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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23화 (120/229)

123화.

"하.”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참만에야 그는 입을 뗄 수 있었다.

“...… 가당치도 않은 꿈을 꿨어.

뭐에 홀리기라도 한 모양이지.”

여기가 어딘지, 주변에 누가 있는지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매일 꿈에 나오던 여자가 너였는데.”

앞뒤도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레녹스는 움켜쥔 팔목을 놓지 않았다.

그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동안 줄리엣은 조그맣고 창백한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었다.

“줄리엣, 네가 아이를 가지고 도망치다가”

그에게서 도망치다가 낙마하는 바람에 아이를 잃었다.

“내가 건넨 술잔을 네가 받아 마셔서……."

은잔을 받아 마신 다음, 여자는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이상하다.'

그러쥔 손목의 감촉과 규칙적인 맥박이 분명 느껴지는데 그는 점점 초조해졌다.

아직까지도 흰 드레스에 붉은 꽃이 핀 것처럼 뿌려진 핏자국이 눈에 선명했다.

엉망으로 망가진 꿈속의 여자와는 달리 눈앞의 줄리엣은 흠잡을데 없이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인형처럼 아무 말 없이 그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렇게 수없이 꿈을 꾸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그 불길하고 꺼림칙한 여자가 줄리엣일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줄리엣.”

꿈속의 그녀는 누가 죽기라도한 것처럼 서럽게 울었고, 미친 여자처럼 악을 썼으며 채찍으로 맞은 듯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뭐라고 말 좀 해."

“줄리엣, 제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줄리엣이다. 그녀는 독이 든 잔을 마시지 않았다. 악몽 속의 줄리엣과는 달리.

품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대신, 뜨거운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여자였다.

살아 있는 줄리엣이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그녀가 미소 짓기를 갈망했다.

당신이 바보 같은 꿈을 꿨다고, 지금이라도 줄리엣이 웃음을 터뜨려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줄리엣은 웃지 않았다.

내리쬐는 달빛 아래에서 줄리엣은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꽃물을 들인 듯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그를 보던 줄리엣이 내놓은 첫 마디는 그가 예상했던 어떤 것도 아니었다.

"이상하네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줄리 엣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그에게 물었다.

“전하, 그걸 어떻게 기억하세요?”

차분한 푸른 눈은 그의 품 안에서 조금씩 죽어 가던 바로 그 여자의 것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레녹스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평온한 표정의 여자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럴 리가 없어."

줄리엣이 그 여자일 리 없다.

그것이 그녀의 기억이었을 리가 없다.

“그럴 리가.”

필사적으로도 부정하면서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의 악몽은 줄리엣에게는 과거였다.

그의 연인인 줄리엣 모나드는 제 나이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적은 여자였다. 소리 내어 웃는 일이 드물고, 우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그는 가끔은 그것을 꽤나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건 편리 한 일도, 신기하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의 굴곡이 적은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닳아 없어진 거였다.

호수처럼 차분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만한 붉은 눈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은 꽤나 희귀한 장면이었다. 고개 숙일 줄 모르던 남자가 그녀의 발치에 꿇어앉아 애원했다.

“줄리엣, 제발.”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감정 앞에 남자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절망을 모르던 남자에게 한마디 말로 겸손을 가르친 여자는 정작 담담했다.

줄리엣은 자신을 붙잡고 애걸하는 남자를 보고도 이렇다 할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눈앞의 남자가

남자가 불쌍하다거나, 혹은 원망스럽다거나. 그 어떤 감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네.’

그 외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왜 레녹스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녀는 단지 의아했다.

줄리엣은 더 이상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줄리 엣 모나드라는 여자에 대해서.

그녀는 천천히 곱씹었다.

'나는 왜 또 당신 곁으로 돌아왔을까.'

처음에는 시간을 되돌아 온 것을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했다.

신의 안배였는지 혹은 사악한 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두 번의 삶을 사는 동안 줄리엣 스스로도 이따금씩 궁금해하곤 했다.

한 번은 죽음으로, 다른 한 번은 거짓말로 그를 속여 가며 기껏 어렵게 도망쳐 놓고서.

누군가 인도한 것처럼 왜 돌아와야 했을까.

줄리엣은 어렴풋이 그 답을 알것 같았다.

아마도 그건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 거라고, 줄리엣은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려 그녀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 대체 누구의 의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존재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게 틀림없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 남자를 마주하게 하기 위해서.

“무슨 말을 듣고 싶으세요?"

“......."

“원하는 대로 말해 드릴게요.”

"…… 아니라고 말해."

줄리엣은 한 번 조용히 웃은 다음 그가 바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아니에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희고 보드라운 손끝이 그의 뺨을 건드렸다.

"내 아기는 죽지 않았어요. 아니, 저는 아이를 가진 적 없어요.”

상냥한 목소리로 그가 그토록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려주었다.

“그리고 전하는 저를 죽이지 않으셨어요.”

'이번 생에는요.' 마지막 말은 입 안으로 삼켰다.

그러나 듣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족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혹시 같이 울어 주길 바라는 걸까?

줄리엣은 심드렁히 생각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줄리엣이 이 남자의 앞에서 더는 울지 않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 * *

줄리엣 모나드는 자신이 죽던 날의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날은 몹시 청명하고 맑은 늦여름이었다. 여름 내내 그녀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깨어 있을 때면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이따금씩은 그토록 무서워하던 남자에게 화병을 집어던지며 악을 쓸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남자는 아이를 잃은 여자를 조롱이라도 하듯 억지로 빼앗아 갔던 그녀의 물건들을 되돌려 주었다.

작은 방을 샅샅이 뒤집어엎으며 화를 낼 때는 언제고 가끔은 보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값비싼 패물을 던져 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줄리엣은 유색 보석들을 공깃돌처럼 만지작거리다가 입버릇처럼 말했다.

[차라리 죽여요.]

[입 다물어.]

눈만 마주치면 오가는 것은 험악한 언쟁뿐인데, 남자는 질리지도 않고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목숨을 끊을까 봐 감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더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실 겁니다.]

몇 달 뒤 그녀를 진찰한 주치의가 그렇게 말했을 무렵에는, 줄리엣은 더 이상 슬퍼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원래 몸이 약했던 것인지, 아니면 말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뭔가 잘못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되레 반응을 보인 것은 그쪽이었다.

발길을 끊은 것이다.

틈만 나면 찾아와 억지로 쓴 약을 들이밀거나 의미 모를 행동으로 사람을 못살게 굴던 게 무색 하게도 그날부터는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조용히 시간을 죽이던 여자는 어느 날 문득 정원이 바로 내다 보이는 창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수레국화는 어디 있지?]

짙푸른 물빛 수레국화는 죽은 그녀의 모친이 가장 좋아하던 꽃이었다. 그녀의 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꽃이기도 했다.

때마침 은쟁반을 들고 온 하녀가 대꾸했다.

[수레국화는 이제 없어요, 아가씨.]

[언제 수레국화가 다 졌어?]

[곧 가을이니까요.]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하녀가 타박했다.

줄리엣은 식사를 가져온 하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낯선 얼굴이다.

언젠가 그녀가 공작성에 온 지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녀를 정성껏 시중들던 하녀들은 말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을 갈아치우는 공작의 곁에서 계절이 몇 번이나 지나도록 머물고 계신 것은 아가씨뿐이라고.

어리석게도 그런 말에 설레고 들뜨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하녀들은 더 이상 그녀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시중을 드는 하인들 사이에서도 급이 있었다. 계절이 바뀐 것도 모르고, 주인의 미움을 산 데다 애물단지처럼 성에 틀어박힌 그녀의 시중을 누가 달가워할까.

자연히 나이 어리고 허드렛일 일하는 하녀들의 몫으로 넘어온 것이다.

문득 눈치 없고 처치 곤란한 짐더미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안 소식에 어두운 줄리엣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그녀의 곁에서 속살거리던 하인들은 온갖 귀한 보물을 모아 두었다는, 동쪽 탑에 기거하는 여자에게로 몰려갔겠지.

줄리엣은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보기 드물게도 마차들이 줄지어 성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녀는 연회장으로 쓰이는 별관에 불이 밝혀진 것을 발견했다.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하던 여자가 명령했다.

[거울을 가져오렴.]

마지못해 하녀가 들고 온 거울을 들여다보자 초라하다 못해 볼품없는 여자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미추를 구분하기보다는, 참 딱하다는 감상이 먼저 드는 얼굴이었다.

[연회에 가야겠어. 도와줄 사람들을 불러와 줄래?]

[하지만….]

놀란 얼굴의 하녀들은 머뭇거렸다. 주인의 눈 밖에 난 여자의 의미친 짓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다는 눈치가 역력했다.

[괜찮아. 너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

그녀는 하녀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를 좀 일으켜 주렴.]

혼자 힘으로 목욕이 어려울 정도로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드레스룸 깊숙이 숨겨 두었던 옷을 꺼내고, 상한 머리끝을 다 잘라 내야 했다.

하지만 가장 오래 걸린 일은 시체 같은 낯빛을 가리는 일이었다. 핏기를 잃어버린 입술은 아무리 붉게 칠해도 어색해서 여러번 덧칠해야 했다.

심드렁한 얼굴로 마지못해 치장을 도와주던 하녀들도 나중에는 슬슬 재미가 붙은 눈치였다.

[이건 어떠세요?]

[좋아.]

제 눈에는 아직도 백짓장에 화장한 듯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달라붙어 정성껏 치장해 준 하녀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체 같은 낯빛을 복숭앗빛 뺨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는 이만저만한 수고가 든 게 아니었다. 적어도 몇 달간 죽은 듯 누워만 있던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정도로 만족했다.

[보석함을 꺼내 오렴.]

하녀들은 하나같이 눈 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광채를 뽐내는 패물들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이게 더 어울리겠어요.]

어느새 열의를 가지고 이것 저것 권하기도 했다.

함 안에는 그간 모아 둔 패물들이 가득했지만 무엇 하나 미련이 남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방을 나서기 전, 줄리엣은 뒷정리를 하는 하녀들에게 패물들을 내주었다.

[갖고 싶은 건 나눠 가지렴.]

[네? 하지만…….]

[나한테는 더 필요 없는 물건이야.]

줄리엣은 열없이 한 번 웃어 준 다음 연회장으로 향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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