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저택으로 급히 돌아온 레녹스의 반듯한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줄리엣?”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줄리엣은 그에게도, 공작가의 기사들에게도 단 한마디 언질도 없이 연회장에서 저택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라진 그녀의 행방을 찾느라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아가씨는 먼저 돌아오셨습니다.”
집사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화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레녹스는 저택의 2층 침실에서 줄리엣을 찾아냈다.
“여기서 뭐해?”
불도 켜지 않았다.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서 또 사람 속을 태우더니.
그녀 자신의 침실도 아니고 심지어 그의 침실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잠시 문가에 선 채 줄리엣을 노려보았다. 지금 입을 열어 봤자 험한 말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줄리엣이 연회장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그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테라스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흰 커튼이 마구 나부꼈다.
“공작님."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줄리엣이 그를 돌아보았다.
"내려와.”
“왜요?”
“젠장. 위험하잖아.”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꼴을 을본 순간, 레녹스는 한달음에 그녀를 끌어내릴 듯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
춥지도 않은지 가운조차 걸치지 않은 줄리엣은 맨발에 종아리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네글리제 차림이었다.
“달이 예뻐요.”
그녀의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난간에 걸터앉은 줄리엣이 흰발목을 까딱거린 순간, 그는 미쳤냐는 말이 목까지 치밀었다.
휘영청 커다란 보름달은 예쁜게 아니라 괴기스러웠다.
"알겠으니까, 내려오라고.”
레녹스는 더 참지 못하고 줄리 엣을 억지로 끌어내렸다.
억센 손길에 줄리엣은 순순히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줄리엣이 비틀거리며 그를 밀치는 바람에 그들은 풀썩쓰러졌다.
“...…술 마셨나?" ”
어처구니없는 감정과 동시에 그는 줄리엣을 빨리 뜨거운 욕조에 집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몸이 차가웠다.
그러나 줄리엣의 뒷머리를 감싸안고 몸을 일으키려던 레녹스는 멈칫했다.
줄리엣은 추위에 떠는 동물처럼 품을 파고들었다.
“레녹스.”
"왜.”
“제가 한 번이라도 사랑한다고 말씀드린 적 있나요?"
순간 심장이 멎었대도 과장은 은아닐 것이다.
그 한마디는 둘 사이의 금기였다.
태연하게 수년간의 금기를 깨버린 줄리엣이 차분한 눈으로 물었다.
"만약 제가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전하는 제게 뭘 해 주실래요?”
“......뭘 원해?"
레녹스는 되묻는 제 목소리가 지나치게 갈급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를 붙는 손길부터가 탐욕스러웠다.
“제가 전하를 아주 예전에, 많이 사랑했었어요.”
줄리엣은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 손에 죽어 주세요.”
번쩍.
레녹스는 줄리엣이 치켜든 오른손에 쥔 것이 날이 선 단도라는 것을 알아챘다.
한심할 정도로 서툴고 느린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
다음날 아침.
며칠째 계속된 연회였지만 황궁은 아침부터 손님들로 북적였다.
결혼식을 앞두고 하객들이 계속해서 연달아 도착했기 때문이다.
"한데 칼라일 공작이 안보이는군.”
황제가 연회장을 힐끔거렸다.
“오늘 참석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글쎄 말입니다.”
기네스 후작은 조금 초조해하는 중이었다.
‘최면은 분명 제대로 먹혔을 텐데.’
칼라일 공작저 주변에 사람을 을잔뜩 심어 놓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아침이 다 되도록 후작이 애타게 기다리던 소식은 들려오칼라일 공작이 연인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소식 말이다.
'설마 실패했나?'
그렇다고 해도 칼라일 공작이 저를 찌르려 했던 여자를 살려 둘 리 없었다.
'그러면 살해당한 쪽은 줄리엣모나드인가? 흐음.’
기네스 후작은 잠시 주판알을 튕겨 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후작에게 나쁠건 없었다. 어차피 목표였던 줄리엣 모나드의 정령은 빼앗았다.
후작은 피로연장 한쪽에 있던 돌로레스와 눈이 마주쳤다. 돌로 레스는 은밀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밤, 줄리엣은 연회장을 떠나기 직전 나비 정령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최면에 걸린 줄리엣은 뭐든 묻는대로 비밀을 가르쳐주었다.
돌로레스 역시 후작이 어렵게 찾아낸 정령사인만큼 금방 능숙하게 나비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후작과 돌로레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돌로 레스의 손에서 파닥거리는 빛나는 나비 정령이 말이다.
"그리고 여차하면 칼라일 공작을 살인죄로 몰아가면 되니까.”
기네스 후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결투도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분명 큰 죄다.
7년 동안 연인이었던 여자를 치정 싸움으로 살해했다고 몰아가면 제 아무리 칼라일 공작이라고 해도 타격이 상당할 것이다.
그러면 그 틈을 타 기네스 후작가가 마력석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다.
후작은 칼라일 공작이 흔들리는 즉시 북부의 광산들을 매입할 계획을 준비해 두었다.
기네스 후작이 단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폐하!”
저 끝에서부터 헐레벌떡 황궁의 시종장이 달려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경사스러운 연회에 웬 소란인가?”
황제가 점잖게 눈살을 찌푸렸다.
"바, 방금 칼라일 공작저에서 소식이 왔는데……! 수도 경비대가……! 아니, 황실 경비대가………
피, 필요하다고!”
“거참! 천천히 알아듣게 말해 보게!”
“칼라일 공작이 살해당했답니다!”
*
줄리엣 모나드는 피투성이가 된 채 체포되었다. 그녀를 고발한 한 것은 다름 아닌 공작저의 가신들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타난 칼라일 공작의 비서가 그렇게 말했다.
“저희는 실리카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실리카의 권리는 대귀족 가문내에서 1급 살인이 벌어졌을 때, 공정한 판결과 중재를 위해 다른 대귀족 가문의 개입을 요구하는 행위였다.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모든 과정은 극비에 부쳐져,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고 모든 결론이 난 다음에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제가 맡겠습니다.”
“기네스 후작, 자네가?"
기네스 후작이 북부의 공작가를 얼마나 견제했는지 아는 황제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예, 그게 고인이 된 칼라일 공작을 위해서라도 도리일 듯합니다.”
"......"
황제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그도 딱히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기네스 후작은 명성있는 노귀족이다. 공작가 살인 사건에 개입할 수 있을 만큼 자격을 갖춘 대귀족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경사스러운 결혼식 중 아닙니까? 살인 사건의 조사로 들락거리면 신랑 신부와 하객들에게도 민폐가 될 겁니다.”
결국 황제는 줄리엣 모나드의 신병을 기네스 후작에게 넘겨주었다.
“좋네. 후작, 자네가 이 살인 사건을 조사하게.”
기네스 후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공작가에서 먼저 실리카중재안을 들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기네스 후작이야말로 자신이 먼저 나서서 그걸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중간에서 줄리엣 모나 드를 빼돌릴 수 있지.'
정령사의 자질을 갖고 있는 여자는 극소수다. 게다가 줄리엣모나드는 그가 모시는 '달리아님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는 여자였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후작님!"
아무리 실리카 법이 엄중하다고 한들 소문은 조금씩 새어나가기 마련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후작이 황궁을 나오기도 전에 발빠른 대귀족 몇몇이 후작에게 다가와 말했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칼라일 공작이 고작 정부의 손에 살해당하다니요!"
대충 애도의 말을 중얼거린 다음, 그들은 슬쩍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말입니다, 후작님.”
"기네스 후작가의 마력석 광산에는 저도 관심이 있습니다.”
“혹시 투자가 필요하시다면"
그들은 앞다투어 기네스 후작에게 투자하겠다며 나섰다. 일이 절로 풀리고 있었다.
후작은 점잖은 척 말했다.
“칼라일 공작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 이야기합니다. 그게 예의일 것 같소.”
줄리엣은 그 즉시 후작가 소유의 성으로 옮겨져, 황궁 경비병과 후작의 부하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수도 외곽에 위치한 후작성은 오래된 성이 그렇듯 지하 감옥을 가지고 있었다.
“수고했네. 여기서부터는 내가 인도하지.”
성의 지하에서 줄리엣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솔론 추기경이었다.
솔론은 평소와는 달리 멍한 표정의 줄리엣을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내 주술이 성공하다니!'
이렇게나 술술 일이 잘 풀릴 줄이야.
솔론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줄리엣을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갔다.
후작성의 지하 감옥은 수상쩍은 일을 벌이기에 적격이었다. 수백년 전처럼 전쟁 포로들을 넣어 놓는 용도는 아니었지만, 최근에는 수도에 공급하는 마력 석의 농도를 흐리게 가공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다.
지금도 감옥 안 테이블에는 작업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단단히 묶어 놔.”
“하지만 여자잖습니까. 묶을 필요까지 있을까요?"
“묶으라면 묶어!”
게다가 줄리엣 모나드는 표면적으로 칼라일 공작의 살인범이었다.
"헌데, 후작님은 이 여자를 어찌할 생각이실까요?”
"모르지. 혹시 아나? 마력석을 뽑아내는 곳으로 보내 '재료'로 만드실지도.”
“재료'라고요?”
아차.
솔론 추기경은 말실수를 깨달았다. 그때였다. 그들의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 역시. 그렇게 만든 거였구나.”
"......?"
뒤를 돌아본 솔론 추기경과 후작의 부하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몽롱한 눈으로 바닥에 꿇어 앉아 있던 여자가 태연하게 바닥에 떨어진 마력석을 주워 요리조리 빛에 비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