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11화 (108/229)

111화.

“이런. 칼라일 공작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좌석 바깥쪽이 시끄러워지더니, 누군가 휘장을 걷고 인사를 건네왔다.

“남부에는 무슨 행차십니까?”

머리가 희끗한 노귀족이었다.

나이에 비해 허리가 곳곳하고 옷차림이 화려했지만 눈매는 뱀처럼 예리했다.

레녹스는 다짜고짜 다가와 인사를 건넨 노귀족을 보고 고개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기네스 후작.”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이거 영광이군요.”

기네스 후작이 너스레를 떨었다.

남부의 노귀족은 수행원을 잔뜩 달고 왔는데, 여러모로 시선을 을끌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경마장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기네스 후작이 북부의 공작가를 원수처럼 여긴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한데 동행하신 숙녀분은…"

후작의 시선이 줄리엣에게로 옮겨갔다.

"모나드 백작 영애셨군요?"

기네스 후작은 짐짓 놀란 시늉을 했다.

“안녕하세요, 기네스 후작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연기였다.

“역시 소문이란 건 믿을 게 못되는 모양입니다. 수도에서 심상찮은 이야기가 들리기에.”

후작은 노골적으로 줄리엣을 훑어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모나드 영애가 드디어 안타까 까운 일을 당한 줄 알고 이 늙은이의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줄리엣이 싱긋 웃었다.

“그런가요? 저는 후작님의 양아드님이 앓아누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답니다.”

빠각.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노후작이 이를 악무는 소리를 들었다.

“실례지만 제 아들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줄리엣 양?"

"어머, 모나드 백작이라고 불러 주세요.”

줄리엣이 대놓고 생글거렸다.

“몇 달 전 신전에서 아드님을 뵈었답니다. 약혼녀의 앞에서 제 손목을 더듬으시기에 그러지 말라고 충고 드렸지요.”

“....… 그러셨군요."

기네스 후작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생글거리는 줄리엣을 보던 레녹스의 눈매 역시 사나워졌다.

'누가 누굴 더듬어?'

레녹스는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줄리엣이 며칠 전 푸실리자작을 왜 그냥 놓아주었던 것인지 이해했다.

푸실리 자작에게 환각을 보여준 다음 돌려보내면 후작이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건 줄리엣이 예상했던 바였다.

왜냐면 몇 달 전, 줄리엣은 그의 양아들에게도 같은 걸 보여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카스퍼 백작.’

자식이 없는 기네스 후작은 먼 친척을 양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신전에서 줄리엣의 손목을 붙들고 추파를 던지다 줄리엣의 신경을 긁어놓은 멍청이가 바로 후작의 양아들이었다.

신전에서의 사건 이후 카스퍼백작이 벌벌 떨며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줄리엣이 일부러 기네스 후작을 불러냈다는 것까지는 레녹스 역시 짐작하는 바였다.

기네스 후작은 굳이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도 않았다.

"다음엔 수도에서 뵙겠군요. 아, 그렇지.”

불쾌한 듯 쌩하니 나가려다 말고 기네스 후작은 마침 생각났다.

는 듯 자신의 뒤쪽에 서 있던 수행원들 중 한 명을 그들의 앞으로 끌어냈다.

“마침 소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후작에게 끌려 나온 것은 그들 또래의 젊은 여자였다.

“인사드려라, 돌로레스."

“도, 돌로레스라고 합니다."

어쩐지 주눅이 든 듯한 여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제 아내입니다.”

기네스 후작의 소개와 동시에 레녹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네스 후작의 전처들이 모두 수상쩍은 사고로 죽은 것은 유명한 얘기였다.

후작에게는 양자를 제외하고는 자식도 없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남부에서는 아무도 트집 잡지 않았다. 기네스후작은 대귀족 중 하나였고 남부에서는 결혼을 몇 번 하는 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줄리엣이 그의 팔을 붙잡고 조금 비틀거렸다.

반사적으로 줄리엣을 부축한 레녹스는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이런.”

뭔가 직감한 레녹스는 재빨리 줄리엣의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미안하지만 먼저 실례해야겠군, 후작.”

레녹스는 줄리엣의 이마에 입맞추며 태연히 미소했다.

“보시다시피. 내가 좀 급해서.”

“.....… 그러시죠.”

*

기네스 후작의 못마땅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레녹스는 줄리엣을 데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마차에 오를 때까지 줄리엣은 은생각에 잠겨 있었다.

“줄리엣.”

"아."

줄리엣이 퍼뜩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레녹스는 줄리엣이 저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을 때는 그냥 놔두는 게 가장 좋다는 걸 알았다.

그는 조용히 담요를 덮어 주었다.

“이만 돌아가지.”

“네.”

줄리엣은 마차가 출발하고도 줄곧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보드라운 담요를 만지작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줄리엣은 기네스 후작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전생의 그녀는 후작의 여덟 번째 후처로 살았던 기억이 있었다.

이전 삶에서 줄리엣은 기네스후작이 얼마나 혹독하게 그녀를 매질했는지 기억했다.

하지만 줄리엣을 당황시킨 것은 돌로레스의 존재였다.

줄리엣은 7년 전 자신이 공작을 따라서 북부로 떠나 버렸기 때문에 그 자리가 없어지면 없어졌지 누군가로 대체되기는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생의 기네스 후작은 여덟 번째 아내를 둔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돌로레스라는 여자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줄리엣은 기네스 후작을 다시 마주해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도 괜찮았었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만큼 어리고 잔뜩 주눅든 여자를 마주한 순간, 피가 맺힐 때까지 매질 당했던 먼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레녹스는 기네스 후작이나 그의 어린 아내보다는 다른게 신경 쓰였다.

조금 전 기네스 후작의 뒤에 서 있던, 흰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

줄리엣은 돌로레스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미처 보지 못한 듯했지만 레녹스는 그 늙은 성직자가 어딘지 낯이 익었다.

노인은 흔한 사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얼핏 드러난 팔과 피부가 얼룩진 것처럼 거뭇거뭇했다.

그건 신성 저주의 부작용이 분명했다.

“과연, 듣던 대로 되바라진 계집이더군.”

쾅.

경마장을 돌아 나와 자신의 마차에 올라탄 기네스 후작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걷어찼다.

“달리아 님 말씀대로야.”

기네스 후작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런 후작의 눈치를 살피며 로브를 쓴 사제와 돌로레스가 허둥지둥 마차에 올랐다.

몇 달 전, 후작의 양아들인 카스퍼 백작이 수도의 대신전에 다녀온 후 겁에 질려 집 안에 틀어 박혀 있었다.

대체 무슨 꼴을 겪었냐고 물어도 괴물을 봤다는 둥 이상한 말만 하더니. 뭔가 저 여자와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예예, 맞습니다. 여간내기가 아닌 계집이지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노인이 재빨리 거들었다.

그의 이름은 솔론 추기경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솔론은 고위 성직자이자 법황의 오른팔로 온갖 부귀를 누렸다.

그러나 그가 모시던 법황 제바스티안은 신성력도 없는 가짜였고 그간 온갖 범죄를 저질러 왔다는 게 들통났다.

루체른에서 가짜 법황이 축출된 이후 제바스티안의 오른팔이었던 솔론은 재빨리 도망쳤다.

그는 자신을 보호해 줄 만한 권력자를 찾았고, 그것이 남부의 의기네스 후작이었다.

“하지만 저 모나드 계집을 어떻게 처리하지?”

“제게 다 수가 있습니다.”

솔론 추기경이 장담했지만 기네 스 후작은 미심쩍다는 투였다.

“제바스티안 법황의 인형은 실패했잖은가.”

“하지만 들통나기 전까지는 모두가 믿었습니다!”

솔론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실제로 그랬다.

제바스티안은 누이의 유품인 소울스톤과 정교한 인형들로 루체 른을 수년간 제멋대로 조종해 왔다.

그의 누이, 제노비아처럼 신성력을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지만 제바스티안 또한 다른 방면의 천재였다.

진짜 인간처럼 움직이는 정교한 인형을 만들고 선대 법황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을 납치해 그들의 죽음을 가장했다.

"저 줄리엣 모나드라는 계집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아직까지 믿었을 겁니다!”

솔론 추기경이 이를 빠득 갈았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애초에 제바스티안이 줄리엣을 납치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솔론은 순전히 줄리엣 때문에 자신이 도망자 신세가 됐다고 믿고 있었다.

그뿐인가? 그날 제단에서 도망치다가 빛나는 파편에 맞은 탓에 그는 정체 모를 신성 저주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달리아 님은 그런 변명을 용납하지 않으실 걸세.”

기네스 후작이 제법 엄숙하게 말했다.

“자네와 자네가 가져온 자료가 쓸모없다고 생각되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무, 물론입니다.”

솔론은 도망치기 직전, 제바스티안이 보관하고 있던 방대한 양의 금지된 기록들을 모조리 들고 나왔다.

제바스티안은 신성력이 없는 가짜 법황이었던만큼 사람들을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흑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이단 심문관으로 활동하면서 수집한 자료의 양은 방대했다.

그것들을 들고 솔론은 제바스티안 법황을 은밀히 후원해 오던 남부의 기네스 후작에게로 도망쳐 왔다.

“달리아 님의 말씀대로 자네를 받아 주긴 했다만, 저 계집을 확실히 처리해야 하네.”

“이번에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솔론 추기경은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솔론이 보기에 기네스 후작도 도영 수상쩍은 인물이긴 마찬가지였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기네스후작은 웬 젊은 여자를 달리아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따르고 있었다.

솔론은 그 '달리아 님'의 존재가 영 낯설고 꺼림칙했다.

'루체른에서는 한 번도 본 적없는 여자란 말이지.'

달리아는 종단의 여사제들이 입는 순백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추기경인 솔론이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여자였다.

두어 번 스치듯 봤을 뿐이지만, 대체 그 달리아라는 여자의 정체가 뭐길래 기네스 후작처럼 교활한 노귀족이 그토록 맹목적으로 따르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뿐인가? 후작의 식객인가 싶었는데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그들의 목적은 같았다.

기네스 후작은 시건방진 북부의 공작을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더불어 달리아라는 여자는 줄리엣모나드가 목적인 듯했다.

“그래서 자네 계획은 뭔가?"

“이걸 이용할 겁니다.”

솔론 추기경이 작은 비단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그 안에 든 것은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연갈색 긴 머리카락이었다. 간신히 매수한 하녀가 머리 빗을 빼돌려 가져온 물건이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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