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줄리엣은 손잡이를 짚고 관람석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녀는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지금 남부 최대의 경마장의 관람석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본다면 경마장안을 구경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줄리엣의 시선은 관객석 쪽으로 날아간 작은 나비 두어 마리를 향해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나비들은 사람들로 가득 찬 장내에서는 유심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작았다.
누군가는 반짝이는 나비들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곧 잘못 봤겠거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위험하니까 앉아.”
뒤에서 레녹스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줄리엣은 순순히 좌석에 앉으면서 그를 힐끔거렸다.
나비를 굶기면 위험하다고 말해 준 것은 그였다.
그리고 이렇게 흥분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나비들에게는는 만찬장이나 다름없었다.
조금씩 감정을 먹어 치울 수 있비록 정보 길드를 다 동원해도 '스노우드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줄리엣은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트랙을 누비는 늘씬한 말들을 보며 줄리엣이 감탄했다.
“남부의 말들은 확실히 다르네요.”
그러자 옆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레녹스가 슬쩍 물었다.
“가지고 싶어?”
"아뇨. 꿈도 꾸지 마세요."
단호한 거절에 잠시 눈을 빛내던 레녹스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 되었다.
줄리엣은 힐끔 그를 곁눈질했다.
확실히 극장보다는 이곳이 한결 편안한 기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녹스는 표정이 어두웠다. 호수에 다녀온 뒤로 계속해서 뭔가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마력석 광산 때문인가요?”
줄리엣이 대놓고 묻자 레녹스의미간이 찡그려졌다.
"엘리엇이 말했나?"
“?”
"아뇨.”
그런 것쯤은 그의 비서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전생에도 있었던 일이니까.
남부의 기네스 후작이 마력석의 이권을 놓고 북부와 다투고 있었다. 칼라일 공작가의 가신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왜, 걱정돼?”
여전히 비딱하게 턱을 괸 채로 레녹스가 눈을 맞추고 물어 왔다.
줄리엣은 왠지 그가 어떤 대답을 바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줄리엣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려 버렸다.
“걱정 마. 널 부족하게 살게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런 걱정 안 해요.”
줄리엣은 어차피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기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력석 사업의 이권을 빼앗긴다 한들 공작가가 휘청일수준은 아니었다.
레녹스 역시 후작가나 마력석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는 아래층을 구경하는 여자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감정이 하루에도 미친 듯 수십번 널뛰고 있으니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었다.
남부의 말들은 윤기가 흐르는 밤색이거나 불그스름한 털을 가진 종들이 많았다.
“귀부인, 어느 말에 거시겠습니까?”
그러나 줄리엣은 말들보다는 그 주인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이상한 요구를 했다.
“마주 명단을 가져다주시겠어요?”
레녹스는 그녀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줄리엣은 계속해서 경주 결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돈을 걸었다.
다섯 번의 경주 중에서 두 번은 이겼고 세 번은 졌다.
그리고 다섯 번째 경주에서 줄리엣이 돈을 건 말이 아슬아슬하게 2등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 레녹스가 금화 하나를 튕겼다.
“내가 이겼네.”
핑그르르.
그제야 줄리엣은 그 역시 경주마에 돈을 걸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조금 전 가장 먼저 들어온 흑마였다.
“그런데요?”
“졌으니까 내 질문에 대답해."
줄리엣은 이게 언제부터 내기가 되었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레녹스는 무시했다.
“뭐가 궁금하세요?”
결국 레녹스는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누군데, 그거.”
“뭐가요?”
"너한테 아이는 필요 없다고 한 남자.”
"아…… 들으셨어요?"
줄리엣은 별로 놀란 눈치도 아니었다.
"어디까지 들으셨어요?"
"내가 어디까지 들었느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나?”
잠시 눈싸움하듯 말 없는 시선만 오갔다. 그들은 서로를 지나치게 잘 알았다.
우연히 엿들은 줄리엣의 말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이가 필요 없다고 말한 남자였거든요.”
그 말을 들을 뒤로, 그는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 남자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레녹스는 어떤 게 더 나쁜지 알수 없었다.
저 때문에 줄리엣이 아이를 갖고 싶지 않게 된 것인지, 혹은 정말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빌어먹을 첫사랑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경우인지.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미래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죽은 첫사랑이 있는 쪽이 그나마 나을 것 같다.
"아이를 원치 않으시잖아요."
하지만 줄리엣은 분명 그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레녹스 칼라일은 과거의 제 언행을 돌이켜봤다.
단언컨대 그는 줄리엣에게 아이를 갖지 말라거나 애는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결혼은 안 한다고 수없이 못 박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이랍시고 찾아온 사기꾼들을 모두 쫓아내 버리긴 했지만.
레녹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혹시 내가, 네…….”
내가 애는 필요 없단 헛소리나 지껄인 빌어먹을 그 새끼가 맞느냐고 대놓고 묻자니 몹시도 구차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싱긋 웃더니 단번에 부정했다.
“아니에요.”
무슨 답을 기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답에 레녹스는 순간 허탈해졌다.
“전하가 제 첫사랑일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
밤새워 고민한 게 무색할 만큼 쉽게 결론이 났다. 죽은 첫사랑 쪽으로, 레녹스는 허탈한 한숨과 함께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 그 새끼가 뭐랬는데."
"들으신 그대로예요.”
줄리엣은 담담히 말했다.
“아이가 필요 없다고, 생겨도 낳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형편없는 놈이었군.”
그가 내뱉듯 말하자 줄리엣이 조금 키득거렸다.
“그런가요?”
“그래.”
줄리엣은 왠지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레녹스는 웃을 수 없었다.
다그쳐 묻기 전보다 더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말을 한 기억만 없다뿐이지 자신 역시 그 형편없는 놈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다.
한편으로 미뤄 뒀던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 말을 들었으니 결혼이든 뭐든 싫다는 게 당연하지.'
뭘 준대도 줄리엣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게 당연했다.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라.
'빌어먹을.'
심지어 쫓아가서 죽여 놓을 수도 없지 않은가.
머릿속이 복잡한데 줄리엣이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했다.
“수도로 돌아가면 공작저로 가시나요?”
“그래.”
무심코 대답했던 레녹스가 덧붙였다.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딱히 필요한 건 없어요. 부족한 것도…….”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했다.
“닉스를 데려와도 되나요?"
잠시 생각한 다음에야 레녹스는 그게 줄리엣이 키우는 수상쩍은 마수의 이름이란 걸 깨달았다.
“차라리 강아지를 사 주지."
줄리엣의 얼굴에 얼핏 서운한 표정이 스쳤고, 레녹스는 또다시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괜찮아요. 강아지는 필요 없어요."
그러나 그가 말을 번복하기도 전에 줄리엣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거절했다. 그리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하지만 침실 담당 하녀는 바꾸시는 게 좋겠어요."
“하녀?”
“네. 제 머리빗이 없어졌거든요.”
미간을 찌푸리며 레녹스는 좀 더 자세한 자초지종을 물으려고 했다.
단지 손버릇이 나쁜 하녀라기에는 머리빗은 터무니없이 값싼 물건이었다.
침실엔 머리빗 외에도 값비싼 장식품이 널려 있는데 굳이 머리 빗을 훔친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가 묻기도 전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