네모나고 작은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지난 아가씨 생일에 구한 겁니다.”

생일?

줄리엣은 밀란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께서 뭘 주는 게 좋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이걸 추천했는데, 받아들 여지지 않았지요.”

밀란은 어색하게 씩 웃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뭔데요?"

“보시면 압니다.”

밀란은 줄리엣을 재촉했다.

어쩐지 말려드는 기분이었지만 줄리엣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엉성한 포장을 풀었다.

안에 든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캔버스였다. 처음부터 캔버스에 그린 것은 아니었고, 종이에 그린 것을 나중에 누군가 보관할 용도로 다시 표구한 듯했다.

어린 소년의 초상화였다.

줄리엣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일곱 살? 여덟 살? 몇 살쯤 되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흰 뺨이나 또렷한 이목구비는 어린애인데도 크면 미인이 되겠구나 싶은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생각보다 화려한 외모라는 게 더 도드라졌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눈썹과 특유의 비딱한 태도 때문인지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반항적인 눈매 하며. 모델이 된 어린이는 초상화가에게 꽤나 화가 나 있던 게 틀림없었다.

“공작성의 옛 가구들을 처분하다가 나왔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레녹스의 어린 시절 모습을 기록한 초상화는 이게 유일하다고 귀띔해 주었다.

줄리엣도 알고 있었다. 이건 이전 생에서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이걸 저한테 주셔도 되나요?"

“어차피 전하께 드려 봤자 처분하라고 하실 겁니다.”

줄리엣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초상화를 만지작거리던 줄리 엣은 문득 생각난 걸 물었다.

“밀란 경,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말씀하시죠."

“밀란 경의 가문은 공작가와 인연이 오래됐죠?"

“그럼요. 저희 가문은 대대로 공작가를 섬겨 왔습니다.”

밀란의 대답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레녹스 칼라일은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만 있으면 고용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 덕분에 현재 북부 내각 요직에는 북부 귀족 출신이 오히려 드물었다.

공작가의 수석 비서인 엘리엇은 평민 출신이었고, 공작의 심복인 하딘은 이민족 출신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공작가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밀란은 몇 안되는 순혈 북부 인사였다.

밀란은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었다. 실제로 무수히 많은 북부의 명문가들이 충성할 차기 가주를 잘못 골라서, 혹은 능력이 없어서 숙청당하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자주 공작성에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면 어린 시절의 전하도 기억하시겠네요?”

줄리엣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밀란은 금방 알아들었다.

“물론입니다. 어린 시절의 공작전하를 자주 뵈었지요.”

밀란은 씩 웃었다. 그는 줄리엣이 레녹스의 유년 시절 모습을 궁금해한다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제가 바로 전하의 검술 대련상대였습니다. 이야, 좋은 시절이었죠. 그때는 전하와 제 승률이 비등비등했답니다.”

줄리엣은 엷게 웃었다.

밀란은 칼라일 공작보다 네 살 많았다. 그러니까 레녹스의 어린 시절 공작성에 드나들었다는 밀란 역시 열두세 살쯤 먹은 어린 소년이었을 것이다.

줄리엣은 공작성의 수련장에서 아홉 살짜리와 열두 살짜리가 목검을 가지고 대련을 빙자한 놀이를 벌이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흥미롭긴 했지만 그녀가 궁금한 건 칼라일 공작의 어린 시절이 아니었다.

“밀란, 공작성에서 일하던 하인들도 기억해요?”

“글쎄요. 전부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공작성에서 일했던 자들은 기억납니다.”

줄리엣은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그럼 혹시 프란 부부라는 사람들도 기억하시나요?”

“예?”

줄리엣은 방향을 바꿔 보기로 했다.

현재에서 달리아를 찾을 수 없다면, 아예 과거에서부터 파 들어가는 것이다. 달리아를 데리고 도망쳤던 그녀의 부모로부터.

“프란 부인은 공작님을 돌보던 유모라고 들었어요. 그녀의 남편역시 신임 받던 하인이었다고 했고요.”

"아! 기억납니다. 프란 부부.”

그러나 밀란의 표정은 다시 씁쓸해졌다.

“그 부부가 혼란을 틈타서 공작가의 가보인 보관을 가지고 도망쳤지요. 그런 배은망덕한 ……….”

밀란이 이를 갈았다.

보관(寶冠).

레녹스가 수년간 사람을 풀어 찾아왔던 공작가의 가보는 다름아닌 보석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관(tiara)이었다.

사실 이전의 생에서도 줄리엣은 그토록 아름답다는 티아라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다만 도망친 프란 부부의 딸인 달리아가 나타났고, 그 보물을 되찾았다고 들었을 뿐이었다.

밀란은 너무 많이 이야기했다고 느꼈는지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했다.

"크흠! 죄송합니다. 아가씨, 방금 전의 말은 전하께는 비밀로….”

“물론이죠. 제가 이런 걸 여쭤본 것도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해요.”

“전하가 아시면 별로 좋아하시지 않겠군요.”

밀란은 농담인지 씩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좋습니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프란 부부의 행방은 아직 모르는 건가요?”

“전하께서도 여러 해 찾으셨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건 늑대들이나 하딘이 더 잘 알겁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공작에게만 충성하는 하딘은 절대 줄리엣에게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물어보더라도 곧장 레녹스에게 일러바칠 것이고.

“그럼 프란 부부의 딸도 기억하나요?”

“......예?"

“그 부부에게 어린 딸이 있었어요. 아니, 그렇다고 들었거든요.

레녹스보다 조금 어린 여자아이요.”

“이름은 달리아 프란이에요. 전하와 같이 자라서 소꿉친구라고 들었는데….”

달리아에 대해 설명하던 줄리엣은 뭔가 이상하단 걸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밀란이 멍한 표정으로 줄리엣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밀란은 허둥대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음, 그러니까…… 프란 부부에게 딸이 있었다고요?"

"네, 레녹스의…… 전하의 여동생처럼, 소꿉친구로 자랐다고 했어요.”

왜 그러지?

줄리엣은 밀란이 짓는 표정을 해석할 수 없었다. 어쩐지 초조해질 무렵, 밀란이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밀란은 이런 말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다가 단도직입적으로 잘라 말했다.

“프란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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