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정말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대도 이만큼 경악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칼라일 자, 자네 분명 주, 죽……!”
황제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살인 사건은 실리카 법에 의해 아직 극비로 취급되고 있었다.
소문이 소문인지라 완전히 틀어 막지는 못해 지금도 연회장의 몇몇 귀족들이 술렁이고 있었지만.
어쨌든 황제가 공개적으로 언급 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었다.
"여보게 칼라일, 자네 죽은 게 아니었나?”
묻고 나서야 황제는 꽤 멍청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글쎄요.”
그러나 칼라일 공작은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자네 설마…… 나와 황실을 속인 건가!”
황제는 그제야 자신이 화를 내도 된다고 판단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침착한 칼라일공작의 태도는 은근히 부아를 돋우는 구석이 있었다.
“고정하시죠, 폐하.”
“아니,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나! 왜 그런 거짓말을!"
칼라일 공작은 침착하게 말했다.
“제 잘못을 벌하신다면 후일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반역 죄인부터 처분하시는 게 우선입니다.”
“바, 반역죄라니?"
레녹스 칼라일은 여전히 자신을 유령 보듯 보고 있는 기네스 후작을 힐끔 곁눈질했다.
“폐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화폐위조는 반역죄에 준하는 중죄라는 것을요.”
“....…그런데?"
“그리고 귀족들이 생산하고 사사로이 거래할 수 있도록 허가된 품목들 가운데, 유일하게 화폐에 준하는 품목이 있지요.”
"아, 알고 있네. 그거 마력석 아닌가.”
대답하면서도 황제는 조금 우쭐했다. 마력석은 화폐와 동일하게 취급되는 유일한 상품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실재하지도 않는 마력석 광산의 존재를 거짓으로 꾸며 내어 황실과 다른 가문으로부터 투자금을 갈취한 자는”
칼라일 공작은 이 대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실 경비대를 향해 고갯짓했다.
“역시 반역죄로 처분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겠군? 그런데 이런 얘기를 왜…….”
“경비대장, 끌어내게."
경비대장은 반사적으로 기네스후작을 붙잡은 다음에야 자신이 황제가 아닌 다른 귀족의 명을 따라도 되는 것인가 헷갈렸다.
그러나 황제는 경비대장의 불충을 꾸짖을 새가 없었다.
“서, 설마! 기네스 후작 자네가!”
황제 자신조차도 방금 전의 대화를 곱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폐하! 이건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이, 이것 놔라!”
기네스 후작은 거세게 저항했지만 칼라일 공작은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남부로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하면 되겠군요. 조사관을 파견하도록 허가해주십시오, 폐하.”
"……허가하네. 당장 남부로 조사관을 보내게!”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네스 후작님!”
후작가의 남부 마력석 광산에 투자한 것은 귀족들뿐 아니라 황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혼식 분위기는 뒷전이고 기네 스 후작은 성난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레녹스는 곧장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전하!”
밖에서 기다리던 공작의 비서, 엘리엇이 재빨리 그 뒤를 쫓아 나왔다.
“줄리엣은?”
“..… 밀란 경과 주드 경이 갔습니다. 곧 후작성을 빠져나오실 겁니다.”
“좋아.”
“대체……?"
충성스러운 공작의 비서는 주인을 기막히다는 듯 쳐다보았다.
엘리엇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냐고 묻고 싶었다.
제 죽음을 가장해서 황제와 다른 귀족들까지 까맣게 속여 놓은 주제에 공작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하여간 하루만 죽어 달라고 부탁하는 줄리엣이나, 그 부탁을 들어주는 칼라일 공작이나, 쌍으로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엘리엇은 칼라일 공작이 비둘기 모양 은 세공품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보았다. 그건 공작이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제가 전하를 아주 예전에, 많이 사랑했었어요.”
비둘기의 날개에 느긋하게 입맞춘 다음, 레녹스는 중얼거렸다.
“몇 번이라도 더 죽어 주지."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그럴 터였다. 정부에게 홀려 나라를 기울게 한 왕의 이야기가 이해가 갔다.
“……부디 저것도 대책이 있으시면 좋겠군요, 전하!"
공작의 비서가 투덜거렸다.
“저것 좀 보십쇼!"
한 무리의 무장한 기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후작가의 사병들이었다.
"고, 공작!”
연회장 안에서도 같은 것을 본 모양인지 황제가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이, 이제 어떡하나 공작!"
황제가 허둥댔다.
“황후를 모시고 안으로 피하시죠.”
몰려오는 후작가의 병력을 보며 느긋하게 검을 빼든 칼라일 공작은 산책을 권하듯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후작이 병력을 준였다.
비해 뒀단 정도는 예상 범위 내 하필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있던 하객들은 후작가의 사병들에게 포위당하자 혼비백산했다.
“후, 후작을 인질 삼아야 하나?”
"괜한 짓입니다. 후작은 내버려 두고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 기다리시면 충분할 겁니다.”
“……알겠네!”
황제는 연로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행동이 재빨랐다.
“갑시다, 황후!”
공작의 충고대로 황제는 냉큼 황후와 함께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우왕좌왕하던 다른 귀족들도 엉겁결에 그 뒤를 우르르 쫓아갔다.
기네스 후작의 부하들은 잠시 황제를 쫓으려고 했지만 공작가의 기사들에 가로막혔다.
투르륵!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는 말을 타고 황궁을 빠져나가는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후작님!"
부하들에게 구출된 기네스 후작은 잠시 멈칫했으나 황제를 향해 칼을 들이댄 순간부터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어차피 오늘 칼라일 공작을 죽이지 못하면 황제를 사로잡아 봤자 그게 그거였다.
게다가 혼자 몸으로 유유히 신전을 빠져나가는 칼라일 공작은 무시하기에는 유혹적인 미끼였다.
“공작을 쫓을까요?”
어쩔 수 없다는 듯 후작이 명령했다.
“젠장, 공작부터 처리해라!"
물론 그렇게 말하는 쪽도 듣는 쪽도 '처리'가 상당히 터무니없는 단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칼라일 공작의 준마는 후작의 수하들을 따돌리며 거침없이 수도 외곽으로 향했다.
마치 처음부터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잡아라!”
한참 동안 내달리던 칼라일 공작이 말을 멈춰 세운 것은 수도 외곽의 버려진 사원 유적에서였다.
말에 탄 채 공작이 멈춰 서서 그들을 돌아보자 그를 뒤따라 온 후작의 병사들 역시 조금 거리를 두고 우르르 멈춰 섰다.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믿은 후작의 부하들은 기세등등해졌다.
“하핫! 소드마스터도 별거 아니잖아?”
기네스 후작의 수하들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여기를 네놈의 무덤으로 고른 거냐?"
“버려진 사원이라니. 공작님다운 고상한 취향이시군!"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녹스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래, 이쯤이면 적당하겠네."
칼라일 공작의 나직한 목소리는 묘하게 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칼라일 공작의 귀검을 본 후작의 부하들은 잠시 움찔했다.
검집조차 없이,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검은 검날까지 온통 새카만 빛이었다.
잠시 동안 레녹스는 그답지 않은 감상에 젖었다.
줄리엣을 먼 남부까지 꾀어내서, 억지로 계약이라는 명목으로 6개월간 붙잡아 두고 어떻게든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전전긍긍하는 동안 레녹스는 깨달았다.
줄리엣이 좋아할 만한 것들, 고상한 취미들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과 같았다. 그건 아마 결코 익숙해지기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줄리엣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최소한 그녀와 한 약속 정도는 지켜 줄 자신이 있었다.
“누가 화를 내서 말이야.”
".......?"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누굴 죽이지 말라고 약속하라더군.”
레녹스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여기라면 충분히 보는 눈이 없으니 괜찮겠지.”
눈을 끔뻑이던 후작의 부하들은 한 박자 늦게 그 말뜻을 이해했다.
“주군!”
레녹스는 검에 묻은 피를 쓰러진 병사의 로브에 닦다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한 무리의 기사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중 선두에 선 것은 피부 색이 어두운 이민족 남자였다.
공작의 심복인 하딘이었다.
“일찍도 오는군.”
레녹스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버려진 사원에서의 상황은 싱겁게 정리되었다. 애초 반란을 꾀하기엔 병력이 충분하지 못했던 기네스 후작이었다.
차라리 후작은 부족한 병력이나마 끌어 모아 황제를 궁에서 끌어내든지, 혹은 칼라일 공작을 죽이든지 둘 중 하나에 주력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심성 많은 후작은 그 성격 때문에 이도 저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없는 병력을 쪼개고 말았다. 그 결과 각개 격파 당했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하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레녹스는 그의 팔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황궁에 들렀다 온 모양이지?"
"예. 후작을 산 채로 붙잡아 두었습니다.”
하딘은 태연하게 보고했다.
후작가의 병사들이 칼라일 공작을 뒤쫓아 갔다는 걸 알았지만 하딘은 황궁을 포위하고 있던 기네스 후작을 사로잡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
결국 공작가의 기사들은 기네스후작을 붙잡고 황제 일행을 구출한 다음에야 주인에게로 왔다.
조금 전 빨리도 왔다는 공작의 빈정거림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군은 독단적인 판단을 꾸짖지도 않았다.
“줄리엣은?”
“아직 후작성에 계십니다. 밀란 경과 주드 경이 함께 있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심드렁히 말하며 레녹스는 몸을 일으켰다.
“직접 가 보실 겁니까?"
그렇게 묻던 하딘은 문득 그들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정확히 7년 전의 여름. 그들이 피투성이 여자를 발견한 바로 그 사원 유적이었다.
“데리러 가겠다고 했어.”
무뚝뚝하게 대꾸한 레녹스는 피묻은 손을 대충 닦았다.
일방적인 약속이었지만 어쨌든 레녹스는 줄리엣에게 그렇게 말했다. 줄리엣은 별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그는 지킬 생각이었다.
“그럼 후작성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딘은 고개를 꾸벅 한 다음 앞서 걷기 시작했다.
실은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후작성으로 간 기사들로부터 연락이 없어 하딘 역시 내심 불안하던 차였다.
캉!
그러나 하딘이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 하딘은 당황했다.
"주군?”
검을 바닥에 내리꽂은 채, 칼라일 공작이 반쯤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레녹스는 갑작스러운 현기증과 동시에 삐- 하는 이명을 들었다.
휘청이던 그는 검에 몸을 의지했다.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면한 그의 눈앞에 늘씬한 검은 흑표범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주군!”
하딘을 비롯한 기사들이 뭐라 외치는 것 같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았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