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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12화 (109/229)

112화.

기네스 후작은 영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카락?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

그러나 솔론 추기경은 자신 있게 검은 책을 펼쳤다.

“장난이라뇨! 이건 수백 년 전 금서로 지정된 주술서입니다."

이런 위험천만한 주술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가짜 법황이 이단 심문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고매한 성직자들 중에서도 어두운 주술에 심취해 나쁜 쪽으로 빠지는 이들은 항상 있었다.

파라락.

책장이 넘어가고 솔론이 손가락으로 한곳을 척 가리켰다.

어쩐지 섬뜩한 삽화가 그려진 페이지였다. 보름달 그림 아래, 목이 매달린 사람과 낫을 든 해골이 그려져 있었다.

일명 보름달의 주술.

“이건 제바스티안의 인형 따위와는 다릅니다. 철저하고 확실하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주술이죠.”

솔론은 추기경인 만큼 상당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네스 후작은 주술 의식에 필요한 귀한 재료를 뭐든 구해다 주겠다고 했다.

물론 이 검은 책에 나오는 주술은 몹시 위험했다.

주술은 기본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걸어야 했다. 만약 주술이 실패하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주술을 행한 사람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솔론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후작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서든 줄리엣 모나드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든지.

또한 솔론이 굳이 보름달의 주술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성공만 한다면, 그 여자는 우리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될 겁니다.”

기네스 후작은 솔론이 가리킨 페이지를 쳐다보았지만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섬뜩한 그림뿐이었다.

기네스 후작은 고대 문자를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실패할 리 없습니다. 이건 어떤 신성력이나 마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고대의 주술입니다.”

후작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나도 주술에 관해서는 조금 들어서 아는데, 푸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주술은 없다고 들었네.”

후작의 지적에 솔론 추기경은 히죽 웃었다. 솔론이 이 주술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이 더 이상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기네스 후작은 조금 흥미를 느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모든 주술에는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도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것만큼은 예외입니다.”

솔론 추기경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실실 흘렸다.

“이 주술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이미 수백 년 전에 멸종했기 때문이지요.”

즉, 막을 방도가 없으니 실패할 수가 없는 주술이란 뜻이었다.

"그런 고로, 줄리엣 모나드라는 여자는 이제 우리 손에 들어온거나 다름없단 말씀입니다.”

**

“법황청의 추기경이라고?"

“예, 게다가 수배자 신세랍니다.”

“그런 새끼가 기네스 후작 옆에 붙어서 뭘 하는 거지?"

미간을 찌푸린 레녹스가 가운을 몸에 걸치며 지시했다.

“당장 없애.”

“예.”

수도로 돌아온 레녹스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후작에게 붙어 있던 성직자의 정체였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그의 기억이 맞았다.

기네스 후작이 줄리엣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수상한데, 그 옆 옆에 루체른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추기경이 붙어 있는 건 더 꺼림칙했다. 그리고 그의 나쁜 촉은 무섭도록 들어맞는 편이었다.

줄리엣이 알기 전에 후환을 없애야 했다.

공작의 명을 받은 기사가 물러 가자, 성실한 주치의가 재빨리 물었다.

“전하, 정말 불면증 외에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래.”

레녹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칼라일 공작이 진찰을 허락하는 것은 오직 줄리엣 모나드가 자리를 비웠을 때뿐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주치의는 줄리엣이 외출한 틈을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달려와 공작의 상태를 확인했다.

공작가의 주치의는 그가 아무리 상태가 멀쩡하다고 말해도 그럴 리가 없다며 부작용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고 그를 귀찮게 했다.

“그럼 수면제를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

레녹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불면증의 원인은 그가 장 잘 알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가 나오는 꺼림칙한 꿈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짤막한 꿈이었는데 최근에는 시도 때도 없이 그를 괴롭혔다.

'악령에라도 씐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레녹스는 어이가 없어 픽 웃어 버렸다.

“악령이라니.”

꿈속의 여자가 그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전에 비해서 그 여자가 등장하는 꿈이 다채로워졌다는 게 문제였다.

처음에는 침실에 앉아 울기만 하더니, 이제는 다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뒷모습이나 마구 간을 거니는 등 레퍼토리가 늘어났다.

바로 직전에 꾼 꿈에서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앙상한 여자의 의등은 어울리지 않게 상처투성이였다.

여자의 정체는커녕 맥락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단편적인 장면 뿐이었다.

그러나 의미 모를 꿈을 꾼 다음이면 별다른 이유 없이 이따금 심장이 옥죄는 듯 답답해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레녹스가 한참 만에 물었다.

“줄리엣은 어디 있지?”

*

줄리엣은 수도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곧장 새끼 용을 데리러 백작저로 향했다.

“삐약!"

몇 주 만에 만난 오닉스는 구슬프게 삐약거리며 한동안 줄리엣의 옷자락에 매달려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데 줄리엣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새끼 용뿐만이 아니었다.

"에셀리드?”

"오랜만입니다, 줄리엣 양.”

메리골드 상단의 마법사, 에셀리드가 화려한 로브를 차려입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엣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걱정 마세요. 줄리엣 양 보러 대륙을 횡단한 건 아니니까요.”

에셀리드는 상단의 일 때문에 수도에 왔다가 줄리엣을 만나러 백작저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할아버지랑 숙모님은 잘 지내세요? 테오는요?”

안부를 묻는 줄리엣에게 에셀리 드는 두툼한 편지들을 건네주었다.

"어르신께서 보내신 겁니다.”

"아.”

줄리엣이 편지를 읽는 동안 오닉스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빡?”

고작 몇 주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오닉스는 제법 자라 있었다.

그래 봤자 좀 큰 고양이 크기에 불과했다. 예전에는 줄리엣의 무릎 위에서 뒹구는 게 가능했지만 지금은 몸을 조금만 뒤척여도 아래로 고꾸라졌다.

“딱!"

물론 새끼 용은 이걸 전혀 이해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닉스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몸을 동글게 마는 것으로 타협하고 만족스러운 듯 꾸르륵거렸다.

줄리엣이 다 읽은 편지를 접어 넣자 에리드가 말했다.

“앞으로 저는 몇 주간 수도에 머물 예정이니 답장을 주시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흠흠, 그런데 말입니다, 줄리엣양.”

에셀리드는 용건이 끝났는데도 어쩐지 주저하다가 물었다.

“혹시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온 적은 없었지요?”

“이상한 사람들이라뇨?”

“그게…… 놀라지 마시고 들으세요.”

에셀리드의 설명은 그러했다.

그와 함께 수도에 온 상단의 마법사가 몇 명 있는데, 그들은 에셀리드의 소개로 최근 상단에 들어온 마탑 출신이라고 했다.

“아니 그런데 이 미친 마법사놈들이 어떻게든 새끼 드래곤을 봐야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애초에 상단에 합류한 목적이 그거였을 거라고 에셀리드는 분통을 터뜨렸다.

어쩐지 좀 수척해 보이더라니.

에셀리드는 수도까지 오는 내내 새끼 용을 보게 해 달라며 조르는 동료 마법사들에게 시달린 듯했다.

그러고 보니 루체른에서 돌아온 직후 에셀리드가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마탑의 극소수 마법사들 사이에서 줄리엣과 새끼 용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고.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했었지.

하지만 정작 에셀리드 본인이 그런 마법사들을 데리고 올 줄이야.

“그 마법사들한테 닉스를 보여 줘도 괜찮을까요?”

줄리엣이 묻자 에셀리드는 재빨리 만류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아니, 저는 오히려 거절하시라고 권하고 싶군요.”

“왜요?”

에셀리드는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바동거리는 새끼 용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가끔 환상은 환상으로 남겨 두는 게 더 쓸모 있으니까요.”

귀엽다는 걸 제외하면 저 마수의 존재 의미는 뭘까요,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줄리엣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에셀리드, 혹시 내 편지 받았어요?”

“아, 그 '스노우드롭' 말씀이시죠?”

“네.”

남부로 떠나기 직전 줄리엣은 에셀리드에게도 편지를 보냈었다.

'스노우드롭'이란 이름에 대해 찾아 줄 수 있냐고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꽃 말고,

에셀리드는 마탑에서 파문당하긴 했지만 아직 마탑의 마법사들과 친분이 있으니까.

어쩌면 정보 길드도 알아내지 못한 내용을 알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에셀리드는 하품하며 대답했다.

“마탑에 계시는 저희 스승님께 부탁드려 놓았습니다. 답이 오는 대로 전해 드리지요.”

“고마워요.”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어쨌든 당분간 닉스는 저랑 지낼 테니까, 에셀리드의 마법사동료들과 마주칠 일은 없을 거예요.”

줄리엣은 바동거리는 오닉스를 뚜껑이 달린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저도 내일은 황궁에 가요.”

“황궁에…… 가신다고요?"

“네. 왜요?”

그러자 에셀리드의 표정이 매우 괴상해졌다.

내일은 2황자와 파티마 글랜필드의 결혼식 전 모임이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참석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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