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21화 (118/229)

121화.

* * *

“줄리엣 양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시네요.”

주드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줄리 엣을 쳐다보았다.

줄리엣은 후작성 지하에 갇혀버린 상황에서 태평하게 그런 걸 묻는 주드가 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안 무서우십니까? 저는 아가씨가 우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밀란 경이 내보내 준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렇죠?”

줄리엣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대뜸 지목된 공작가의 다른 기사, 밀란 경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물론입니다, 줄리엣 양. 반드시 무사히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밀란 경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을게요.”

줄리엣은 빙그레 웃으며 나비 몇 마리를 더 허공에 띄웠다.

그녀는 조명조차 마물에게 의지 해야 하는 상황이란 점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이런 용도로 이용당하는 게 짜증스럽다는 듯, 나비들은 마지못해 환한 빛을 뿌리며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반짝였다.

순식간에 지하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들은 현재 몇 시간째 후작성의 어두운 지하에 갇혀 있었다.

'별일이 다 생기네.'

줄리엣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몇 시간 전에 이곳을 탈출했어야 했다.

기네스 후작의 부하 중 한 명이 폭탄 비슷한 것을 터뜨리지만 않았어도 유유히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폭발이었지만 지하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막기에는 충분했다.

후작성의 지하 감옥은 오래된 성의 지하가 흔히 그렇듯, 미로처럼 복잡했다.

어딘가에는 분명 나갈 수 있는 출구가 또 있을 텐데, 사방이 어두워서 그걸 찾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걱정 마십쇼. 어떻게든 저희가 나갈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밀란은 믿음직스럽게 장담하고 다시 동료들과 함께 출구를 찾으러 갔다.

그가 멀어지자 주드가 짓궂은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하지만 솔직히 언제 성이 주저앉을지 모르잖습니까?"

“이 성은 수백 년 된 건물이잖아요. 오래된 성들은 훨씬 견고하게 지어졌으니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예요.”

줄리엣이 조곤조곤 지적했다.

그러나 줄리엣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주드가 대뜸 씩 웃었다.

“왜요?”

"아, 아닙니다. 종종 생각한 건데, 가끔 아가씨는 꽤 주군이나 하실 법한 말을 하시네요.”

“제가요?”

“네. 저희는 더 오랫동안 주군을 모셔도 그런 건 안 닮던데 말이죠.”

글쎄.

줄리엣은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 상황이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줄리엣은 자신이 죽던 날을 기억했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여름날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아니야.”

반년 뒤에는 죽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이 오늘 이곳에서는 죽지 않으리라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줄리엣이 작게 하품했다.

“피곤하세요?”

“아뇨.”

“잠시 눈 좀 붙이시죠."

기사단의 부단장, 밀란 경이 다가와 모포를 건네주었다. 먼지를 털어 내자 그럭저럭 쓸 만했다.

“괜찮아요.”

“이틀 내내 못 주무셨잖습니까.”

공작의 살인범 취급받으며 조사를 받느라 피곤했던 건 사실이다.

“뭔가 발견하면 바로 깨워 드리겠습니다.”

기사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줄리 엣은 두 번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포를 덮고 대충 평평한 구석을 찾아 벽에 몸을 기댔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사방에서 기사들이 퉁탕거리며 돌아다니는데 과연 잠이 올까, 싶었지만.

눈을 감기 무섭게 줄리엣은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겨우 조용해졌군.]

[진정제를 투약했습니다.]

눈을 감고 몸을 누이길 얼마쯤.

그녀는 침실 바깥에서 오가는 대화를 엿들었다.

돌아오는 대로 다시 얘기하지.]

[하지만…….]

[구슬려서 말을 못 알아들으면 약이라도 먹이란 말이야. 알아들어?]

목뒤가 서늘해졌다. 사나운 어조로 쏘아붙인 남자의 발걸음이 멀어져 갔다.

잠시 후, 멀리서 말들이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성을 떠난 것을 확신한 다음, 내내 잠든 척 눈을 감고 있었던 여자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도망쳐야 해.'

여자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단번에 침실을 벗어난 여자는 는익숙한 듯 제 방으로 달려가 작은 짐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성의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줄리엣 모나드.’

남 얘기를 보듯 물끄러미 그 환영을 보고만 있던 줄리엣은 힐끔 옆을 돌아보았다.

분명, 그녀는 조금 전까지 공작가의 기사들과 함께 후작성의 지하에 갇혀 있었는데 말이다.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 팔랑거리는 나비들이 날아가지도 않고 그녀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뭘 어쩌라고?”

(.....)

줄리엣이 날카롭게 말했다.

“지금 이런 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뭐야?”

그녀는 몇 번이고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나비들이 자신을 구한 것을 알고 있었다.

7년 전, 가스팔 남작이 고용한 화적들에게 붙잡혀 있을 때도 그랬고, 얼마 전에는 눈 쌓인 숲에서 늑대를 맞닥뜨렸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래서는 곤란하다.

현재 줄리엣은 공작가의 기사들과 함께 지하에 갇혀 있었다.

만에 하나 나비들이 도와주겠답시고 기사들을 죽이기라도 할까봐 줄리엣은 걱정스러웠다.

(그거. 아냐.)

(계약자. 가지고 있어.)

(열쇠. 문 열어.)

나비들이 다급히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열 수 있어.)

(우리. 못 해.)

(계약자만. 해.)

(만해)

(필요해. 대가.)

나비들은 줄리엣이 화를 내자 조금 주눅이 든 것 같았다.

줄리엣에게는 가증스럽게 보일 뿐이었지만.

(계약자. 봐야 해.)

(, 해〉

(조건. 문. 열려.)

(나쁜. 기억. 대가.)

나비 마물들은 서툰 말로 열심히 설명했다.

줄리엣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이 열린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대가랑 나쁜 기억을 곱씹는 건 또 무슨 상관이람? 하지만 어차피 깨어나고 싶다고 해서 깨어나게 해 주지도 않을 테니까.

“좋아.”

언젠가 눈밭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처럼, 그녀는 거대한 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 틈새로 보이는 것은 한심하리만큼 순한 얼굴의 자기 자신이었다.

촌스럽게 치렁치렁 늘어뜨린 머리칼 하며,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매달리는 것 하며,줄리엣은 과거의 자신이 안쓰럽기는커녕 볼수록 멍청하고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

'멍청한 계집애.’

공작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녀는 탈출을 시도했다.

레녹스 칼라일이 제 핏줄을 가진 여자를 놓아줄 리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어차피 그 무렵, 그녀는 머지않아 쫓겨나게 되리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온 성의 사용인들이 주인이 수년 동안 애타게 찾던 여자를 마침내 찾아서 데려왔노라 떠들었으니까.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소녀는 공작성에서 가장 귀한 보물들을 모아 두는 동쪽 탑에 귀하게 모셔졌다.

밤이고 낮이고 경비병들이 지키고 서서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을 보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멍청한 줄리엣 모나드는 그 여자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매일같이 정원을 서성였다.

대체, 보면 뭐가 달라진다고.

공작가의 가보들을 모아 두는 방의 창문에 어른거리는 남녀의 실루엣을 겨우 보았을 무렵에는, 줄리엣은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 제 발로 떠나기로 결심했었다.

[이게 뭐지?]

그러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멍청하게도 서랍장 속에 조금씩 모아 둔 잡동사니가 들통났다.

아기 신발이며 옷가지 같은, 하찮고 값어치 없는 물건들은 초라했지만 그녀에게는 보물이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나?]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럼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지?]

아이의 존재를 숨긴 사실을 알게 되자 남자는 무섭게 화를 냈다.

전에 본 적 없는 표정의 그를 마주하고 나서야 그녀는 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희망을 품었는지 깨달았다.

왜 용서를 비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살려 달라고 빌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그냥…… 떠나게만 해주세요.]

[…… 떠나게만 해 달라?]

[멀리 가서 죽은 듯이 살게요.]

[어림없는 소리.]

그러나 무슨 말을 하든 그의 화를 돋굴 뿐이었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

그녀는 남자와 주치의의 대화를 엿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단순히 아이를 바라지 않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가능성 자체를 배제했던 거였다.

[젠장.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잖아.]

[소, 솔직히 그렇습니다. 이건 극히 드문 사고로 실수라고밖에는…….]

극히 드문 확률로 생긴 실수랬다.

[그럼 바로잡아.]

[하지만…….]

[뭐든 상관없으니 여자만 살려 놔.]

실수니 오점이니. 계획이 틀어지게 만든 존재가 눈엣가시 같았겠지.

그러나 그녀에게는 세상에 유일한 피붙이였다. 이곳을 떠나고 나면 그녀에게는 정말로 아무도 남지 않는데.

'혼자는 싫어.’

그래서 그녀는 무모한 도주를 계획했다.

[내가 도와줄게요.]

약간의 요행과 도움을 받은 덕분에 그녀는 공작가의 말을 훔쳐 달아났다.

승마는 유일하게 그녀가 자신 있는 재주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북부의 숲을 벗어나기도 전에 붙잡혀 다시 성으로 끌려왔다.

그토록 자신했던 주제에, 고작 겁에 질려 도망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악마는 아무것도 잊지 않아.)

(너희 미천한 인간과는 다르지.)

불현듯 나비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줄리엣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사실 처음 꾸는 꿈도 아니었다.

이제는 몇 번을 봐도 무덤덤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수 없어.)

(그렇게 되어 있어.)

나비들은 어쩐지 조금 들떠 보였다.

이런 과거를 보고 그녀가 괴로워해서? 계약자의 고통도 쟤네한테는 먹이가 되는 걸까?

(하지만 보여 줄 수는 있지.)

(우리는 오래오래 기다렸어.)

줄리엣은 의미심장한 말의 의미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 이거 보고 싶지 않아.”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됐잖아. 안 그래?”

(.....)

그와 동시에 줄리엣은 눈을 떴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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