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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16화 (113/229)

116화.

며칠 뒤 저녁에 열린 연회는 결혼식의 전야제였다. 그런 만큼 참석한 손님들의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백작님!”

지난 며칠간 돌로레스는 줄리엣에게 부쩍 친근하게 굴었다.

“제가 평민이라 다른 귀부인들이 저를 멀리하세요.”

그런 말로 줄리엣의 동정을 사더니…….

“여자인데 백작이에요? 여자도 백작님이 될 수 있어요?”

“목걸이가 예뻐요."

“저, 모나드 백작님은 정령사이 시라고 들었어요.”

등등의 말로 줄리엣에게 관심을 표했다.

동행한 칼라일 공작이 황제에게 불려 간 사이, 여지없이 돌로레스가 그녀에게 다가와 샴페인 잔을 건네주었다.

“줄리엣 양, 피곤해 보여요.”

“네, 조금 나른하네요."

줄리엣이 작게 하품했다.

그런 줄리엣을 보던 돌로레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아뇨, 그냥 좀 졸려요."

“그럼 돌로레스랑 같이 휴게실로 가실래요?”

돌로레스가 상냥하게 권했다.

휴게실에는 몇몇 귀부인들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을 힐끔 확인한 다음 줄리엣이 지나가듯 물었다.

“돌로레스도 가 본 적 있나요?"

“네?”

"기네스 후작가 소유의 마력석광산 말이에요. 듣자 하니, 규모가 대단하다던데 …….”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아, 돌로레스는…….”

무심코 가 본 적 없다고 대답하려던 돌로레스는 말문이 막혔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남부의 광산 이야기가 나오자, 뜻밖에도 휴게실 안에 있던 모든 귀부인들의 이목이 쏠렸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줄리엣이 느긋하게 물었다.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돌로레스라면 가 본 적 없다는 게 이상한 일 아니겠어요?"

"무, 물론이죠.

돌로레스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러나 줄리엣의 질문은 끝이 아니었다.

“광산을 직접 보니 어때요?"

“돌로레스는 그런 얘기는 잘 몰라요. 사업 이야기는 너무 어려워요.”

“하지만 어려운 질문도 아니잖아요. 후작가의 광산도 마력석들로 마구 반짝반짝하던가요?"

"네, 네. 아주 예뻤어요.”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것 참 신기하네요. 광산의 마력석들은 가공을 거치기 전에는 돌멩이처럼 생겼던데."

"네?"

돌로레스는 그제야 말실수를 깨달았다.

“뭐, 사람마다 반짝인다는 기준이 다르겠죠.”

다행히 줄리엣은 싱긋 웃어넘겼다. 엿듣고 있던 다른 귀부인들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잠시 후에는 모두 자리를 떴다.

“그럼 쉬세요, 백작님.”

돌로레스 역시 줄리엣이 피곤한 듯 카우치에 기대어 눈을 감자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연회장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몇 분 뒤, 주변이 조용해 지기를 기다린 다음 돌로레스는 슬그머니 다시 휴게실로 돌아갔다.

고요한 휴게실에는 줄리엣과 돌로레스뿐이었다.

몇 분 사이에 줄리엣이 잠들었지만 돌로레스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까 전 돌로레스가 줄리엣에게 건네주었던 샴페인 잔 안에는 수면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돌로레스는 조심스레 줄리엣의 손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간 줄리엣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붙어 있던 결과, 돌로레스는 줄리엣이 은 열쇠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이곳에 넣어 두는 것을 훔쳐보았다.

'찾았다.'

찾던 물건을 발견하고 돌로레스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때였다.

“뭐 찾아요?”

챙강.

은 열쇠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너무 놀란 나머지 돌로레스가 열쇠를 떨어뜨린 것이었다.

“돌로레스 양, 남의 목걸이를 내던지면 안 되죠.”

줄리엣은 한숨과 함께 발밑에서은 열쇠를 주워들었다.

“주, 줄리엣 양.”

겁먹은 듯 돌로레스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저는 그냥…… 줄리엣 양에게 이걸 돌려 드리려고 했을 뿐이에요!”

“거짓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 정도에는 어린애도 안 넘어가겠다.”

줄리엣은 상냥하게 쏘아붙였다.

돌로레스는 어설픈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후작을 두려워하는 척하며 줄리 엣의 동정심을 산 것과는 달리, 돌로레스는 기네스 후작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기네스 후작은 걸핏하면 줄리엣이 실신할 때까지 매질을 했는데 돌로레스의 팔은 멍하나 없이 희고 깨끗했다.

후작가의 마력석에 대한 수상쩍은 점을 떠보기 위해 지금까지는 내버려 두었지만.

“그래, 대체 나한테서 열쇠를 를훔쳐낸 다음에는 뭘 하려고 했어요?”

그녀의 물음은 타당했다.

“기네스 후작은 이걸로 대체 뭘할 생각이래? 어차피 이걸 훔쳐 내 봐야”

“돌로레스 역시 정령사니까.”

그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기네스 후작.”

줄리엣은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지만 기네스 후작은 승리 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령사라뇨?”

“돌로레스는 내가 수년 만에 찾아낸 정령사다.”

뜻밖의 순순한 대답에 줄리엣은 그제야 후작이 왜 연기 실력이 형편없는 돌로레스를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독특한 파장을 가진 정령사는 극히 드문 존재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 후작 역시 모나드 백작가의 가보가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전생에서 스노우드롭을 빼앗아 간 사람이 후작이라는 그녀의 추리는 타당한 것 같았다.

“굉장히 자신만만하시네요, 후작님. 제가 소리를 지르기만 해도 바깥에서 사람들이 달려올 텐데요.”

"과연 그럴까?”

줄리엣은 기네스 후작의 태도가 의아했다. 그러나 후작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보름달의 주인은 누구냐.”

기네스 후작은 솔론에게 배운 대로 명령어를 말했다. 그와 동시에 흠칫 놀랐던 줄리엣이 눈을 의아한 듯 깜빡였다.

“너는 내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자 줄리엣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기네스 후작은 줄리엣의 시선이 흐릿해지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이제 기억난 모양이구나.”

쨍그랑.

줄리엣이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놓쳐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줄리엣은 위험한 것도 모르고 줄곧 멍한 무표정이었다.

“첫 번째 명령이다. 그 열쇠를 내놔.”

줄리엣은 뭐에 홀린 것처럼 곧장 목에 걸고 있던 진주 목걸이, 펜던트가 은 열쇠인 물건을 진주목걸이 채 넘겨주었다.

“드디어!”

그것을 받아 든 기네스 후작이 눈을 빛냈다.

“7년 전에 가스팔 남작 그 멍청이가 실수하지만 않았어도 훨씬 더 빨리 손에 넣었을 것을."

최면에 걸린 줄리엣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인형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받아라, 돌로레스.”

기네스 후작은 줄리엣의 은 열쇠를 돌로레스에게 건네주었다.

돌로레스는 기쁜 듯 열쇠를 받자마자 목에 걸었다.

“이제 저 여자의 정령이 제 거가 되는 건가요, 후작님? 네?"

“이런, 보채지 말거라, 돌로레스, 정령을 다루는 법은 줄리엣에 네게 차차 가르쳐 줄 게다.”

돌로레스를 진정시킨 기네스 후작이 다시 줄리엣에게로 돌아섰다.

“그렇지.”

가스팔 남작의 일을 떠올리니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잘 들어라, 줄리엣 모나드."

“네.”

“7년 전, 네 부모를 살해한 범인은 가스팔 남작이었다. 알고 있겠지?”

"네, 알아요.”

"가스팔 남작이 네 부모를 죽인건 이 열쇠를 탐내서였다. 누군가 가스팔에게 백작가의 가보를 훔쳐 오면 남부 해안의 별장과 평생을 먹고 살 돈을 주겠다고 했었지.”

순간, 줄리엣의 눈에 싸늘한 이 채가 돌았지만 상황에 취한 기네 스 후작은 보지 못했다.

“....… 네.”

“그리고 가스팔 남작에게 열쇠를 가져오라고 사주했던 배후는…….”

기네스 후작은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했다.

“칼라일 공작이었다."

“공작이 네 부모를 죽여 놓고 너를 구슬려 수 년 동안 너를 착취해 온 거다. 알겠지?”

“네.”

“그러니 오늘밤 너는 복수를 해야 한다.”

밤하늘에는 휘영청 보름달이 떠있었다.

"오늘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공작을 불러내라. 사랑 고백을 하든 몸으로 꾀어내든. 어떻게 방심시켜.”

기네스 후작은 날이 시퍼렇게 선 단도를 줄리엣에게 쥐여 주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심장에 이걸 찔러 넣는 거다. 그게 네 복수다.

알겠느냐?”

단도를 가만히 손에 쥔 줄리엣이 조용히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네, 후작님.”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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