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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20화 (117/229)

120화.

* * *

다음 순간, 그는 북부 공작성의 익숙한 복도에 서 있었다. 꿈속의 그 복도였다.

레녹스는 놀라지도 않았다.

제 앞에서 느긋하게 어슬렁거리는 흑표범을 보자마자 그는 내뱉었다.

“꺼져.”

그는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재수 없는 짐승과 지겨울 만큼 익숙한 꿈속의 장면이 함께 나타나자마자 그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했다.

“역시 네 소행이었군.”

집채 만한 흑표범은 꼬리를 살랑거렸다.

(잊었어? 이게 네 눈을 돌려주는 대가였잖아.)

“이 빌어먹을 악마 새끼가.”

욕설을 퍼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이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 하며, 조금 전 갑작스레 자신이 의식을 잃은 것까지 전부 저 검은 표범의 짓이 분명했다.

사람을 시도 때도 없이 정신계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야말로 악령들의 특기였다.

(옛날이야기처럼 첫 아기를 받아 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검은 표범이 히죽 웃었다.

짐승이 웃을 수는 없겠지만, 레녹스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매력적인 육식 맹수의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저 짐승의 정체는 칠흑의 검에 붙어 있는 악마였다.

그들의 관계는 십수 년간 계속된 기묘한 공생 관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껏 저 짐승은 그를 멋대로 조종하지 못했다.

줄리엣을 꾀어내 힘을 빌려 주는 대가로 계약을 한 교활한 나비들과는 달리, 그는 녹슬지 않는 검이 필요했지 악령의 힘이 필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날이 무뎌지거나 녹스는 법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건 그냥 내구성이 좀 심하게 좋은 평범한 검과 다름없었다.

힘을 빌려 주겠노라는 무수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레녹스는 코웃음 쳤다. 때문에 검은 표범의 모습을 빌린 악마는 그의 정신에 간섭하지 못했다.

그의 시력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게 우리 계약 조건이었지.)

검은 표범의 꼬리가 우아하게 살랑거렸다.

(내가 원할 때 네 정신의 통제권을 넘겨줄 것.)

“딱 한 번이라고 그랬을 텐데.”

(성급하긴.)

시도 때도 없이 악몽을 꾸게 만든 것은 계약 조건에 어긋나지 않느냐, 그는 항의하고 싶었다.

(보여 줄 게 있어서 잠시 네 육신을 가둔 것뿐이야. 볼일이 끝나면 곱게 보내 줄 테니 까칠하게 굴지 말라고, 계약자.)

유능한 기사들을 잔뜩 붙여 놓았으니 줄리엣이 무사할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못내 마음이 조급했다.

(네 아가씨는 안전해.)

악령이 느긋하게 말했지만 어쩐지 생각을 읽힌 것 같아 레녹스는 짜증스러워졌다.

“젠장. 뭐가 됐든 빨리 끝내.”

악마와는 이래서 거래를 하는 게 아니다. 후회해 봐야 엎질러진 물이었다.

레녹스는 그럴 바에는 이 악마가 원하는 대로 뭐든 빨리 응해 주고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현명한 판단이야.)

씩 웃은 흑표범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

대체 뭘 보여 주겠다는 거야?

어차피 레녹스는 이 꿈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

공작성의 복도를 걷다가, 그가 침실 문 앞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끝이 난다. 그러니 레녹스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침실 안에서 울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꿈에서 깨어날 테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끝나지 않았다.

레녹스는 문 앞에 멈춰 섰다.

꿈에서 깨어나기는커녕, 그는 처음으로 휘장이 드리운 침상에 앉은 여자의 실루엣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늘어뜨린 긴 머리채는 색소가 옅은 색이었다.

들썩이는 어깨선은 가느다랗고, 흘러내린 옷깃 틈으로 얼핏 비치는 목덜미와 등은 상처투성이였다.

[이제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고개를 떨구고 넓게 흐느끼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는 숨이 멎은 듯했다.

여자의 얼굴은 그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었다. 아니, 실은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생김새였다.

[골칫거리가 사라졌으니까요.]

그를 쏘아보는 물기 어린 푸른눈.

“.....… 줄리엣?"

쾅!

그와 동시에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벌써 겁을 먹었나?)

그리고 유들유들한 검은 짐승이 다시 나타났다.

“……같잖은 수작 집어치워."

레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유 모를 불안으로 손끝이 싸늘해졌다.

그럴 리가 없다.

모를 여자가 줄리엣일 리 없다.

수십, 수백 번 마주쳤던 얼굴가 일무엇보다 줄리엣이 저렇게 서럽게 울면서 그를 쏘아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런, 아직 한참 남았는데 벌써 겁을 먹으면 곤란해.)

“이딴 환각을 보여 주는 이유가 뭐야.”

(환각이라니, 말이 심하네.)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악령이 킬킬거렸다.

네가 눈을 잃어서 다행이야.

(왜냐면 나는 이날을 아주아주 오래 기다렸거든?)

흑표범이 느긋하게 속삭였다.

두 눈 뜨고 똑똑히 봐. 이건(네가 아주 오래 전 망각한 기억이니까.)

따악.

그가 그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장면이 바뀌었다.

레녹스는 더 이상 공작성의 복도를 걷고 있지 않았다. 계절도 장소도 달라졌다. 그는 장미 덤불이 우거진 정원의 가제보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조금 전, 울면서 그를 쏘아보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장밋빛 뺨을 가진 줄리엣이.

그녀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등의 흉터를 가리기 위함인 걸까.

그러나 그런 줄리엣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줄리엣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를 곱씹어 봤고,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제 상상 속에서조차 줄리엣은 저런 표정을 지은 적 없었다.

그녀는 순진하게 얼굴을 붉히지도, 맹목적인 애정과 신뢰가 담긴 눈을 빛내지도 않았다.

감정이 풍부한 눈으로 그를 보는 줄리엣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낯설고 사랑스러웠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전하.]

그의 앞에 선 줄리엣은 왠지 모르게 긴장한 듯 보였다.

[혹시 아이가 생기면……….]

[네게 아이를 바랄 일은 없다고 했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차가운 말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전하, 만약이란 게 있잖아요.]

물기 어린 푸른 눈이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그를 좇았다.

[결혼은 아니라도, 만약에 아이가 생기면…….]

즉각적이고 순진한 반응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약은 없어.]

그리고 정해진 대사를 옮기라도 하듯,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이 튀어나왔다.

[못 알아듣나, 줄리엣?]

제 귀에도 차가운 비웃음이 낯설게 들렸다.

[애는 필요 없다고 말했을 텐데. 설령 생겨도 낳게 하지 않는다고.]

애정과 신뢰로 빛나던 눈이 경계와 실망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네, 그러셨죠.]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푹떨구는 줄리엣은 억지로 미소 비슷한 걸 지어 보였다.

불안한 듯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는 속내가 훤히 읽혔다.

그의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이 대화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필요하지 않다고 했어요."

"이제는 없는 사람이에요.”

붉은 매화꽃 가지 아래에 앉아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던 여자의 어조.

그러나 그가 싸늘해진 머리로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장면이 바뀌었다.

다음 순간, 그는 엉망이 된 방안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치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의 여자가 꿇어앉아 있었다.

그의 팔에 매달린 채, 줄리엣은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있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몹시 겁먹은 얼굴로 줄리엣이 그를 올려다보며 애걸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쿠당탕.

말없는 하인들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작은 방 안의 가구들을 마구 뒤집어엎고 있었다.

무서워하는 것이 그런 하인들인지, 아니면 그인지. 줄리엣은 겁에 질려있었다.

서랍장과 옷장이 엎어질 때마다.

누군가 차곡차곡 모아 둔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의 발치에는 어린 아이의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옷가지며 장난감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잔뜩 굴러다녔다.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게요! 다시는 조르지 않을 거예요.]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줄리엣은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새것이 분명한 아기 옷과 정성껏 모아 둔 새하얀 가제 수건 따위가 서랍장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의 발아래에서 짓밟히는 걸 보고 여자는 더욱 소리 높여 울었다.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레녹스…… 제발, 저 사람 들한테…… 저것 좀 그만하라고 해 주세요. 네?]

다 큰 여자가 목 놓아 울며 애원하는데도 하인들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 작은 방의 주인이 그녀임을 애원하는 여자를 보고서야 그는 깨달았다. 그러니 다람쥐처럼 아기 물건들을 잔뜩 숨겨 둔 것 또한 그녀의 소행일 터였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네? 멀리 떠나서 죽은 듯 살게요. 그러니까….]

조각난 장면들이 그가 인지하기도 전에 정신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이것이 몇 번째 보는 환각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자초지종인지 앞뒤를 파악하지도 못했다.

다만 유일하게 선명한 것은 그의 발치에 꿇어앉아 애원하는 여자의 목소리와 모습뿐이었다.

[……우리 아기만 살려 주세요.]

그가 아는 줄리엣은 이렇게나 감정 표현이 격하지 않았다.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함을 잃는 법없는 여자였다.

웃을 때도 희미하게 싱긋 미소짓는 게 고작. 눈물을 글썽이는 일조차 드물었다.

눈앞의 여자는 줄리엣과 똑같은 얼굴로, 훨씬 눈부시게 웃고 훨씬 더 서럽게 목 놓아 울었다.

쉽게 소리 내어 웃고 쉽게 울음을 터뜨리고…….

이게 줄리엣 모나드일 리 없다.

'그럼 이 기억은 누구의 것이지?’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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