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 *
"아가씨!”
“줄리엣 양!”
"......"
어둑한 지하. 눈을 뜨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사람들이 잔뜩 보였다.
줄리엣은 상황을 이해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셔서…..”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괜찮아요.”
줄리엣은 한숨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저 좀 일으켜 주세요.”
그녀의 요구대로 일어나는 것을 도와준 기사들은 어쩐지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목걸이가 선명히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나가는 문은요?”
“아, 그건 아직…….”
반짝반짝.
부지런히 빛을 발하는 나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줄리엣이 불쑥 말했다.
“저쪽이래요.”
“네?”
줄리엣은 태연히 어딘가로 그들을 인도했다. 폭발에 휘말린 듯 떨어져 나온 문짝이 보였다.
"아, 그건.”
“저희도 밀어 봤지만 꼼짝도 안했던…….”
달칵.
거짓말처럼 손잡이가 돌아갔다.
기사들은 모두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으로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출구를 찾은 것 같네요.”
유일하게 침착한 줄리엣이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 문은 성의 1층으로 통해 있었다.
(우리. 어디든. 갈 수 있었어.)
(지금. 못 가.)
(나쁜. 인간. 우리. 가뒀어.)
"그렇구나.”
지하를 빠져나온 다음 마차 안에서도 나비들은 쉴 새 없이 조잘댔다.
오래전, 초대 모나드 백작이라는 줄리엣의 선조는 이 열쇠를 이용해 나비 마물을 가둬 두었던 모양이다.
줄리엣은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마차 밖을 잠시 내다보았다.
그냥 은세공품인줄 알았는데. .
서툴게 재잘거리는 나비들에 따르면 이건 문을 열고 닫게 해준다고 했다.
줄리엣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덕분에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공작가의 기사들은 그녀에게 무슨 수로 밖으로 통하는 문을 정확히 찾아낸 것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사실은 묻고 싶은 눈치가 역력 했으나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 그런 것 따위는 별로 큰일도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밀란 경이 다급히 캐물었다.
“그래서 공작님이 무사하시다는 겁니까, 아니라는 겁니까?"
“그게 좀…… 이상합니다.”
상태를 묻는 그들에게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은 그런 애매모호한 답변만 들려주었다. 평소의 엘리엇답지 않은 태도였다.
"어쨌든 직접 보시면 알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늦은 저녁에 현재 수도 외곽의 버려진 사원 유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기네스 후작과 그의 잔당들도 순조롭게 진압되었는데, 뜬금없이 칼라일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라고 기사들은 생각했다.
"너무 걱정 마시지요. 주군은 괜찮으실 겁니다.”
줄리엣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기사, 주드가 위로했다.
“걱정 안해요.”
기사들의 검이 웅웅거리며 울어 대는 걸 힐끔 곁눈질한 줄리엣이 싱긋 웃었다.
검에 박힌 마력석들이 일제히 공명하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던 주드는 어째 상황이 7년 전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직 햇병아리 견습 기사에 불과하던 시절. 그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주드는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태도의 줄리엣 모나드를 힐끔거렸다.
7년 전 같은 장소에서 그들은 그녀를 처음 만났었다.
* * *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직후, 기사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다급히 뛰어내렸다.
“전하!”
해가 진 다음의 사원 유적의 분위기는 상당히 묘했다. 여기저기에 낯익은 얼굴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쩐지 겁먹은 얼굴이었다.
부축도 없이 홀로 마차에서 내린 줄리엣은 곧장 자신이 찾던 남자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는 무뚝뚝한 기사, 하딘이 말을 더듬으며 줄리엣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아니.… 아가씨. 그게.”
어쩐지 그녀에게 이 장면을 보여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전하께 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들도 알지 못했다. 칼라일 공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말이다.
몇 시간 전, 공작은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었다. 온갖 수를 다 써봤지만 그들은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칼라 일은 공작은 의식을 잃은 자세 그대로 수 시간째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들을 훑어보던 줄리엣이 짧게 말했다.
“비켜요.”
줄리엣은 기사들을 지나쳐, 사원 유적 한가운데에 꿇어앉은 남자에게로 다가갈 수 있었다.
해는 이미 저물어 밤하늘에는 휘영청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이 내리쬐고 있었고, 남자는 기도하는 사람처럼 반쯤 무릎을 꿇은 채 그곳에 있었다. 그대로 석상이 된 것처럼 미동도 없이.
검 한 자루에 의지해 달 아래 꿇어앉은 남자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줄리엣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자를 보다가 물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
“……여덟 시간쯤 됐습니다.”
“그렇구나.”
줄리엣은 담담히 대답했지만 하딘은 그녀가 공작에게 접근하도록 내버려 둬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난 수 시간 동안 그들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써 봤다. 신관도 의사도, 심지어 마법사도 불러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갈라치면 저놈의 검이 사납게 울어 대며 결계라도 친 듯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하.”
그러나 줄리엣은 하딘이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전에, 너무도 쉽게 결계가 있던 선을 통과했다.
"!”
이전과는 달리 공작의 검은 울지 않았다.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다가간 줄리엣은 눈높이를 맞추듯 그의 앞에 조용히 꿇어앉았다.
“레녹스.”
줄리엣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건드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남자가 깨어났다.
잠시 시야가 흐릿한 듯 미간을 찌푸렸던 남자는 이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악몽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툭.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그의 왼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줄리엣.”
다급한 동작으로 팔목을 끌어당겼지만 줄리엣은 저항하지 않았다.
***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연회장에 나타난 여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는 연회장 안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해사하게 웃었다.
그렇게나 기를 쓰고 피부를 드러내기 싫어했던 것이 무색하게, 목덜미와 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드레스였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매질 당한 게 분명한 흔적에 사람들이 수군 거리는 것조차 개의치 않았다.
[안녕, 레녹스.]
여자는 시체처럼 누워서 몇날며칠이고 시간을 죽이던 것과는 달리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화가 난 상태였다.
노골적인 추파에도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사람들에 둘러싸여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대로 웃고 떠들고 천박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 틈에서 나비처럼 춤을 추었다.
그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
누군가 그녀에게 축사를 청했고, 그는 마지못해 술이 든 은잔을 줄리엣에게 건넸다.
은잔을 넘겨주는 순간, 그는 꺼림칙한 불길함에 사로잡혔다.
뭐였을까.
그에게서 잔을 건네받은 여자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여자는 멍하니 은으로 만들어진 술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만가만 술잔 안을 내려다보던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툭 하고 눈물을 떨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잔을 높이 들었다.
[감사했어요, 전하.]
뜻 모를 한마디를 해석하기도 전에, 그녀는 독한 술을 단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잔을 놓쳤다.
탕.
데구루루.
은잔이 바닥에 떨어져 덧없이 굴러갔다.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는 비틀거리는 여자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몸이 휘청하는 충격으로 틀어 올렸던 긴 머리채가 풀썩이며 흘러내렸다.
콜록.
그의 품에 안긴 여자가 창백해진 얼굴로 밭은기침을 토해 냈다.
[……줄리엣?]
새하얗던 드레스가 그녀의 핏줄기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레녹스 칼라일.
혹은 레녹스 칼라일이었던 남자는 여자가 힘없이 눈을 감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피를 토하고 죽어 가는 여자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째서, 왜, 언제부터?
모든 의문들은 무의미했다.
주변에서 비명을 지르고 웅웅거리는 소리들은 모두 무의미한 소음들이었다.
오직 중요한 것은 힘없이 눈을 감은 여자의 몸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하염없이 창백하고 고요한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전하.”
그리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악몽에서 그를 깨운 것은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런.)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검은 표범의 모양을 한 악령이 가볍게 혀를 찼다.
나타났네.
아직 방해꾼이........
뭐라고 중얼거리던 표범은 못내아쉽다는 듯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길고 긴 그의 악몽도 끝이 났다.
“레녹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그를 깨워 낸 여자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흰 뺨과 단정한 이목구비. 물기를 머금은 듯 연한 푸른 눈동자.
“.……줄리엣.”
횃불로 주변을 밝히고 그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레녹스는 제 왼뺨을 타고 눈물이 흐른단 것조차 알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제 앞에 있는 여자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도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를 안심시키는 것은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의 줄리엣과 움켜쥔팔목에서 느껴지는 규칙적인 맥박뿐이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