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너, 너…… 어떻게 ……?"
말문이 막힌 솔론이 더듬더듬말했다. 심지어 그녀의 발목에 묶여 있던 쇠사슬은 어느새 풀린 채였다.
"어쩐지. 그렇게 단기간에 마력 석 광산을 개발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줄리엣은 아랑곳 않고 태연하게 손에 든 가짜 마력석을 살펴보았다.
“에셀리드가 가짜 마력석을 만드는 흑마술이 있다고 말해 주긴 했지만.”
줄리엣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투로만 봐서는 지하감옥에 갇힌 게 아니라 무슨 제 집 응접실에 있는 듯한 말투였다.
“인공적으로 만든 거였네. 그렇죠?”
팔랑. 그녀의 뒤로 조용히 나비가 날아들었다.
"너, 너. 어떻게 최면을……!”
최면이라.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며칠 전.
"삐익!”
낯선 마법사들에게 잔뜩 둘러싸인 오닉스가 귀찮다는 듯 날카롭게 울었다.
그러나 줄리엣에게 안긴 상태라 몸을 뒤척이는 게 고작이었다.
결국 줄리엣은 에셀리드와 함께 찾아온 수상한 마법사들을 만나주었다.
오닉스가 뭔가 수상한 걸 주워 먹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오, 이게 말로만듣던그……!”
“이 날개! 완벽한 균형!"
“빠, 빨리 스케치! 스케치!”
줄리엣이 오닉스를 안고 있는 동안 마법사들은 온갖 호들갑을 떨며 오닉스를 관찰하기 바빴다.
“닉스가 이상한 걸 먹었어요.”
"이상한 거라뇨?”
그런 동료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에셀리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무래도 밤마다 뭔가 사냥을 하는 것 같은데. 뭘 먹는지 모르겠어요.”
줄리엣은 걱정되는 점들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창문도 다 닫아 놨는데 아침에 보면 뭔가 입맛을 다시고 있고……. 괜찮을까요?”
“……줄리엣 양, 저는 수의사가 아닙니다.”
줄리엣이 코웃음 쳤다.
"드래곤을 마법사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고마워요.”
주접을 떠는 동료 마법사를 한 심한 듯 보던 에셀리드는 자포자 기하는 심정으로 말해 주었다.
“하지만 드래곤을 죽일 수 있는 독도, 저주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줄리엣은 이내 걱정스럽게 오닉스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걱정되잖아요. 차라리 쥐나 토끼를 잡아먹는 거면 괜찮을 텐데. 매일 아침 일어나서 보면 검고 투명한 뭔가를 먹고 있으니.”
“검고 투명한 뭔가……?”
“네, 꼭 그림자처럼 생겼어요.”
에셀리드는 물론이고, 잔뜩 호들갑을 떨던 다른 마법사들도 일제히 굳어 버렸다.
“왜요? 그게 뭔데요?"
줄리엣은 어쩐지 덩달아 심각해졌다.
"음, 그건…… 사념체 같은데요.”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마법사들이 입을 열었다.
“금지된 저주죠.”
“수백 년 된 신성력 저주입니다.”
“타락한 고대의 사제들이 사람을 멋대로 조종할 때 쓰던 ……."
“아니, 사념체가 매일 밤 방 안에 나타난다고요?”
그쯤 되자 에셀리드가 기막히다는 듯 펄쩍 뛰었다.
“누군가 줄리엣 양을 노리고 있잖습니까!”
'……그렇게 된 이야기랄까.'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에셀리드가 그렇게 말했을 때 단번에 떠오르는 대상이 기네스후작과 돌로레스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확했지.'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로 다음에 기네스 후작과 마주쳐 주절주절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줄리엣은 처음부터 최면 따위에는 걸린 적 없었다.
득의양양한 기네스 후작과 돌로 레스의 태도가 우스워서 조금 장단을 맞춰 주려던 것뿐인데…….
“설마 이런 것까지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네.”
어쩐지 수상하다 했다. 기네스후작이 하루아침에 마력석 광산을 소유하게 되었을 리가.
광산의 존재는 순 거짓말이고 마력을 가진 사람들을 납치해다가 마력석으로 만드는 게 틀림없었다. 에셀리드가 말해줬던, 인공적으로 마력석을 만드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초지종을 친절히 설명해 줄 이유는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이 가짜 마력석은 증거로 가져갈게요.”
줄리엣이 진홍빛 가짜 마력석을 집어 들면서 태연히 말했다.
"하……!”
그제야 퍼뜩 정신이 돌아온 솔론 추기경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 지금 네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말하는 게냐?”
그러자 후작의 수하들 역시 정신을 차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여자가 무슨 수로 최면에서 깨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기네스 후작가의 지하 감옥이었다. 연약한 몸으로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마 여기서 곱게 내보내 줄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 과연 그럴까?"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히익.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낀 후작의 부하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외쳤다.
“겨, 경비병!”
"아, 예. 지금 갑니다!”
쿠당탕.
어쩐지 경박한 목소리의 경비병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런데 달려온 기사들의 망토 색이…….
“.....… 검은색?"
솔론 추기경과 기네스 후작의 부하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보통 가문의 기사단들은 특정한 색의 망토를 입는다.
예를들어,검은색은 북부의…….
“주드 경!”
줄리엣이 짐짓 놀란 시늉을 하며 그를 꾸짖었다.
“망토도 갈아입었어야죠.”
“아차!"
주황색 머리칼의 젊은 기사가 철컹철컹 감옥의 문을 열어 주다 말고 과장되게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지금 시정하겠습니다, 아가씨!"
생글생글 웃으며 감옥 안으로 들어온 주드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후작의 부하에게 다가갔다.
퍽!
"윽!”
대뜸 주먹을 날리더니, 쓰러진 남자에게서 붉은 망토를 빼앗고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이러면 될까요, 아가씨?"
“주, 주드 헤이온?"
그제야 후작의 부하들은 상황을 파악했다. 이들은 칼라일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주드가 까르륵 웃었다.
“정답!”
그 말을 신호로 하듯 공작가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이놈들! 여길 봐라!”
눈치 빠른 솔론 추기경은 재빨리 감옥 벽에 딱 붙어선 다음 줄리엣을 인질로 잡으려고 했다.
팔랑.
“허억!"
그러나 푸른 나비들이 위협적으로 나타나자 솔론이 먼저 뒷걸음질 쳤다.
루체른에서 저 나비들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기억하는 솔론으로서는 아직 공포가 생생했다.
솔론 추기경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 하지만 후작님이 말씀하시길 분명 돌로레스가 네 힘을 빼앗았다고……!”
“아, 그건.”
줄리엣이 난처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좀 미안한 얘긴데.”
팔랑.
그녀의 손끝에서 날아오른 푸른 나비 한 마리가 애교스럽게 날개를 접었다 폈다.
“그거 가짜야.”
“뭐?”
“애초에 은열쇠를 넘긴다고 나비들의 소유권이 넘어가지도 않지만…….”
기네스 후작은 열쇠만 차지하면 될거라고 믿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나비들을 성가셔했던 시절에 줄리엣이 얼른 다른 사람에게 줘 버렸을 게 틀림없었다.
줄리엣은 옷깃 안쪽에서 진짜 은열쇠를 끄집어냈다. 돌로레스에게 빼앗긴 척 한 것은 정교한 모조품이었다.
수군수군.
황궁의 피로연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흘러 나왔다.
"......?"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반응에 기네스 후작은 잠시 당황했다.
방금 전, 기네스 후작은 자신 있게 외쳤다.
“제 양녀, 돌로레스는 사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정령사입니다!”
라고, 그런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후작?”
황제가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을구겼다.
“예?”
“지금 우리를 조롱하는 건가?"
피로연장 한가운데에 서 있던 기네스 후작은 당황했다.
“자네 양녀가 지금 뭘 하는지 보게!”
돌로레스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방방 손을 흔들고 있었다.
멍하니 그런 돌로레스를 보며 기네스 후작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는 보았던 것이다.
돌로레스의 손에서 수십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들이 반짝이는 날개를 뽐내며 날아오른 광경을….
“푸흡.”
연회장 내에 가득 찬 사람들이 킥킥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기네 스의 후작의 상념을 깨뜨렸다.
돌로레스는 정말로 제 손 안에 나비들이 있는 것처럼 아직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환술에 걸린 사람처럼.
'잠깐, 환술이라고?'
설마. 기네스 후작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계집이, 줄리엣 모나드가 환술을 걸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기네스 후작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어젯밤 줄리엣 모나드는 그의 최면에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돌로레스와 후작에게 환술을 건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래, 줄리엣 모나드는 그의 최면에 걸려서 칼라일 공작을 살해 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때였다.
바깥쪽 사람들이 술렁였다.
"음? 무슨 일이지?"
연회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황제가 체통도 잊고 벌떡 일어나 외쳤다.
“고, 공작!”
“예, 폐하.”
기네스 후작 역시 기절할 듯 놀랐다.
멀쩡하게 걸어 들어온 남자는 언제나처럼 재수 없는 낯짝의 레녹스 칼라일이었던 것이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