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기네스 후작은 몹시 만족스러웠다. 솔론 추기경이 시현한 주술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줄리엣 모나드를 대상으로 주술을 걸기 전, 그들은 후작이 사들인 노예 몇 명을 대상으로 시험 삼아 주술을 걸어보았다.
“기본적으로 최면술입니다.”
고문용 의자에는 커튼을 사이에 두고 노예 두 명이 나란히 묶여있었다.
“잘 보십쇼.”
바닥에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
넣자 그 한가운데서 작고 검은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
후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것은 검은 그림자였다. 반투명하고, 실제 사람의 것보다 훨씬 작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람 그림자와 비슷했다. 팔다리까지 달려 있었다.
“이건 사념체입니다.”
솔론 추기경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설명했다.
“이걸 저 실험체의 몸에 집어넣을 겁니다.”
"읍! 으읍!”
그 말을 들었는지, 한쪽 구석 의자에 묶여 있던 남자가 겁에 질려 몸을 뒤치기 시작했다.
작은 그림자처럼 생긴 사념체는 스멀스멀 묶여 있는 실험체에게로 다가가더니 그의 그림자 안으로 쏙 사라졌다.
"......!"
그와 동시에 묶여 있던 남자는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졌다.
“이게 끝인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
기네스 후작이 영 미심쩍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아직 사념체를 하나만 주입해서 그렇습니다. 이 주술에는 최소 사흘, 최대 일주일의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솔론 추기경은 개의치 않고 설명했다.
많아질수록 완벽한 지배가 가능
“즉, 집어넣는 사념체의 숫자가나 환청이 들리는 정도지만 일주합니다. 처음에는 몸이 나른하거일 뒤에는 완전한 최면 상태가 될 겁니다.”
솔론 추기경은 날짜를 헤아렸다.
“특히나 보름달이 뜨는 밤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하지요.”
주술에 보름달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념체를 집어넣는 과정을 며칠 밤 반복하다 보면-”
펄럭.
커튼을 젖히자 그 옆에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는 또 다른 노예가 앉아 있었다.
그는 조금 전의 실험 대상에 비해 유달리 무표정했다.
눈은 흐리멍덩하고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듯 보였다.
“이렇게 완전한 최면 상태가 됩니다.”
“그럼 이제 내가 명령하면 되나?”
“아직입니다! 주문…… 그러니까 명령어를 말해야 후작님을 주인으로 인지하게 되지요."
솔론 추기경은 재빨리 명령어를 적은 종이쪽지를 북 찢어 후작에게 건넸다.
기네스 후작은 조잡한 쪽지를 보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종이에 적힌 그대로 했다.
그는 따악, 손가락을 한 번 튕긴 다음 주문을 읽었다.
"누구냐?”
“보름달의 주인이
……이렇게 읽으라고?"
그그극.
그러자 놀랍게도 시체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던 왼쪽의 노예가 머리를 들어 후작을 바라보았다.
“예, 이제 후작님이 명령하시는 어떤 것에는 따를 겁니다.”
솔론 추기경의 대답에 잠시 턱을 문지르던 기네스 후작이 명령했다.
“일어나라.”
투두둑.
덜컹.
그러자 분명 묶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받은 노예는 구속구를 가볍게 부수고 일어났다.
“허어.”
그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관찰하던 후작이 바닥에 단검을 내던졌다.
“이걸로 저걸 죽여 봐라."
그 명에는 솔론 추기경조차 움찔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노예는 지체 없이 떨어진 칼을 집어 들고 의식을 잃은 다른 노예에게로 다가갔다.
"흐윽!”
재갈이 물린 채 의자에 묶여 있던 남자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완전히 최면 상태에 빠진 노예의 칼이 그의 목을 노렸고 순식간에 피가 솟구쳤다.
“크하핫! 좋아, 이거라면 틀림없이 통하겠군!”
피가 고인 지하실에 서서 기네 스 후작은 몹시 기뻐했다.
“잘했네, 솔론. 분명 달리아 님께서도 기뻐하실 걸세.”
“과, 과찬이십니다."
솔론 추기경은 억지로 웃었다.
'도대체 달리아 님이 누구야?'
솔론은 아직도 후작이 저토록 맹목적으로 따르는 그 젊은 여자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태연히 실험 대상을 죽이라고 지시하는 후작의 잔혹함은 확실히 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기네스 후작의 배후인 달리아라는 여자 역시 평범한 여사제는 아닌 게 분명했다. 이런 짓을 사주하는 걸 보면.
“이제 잘만 하면 공작 놈의 목숨을 끊어 놓을 수 있겠군.”
기네스 후작의 속셈을 알아챈솔론 추기경은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줄리엣 모나드를 이용해 칼라일 공작을 죽이시려고요?”
“당연한 거 아닌가!"
“하, 하지만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이건 그저 최면술이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거나 하진 않습니다.”
후작의 눈치를 살피며 솔론 추기경은 조심스레 말했다.
“줄리엣 모나드는 그냥 평범한 여자잖습니까. 설령 공작이 방심하고 있을 때 몰래 뒤에서 찌른다 해도…… 공작을 죽이진 못할 겁니다.”
줄리엣이 최면에 걸린다고 한들 공작이 쉽게 죽어 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허허, 자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죽는 게 어느 쪽이든 상관없네.”
“예?”
기네스 후작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게. 제가 사랑하던 여자의 칼에 찔려 죽는 것과 그 여자를 제 손으로 죽이는 것. 뭐든 고통스럽지 않겠나?"
그렇게까지?
솔론 추기경은 칼라일 공작에 에대한 후작의 원한이 몹시 깊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니 계획에는 차질 없겠지?”
기네스 후작이 묻자 솔론 추기 경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
“무, 물론입니다. 이 사념체의 존재를 감지하고 막아 낼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요.”
줄리엣은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옷장을 닫고 돌아서다 침대 아래 비죽 튀어나온 수상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 닉스?”
까만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찹찹.
침대 아래 고개를 처박고 엉덩이만 비죽 밖으로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한데 소리까지 심상치 않았다.
‘설마..'
소리를 죽이고 다가간 줄리엣은 뭔가에 열중해 있던 새끼 용을 덥석 들어 올렸다.
"닉스!”
“빡!”
덩달아 화들짝 놀란 새끼 용이 비명을 질렀다.
"너 뭘 먹고 있는 거야?"
“먀악?”
줄리엣에게 몸과 앞발을 붙들려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 오닉스는 재빨리 세상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호박색 눈을 끔뻑였다.
“도대체…….”
의심의 눈초리로 새끼 용을 훑어보던 도중, 줄리엣은 새끼 용의 입가에 검고 반투명한 무언가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것을 떼어 주려고 손을 가져간 순간.
낼름.
오닉스가 재빨리 분홍색 혀로 입 주위를 싹 핥아 버렸다.
“........"
그러더니 삐약삐약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며 저를 쓰다듬으라고 애교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 아무거나 막 주워 먹으면 안 돼.”
“빡!”
마지못해 당부한 다음 줄리엣은 새끼 용을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못내 걱정스러웠지만 토해 내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쩐지 새벽 내내 부스럭거리며 깨어 있는 것 같더라니.'
줄리엣은 새끼 용이 사냥 놀이를 하는 것 같다고 의심했다.
줄리엣은 어쩔 수 없이 엘리엇에게 새끼 용을 잘 지켜봐 달라고 부탁한 다음 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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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 올라 황궁으로 가는 동안 줄리엣은 창밖의 모습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어수선하죠?"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호위 기사 주드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수도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어수선했던 것이다.
“네, 결혼식이 도움이 되긴 하겠네요.”
새해 첫날부터 황궁의 호수가 붉게 물들었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이종족이 황제의 숲에서 발견되는 둥, 연초부터 뒤숭숭한 일들이 끊이질 않아 여론을 잠재우려고 2황자의 결혼 날짜를 앞당긴 듯했다.
2황자와 파티마 글랜필드의 결혼식은 본래 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줄리엣이 황궁으로 불려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결혼식 준비를 하면서 귀족 가문의 여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흔한 관례였다.
하지만 황궁의 별관으로 향하면서 줄리엣은 예비 황자비인 파티 마가 자신을 부른 것이 과연 그녀의 의지였을까 궁금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