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주드는 우뚝 멈춰 서서 기민하게 소리가 들려온 쪽을 파악했다.
“...…어떡할까요, 줄리엣 양?"
그렇게 묻는 주드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했다. 줄리엣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드는 그녀를 이끌고 비명이 들린 황궁의 후원으로 달려갔다.
물론 어디까지나 황궁 내부였으므로 두 사람 다 심각한 상황은 기대하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호위 기사에게 얼마쯤 끌려가다 후원의 잔디 위로 넘어진 줄리엣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진부한 광경이었다.
아리따운 아가씨 하나가 딱 봐도 불량해 보이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팔목을 붙잡혀 있었다.
‘하지만 여긴 황궁인데?'
딱 봐도 수상했다.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그러나 줄리엣이 말릴 새도 없이 예의 바른 호위 기사가 반사적으로 뛰쳐나갔다.
주드는 연약한 아가씨를 둘러싸고 희롱하던 한량들을 단번에 때 려눕혔다.
“으윽!”
“두고 보자!”
겁에 질린 아가씨가 구출되자 그녀를 희롱하던 남자들은 판에 박힌 대사를 치며 꼬리를 내뺐다. 연극을 본 것 같은 기분에 줄리엣은 박수라도 칠까 생각했다.
“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
“괜찮아요?”
그러나 울먹이는 아가씨는 줄리 엣이 아는 얼굴이었다.
'돌로레스?'
며칠 전 남부에서 보았던 기네 스 후작의 새 아내였다.
"어?"
돌로레스 역시 줄리엣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귀부인.”
“네.”
줄리엣은 그런 돌로레스를 찬찬히 관찰했다. 밖에서 보는 돌로 레스는 연약하고 순진해 보였다.
"아가씨의 친구십니까?"
“남부에서 만난 적 있는 사이 예요.”
“네, 맞아요! 저, 돌로레스를 기억하실 줄은 몰랐어요.”
돌로레스는 수줍게 말했다.
“여기서 뭐 해요?"
"아…… 돌로레스는 황자비 전하께 결혼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돌로레스는 들고 있던 자그마한 상자를 내보였다.
줄리엣은 그제야 며칠 전 남부에서 마주친 기네스 후작이 “수도에서 뵙겠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긴 기네스 후작쯤 되는 인물이 황자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귀족이 아니면 황자비전하의 살롱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요.”
주눅 든 돌로레스는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저 치들을 마주쳐서 시비가 걸렸다고요?"
“네, 돌로레스가 귀족이 아니라고 하니까 함부로 끌고 가려고…….”
"와아……, 그러셨군요."
줄리엣의 호위 기사는 말꼬리를 늘이며 웃는 낯으로 줄리엣에게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냈다.
줄리엣은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혹시, 줄리엣 양이 대신 황자비 전하께 전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러면서 돌로레스는 상자를 줄리엣에게 내밀었다.
그 상자를 물끄러미 보던 줄리 엣은 활짝 웃으며 거절했다.
"아뇨.”
"아…… 네? 왜요?”
“선물은 직접 전해야 의미가 있으니까요. 대신 살롱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시녀에게 말해 줄게요.”
줄리엣은 상냥하게 그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고, 돌로레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돌로레스가 떠난 직후, 호위 기사인 주드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 냈다.
“아까 그 허접한 연기력들 못알아보셨습니까?”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네, 기네스 후작가의 가신들이었죠.”
조금 전 돌로레스를 희롱하는 척했던 남자들은 기네스 후작 휘하의 하급 귀족들이었다.
“그런데 왜 모른 척하셨습니까?”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잖아요.”
줄리엣은 기네스 후작이 얼마나 악랄한 작자인지 기억했다.
“저렇게까지 연기력이 형편없는 배우를 쓰는 이유가 있겠죠.”
사실 줄리엣은 기네스 후작이 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돌로레스를 그녀에게 친밀하게 굴도록 보냈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황자비에게 선물을 대신 전해 달라니. 곧이곧대로 전해 주었다.
면 문제를 일으키고 중간에서 물건을 전해 준 줄리엣의 책임으로 몰아갈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줄리엣은 그런 얕은 수에 걸려 줄 생각이 없었다. 또한 후작의 꿍꿍이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실은 저도 기네스 후작에게 캐낼 게 좀 있거든요."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기네스 후작은 상대의 패를 보려고 사람을 붙일 때는 자신의 의패 역시 노출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
며칠 뒤, 늦은 밤.
쥐죽은 듯 고요한 공작가의 침실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림자 틈에서 꾸물거리던 형체 하나가 툭 튀어나온 것이다.
사람의 그림자를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반투명한 검은 그림자였다.
흑마술로 만들어진 그것은 팔다리까지 달려 있었고, 아주 기초적인 상황 인지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솔론 추기경이 보낸 사념체였다. 작고 검은 사념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렵지 않게 목표물을 찾아냈다.
사념체는 사냥감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침대 가까이도 가기 전에.
......?
버둥거리던 사념체는 위에서 나타난 뭔가에 의해 행동을 저지당했다.
호박처럼 노란 한 쌍의 눈동자가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념체는 사악한 힘으로 만들어졌다. 평범한 짐승이라면 사념체를 건드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날랜 고양이처럼 발소리도 없이 다가와 턱 하고 앞발을 얹은 정체불명의 생물체는 어둠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고양이?
아니, 족제비인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금지된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만큼 사념체는 미약하게나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파지직!
직!
스파크가 일었다.
“삐약?"
그러나 새카만 몸체의 생물은 놀라기는커녕 익숙하다는 듯 폴짝 뛰더니 이내 본격적으로 사냥자세를 취했다.
잠시 후.
오닉스는 입에 수상한 것을 문채 신이 나서 밖으로 쫄랑쫄랑 나왔다.
“?”
그러나 복도를 신나게 빠져나온 새끼 용은 복도 끝, 응접실 의자에 태연히 앉아 있던 인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난 며칠간 오닉스가 사냥한 것을 먹어 치우던 바로 그 자리였다.
“……꾸륵.”
놀란 나머지 새끼 용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그대로 삼켜 버릴 뻔했다.
오닉스는 작은 머리로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눈을 도르르 굴리며 인간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마수의 왕다운 눈치로 새끼 용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호박색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잔을 들고 있던 남자는 무표정으로 오닉스를 응시했다.
그러나 물끄러미 새끼 용을 보던 남자가 뜻밖에도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리 온.”
“삐이…….”
갈등하던 새끼 용은 슬금슬금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인간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이 술잔뿐이 아님을 깨달았다.
인간 남자가 느긋하게 내민 것은 탐스럽게 익은 사과였다.
고민은 짧았다.
오닉스는 냉큼 테이블 위로 올라가 입에 문 것을 내려놓고 빨간 사과를 받아 물었다.
탕.
새끼 용이 입에 문 것을 테이블위에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손이 유리잔을 뒤집어 작고 까만 그림자를 그 안에 가뒀다.
유리잔 안의 물체를 한참 쳐다보던 남자가 두 개째 사과를 던져주었다.
“제법 기특한 짓도 하는군."
“빡!”
다음날, 아래층으로 향하던 줄리엣은 영 수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별채의 응접실에서, 검은 새끼 용이 레녹스의 발치에서 태평하게 갸르릉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다. 저 둘이 저렇게 사이가 좋을 리 없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던 줄리 엣과 레녹스의 눈이 마주쳤다.
“전하."
“보석상을 불렀던데."
"네. 세공사에게 주문한 물건이 있어서요.”
레녹스는 굳이 줄리엣이 주문한 물건이 뭐냐고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그는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정확히는 줄리엣의 드러난 흰목덜미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지난밤에도 그는 어김없이 정체 모를 여자가 등장하는 꿈에 시달렸다.
악몽 속 여자는 보는 사람이 절로 안쓰러워질 정도로 작고 마른 뒷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심한 매질을 당한 것처럼 등이 상처투성이였다.
여자의 등을 떠올리던 레녹스는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그 덕에 잠을 못 이루다가, 우연히 재밌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새끼 용이 푹신한 카펫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