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14화 (111/229)

114화.

*

“어머, 오셨군요.”

“모나드 영애…… 아니, 백작님.”

별관에 모여 있던 낯익은 얼굴게 반겼다.

의 귀부인들이 줄리엣을 애매하 몇몇은 허둥거리며 눈을 피하기도 했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까지 칼라일 공작이 한바탕행패를 부린 여파가 남아 있었다.

줄리엣은 적당히 싱긋 웃어 주었다.

사실상 결혼식 준비를 한다는 건 명목일 뿐이고 이 자리는 친분을 다지기 위한 자리에 가까웠다.

줄리엣과 눈이 마주친 파티마는 잠시 어색하게 눈짓을 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최대한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하객 배치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입장 순서는…….”

귀부인들은 예비 황태자비를 둘러싸고 저마다 상냥하게 이것저것 거들었다. 그런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인 파티마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이 자리에서 신부에게 잘 보이면 메이드 오브 아너, 들러리 중 가장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황자비의 메이드 오브 아너는 꽤 훌륭한 타이틀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 타이틀에 관심이 없었다.

결혼식 당일에 쓰일 꽃의 종류며 리본의 색, 하객 배치까지 중요한 것은 모두 예비 황태자비의 최측근들에게 맡겨졌다.

들러리 후보들이 파티마의 곁에서 열심히 의견을 나누는 사이 줄리엣에게 맡겨진 것은 선물 포장에 쓰일 리본을 만드는 일이었다.

사실상 누가 해도 상관없는 단순노동이었지만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저…… 모나드 백작님. 이건 저희가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황궁 시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다가왔지만 줄리엣은 느릿하게 손을 놀렸다. 손재주가 별로 없는 편이라 오래 걸렸다.

칼라일 공작저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이라 저택에 남아있기 어색했다.

기네스 후작가와의 마찰이 길어지는 모양인지, 공작가의 행정관료들은 모두 험악한 인상을 쓰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기네스 후작가의 마력석이 대체 뭐가 문제인지 상황을 얘기해 주지도 않고,

“그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야.' 레녹스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 딱히 도와줄 명분도 방법도 없어서, 줄리엣은 차라리 잡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이곳이 더 마음 편했다.

'기네스 후작이 왜 갑자기 마력 석 광산을 손에 넣었을까?' 줄리엣은 생각에 잠겼다.

그건 그녀가 경험했던 전생의 의삶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전생에서 기네스 후작은 마력석을 독점하고 있던 북부에 원한이 깊어 사사건건 음모를 꾸몄고, 결국은 영지전 끝에 패배해 공작의 손에 살해당한다.

‘하지만 지금 기네스 후작은 살아 있지.'

과거 대로였다면 몇 년 전에 죽었어야 하는데.

뭐, 과거와 달라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 후작이 살아 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갑작스레 남부에서 마력 석 광산이 발굴되었단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광산은 하루아침에 뿅 하고 발굴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광산을 손에 넣었지?

줄리엣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예비 황자비의 주변에서는 심상치 않은 대화가 오갔다.

“황제 폐하께서 결혼식 당일에는 진귀한 마수도 데려오시겠다고 하셨어요.”

파티마가 자랑하듯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두 분 폐하께서 벌써부터 파티 마 양을 몹시 아끼시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황궁 마법사들 대신 다른 마법사들을 더 고용하셨다죠?”

“무려 메리골드상단의 마법사들을 데려오시다니요!"

‘어디의 마법사라고?' 순간 불길함에 줄리엣이 고개를 드니 파티마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불안해하는 것은 줄리 엣뿐이었다.

“황자비 전하, 마법사님들이 오셨어요!”

“안으로 모셔요!”

줄리엣이 도망칠 틈도 없이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누가 봐도 마법사라고 써 붙인 것처럼 화려한 로브를 걸쳤다.

궁정 마법사들에 비하면 훨씬 젊어 보이는 남녀들이었지만, 마법사답게 하나같이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제국 귀족들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들은 도도하게 고개를 한 번 까딱했을 뿐이다.

그리고 줄리엣은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줄리엣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움찔했다.

'에셀리드?'

줄리엣은 그제야 왜 어제 에셀리드가 황궁에 간다고 했을 때 그토록 이상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메리골드상단과 줄리엣의 관계는 아직 수도 사교계에 알려진 바 없었다.

루체른 사건 이후 줄리엣의 외할아버지인 리오넬 르바탄이 철저히 입막음을 시켰기 때문이다.

“마법사님들은 어떤 마법을 보여 주실 건가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귀부인들이 물었다.

“다들 고대하고 있답니다. 궁정마법사들의 불꽃놀이는 정말 근사하거든요.”

그러나 마법사들의 태도는 다소 시건방졌다.

“하, 저희는 그깟 시시한 불꽃놀이를 보여 드리러 온 게 아닙니다.”

"물론이죠. 마법이라 함은 자고로 우주의 원리에 통달한 것으로…….”

에셀리드를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놓았다.

마법사들에 대해 면역력이 없는 귀부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대충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뭘 보여 줄지 궁금하니 기다려 보자.'라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그건 우리 친구인 에셀리드가 설명해 드릴…. 에셀?"

잔뜩 거드름을 피우던 마법사하나가 팔꿈치로 에셀리드의 명치를 툭 쳤다.

“너 뭐 해?”

다른 마법사들이 주절주절 잘난 척 서론을 늘어놓는 동안 에셀리 드는 줄리엣을 향해 필사적인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컥! 아…… 뭐라고?"

에셀리드는 재빨리 점잖은 척 표정을 갈무리하고 시침을 뗐다.

그러나 그의 마법사 동료들은 눈치가 꽤 빠른 편이었다.

그들은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여자를 발견했다.

“모나드 백작님!”

때마침 어느 마음 착한 귀부인 이 줄리엣을 불러 세웠다.

“이리 와서 저희랑 같이 마법구경해요!”

파티마 역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줄리엣 양. 이리 와서 같이 구경해요. 리본은 나중에 하고.”

그러자 네 명의 마법사들 중 가장 연장자인 듯 보이는 남자가기막히다는 듯 말했다.

"허!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귀부인들, 마법은 신성한 거라 절대 구경거리로 삼아서는 안되는…….”

주절주절 다시 설교를 늘어놓던 마법사는 멈칫했다. 그의 시선은 애매하게 팔을 붙잡힌 여자를 향해 있었다.

“방금, 뭐라고?

모나드백작…. 줄리엣?”

에셀리드를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의 안색이 돌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새끼 용을 보겠답시고 상단에 위장 취업까지 감행했다더니. 과연 하나같이 성격이 보통 아니게 생겼다고 줄리엣은 생각했다.

화려한 로브를 걸치고 나타난 마법사들은 단번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법만큼 훌륭한 구경거리가 어디 있다고요! 안 그렇습니까?"

“의뢰인을 즐겁게 하는 게 저희의 본분이지요!”

조금 전까지와는 퍽 다른 어조였다.

펑!

“어머나!"

녹색 로브를 걸치고 있던 여자의 손에서 흰 비둘기들이 날아오른 것을 시작으로, 다른 세 마법사들은 앞다투어 화려하게 개인기를 어필했다.

“뭘 더 보여 드릴까요?"

경쟁적인 재롱 잔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야 인마, 에셀!”

“너도 잘하는 거 해 봐! 그거, 불 뿜는 거!”

에셀리드는 떠밀리듯 일어나 마지못해 손을 휘저었다.

불은 아니고 불 뿜는 용 모양의 비눗방울들이 뿅뿅 허공에 나타나 영롱한 무지개를 쏘아 냈다.

“세상에!”

“이런 건 처음 봐요!”

살롱 안에 모여 있던 귀부인들은 손뼉을 치며 더없이 즐거워했다.

그러기를 한참. 더 이상 써먹을 레퍼토리가 없는지 마법사들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들 중 하나가 간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저, 그럼 이제 새끼 드래곤…….”

“잘 봤어요!”

줄리엣이 싱긋 웃으며 그들의 말을 막았다.

“자, 잠시만요!”

“다른 것도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뭘 한단 말인가.

마법사들은 아무래도 자기들이 고용된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린게 틀림없었다.

귀부인들은 마법사들의 재롱에 에더없이 즐거운 눈치였지만 유일하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파티 마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잠시 실례할게요."

“귀, 귀부인!”

줄리엣은 마법사들이 다른 귀부 인들에게 둘러싸인 틈을 타서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왔다.

“오?”

밖으로 나오니 바닥에 주저앉아 하품을 하던 주드가 줄리엣을 보고 씩 웃었다.

“왜 벌써 나오십니까?"

“집에 가요.”

"네? 지금요?”

“빨리. 불 뿜는 마법사가 쫓아 와요.”

“예? 우리 마차는…….”

"버려요.”

줄리엣은 막무가내로 주드를 끌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이 막 별궁을 빠져나왔을 무렵이었다.

“꺄악!”

별안간 가녀린 비명이 들려왔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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