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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09화 (106/229)

1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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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칼라일 공작이 동행한 것만으로, 줄리엣은 사람들의 태도가 변한 것을 느꼈다.

특히나 뭐라도 하나 아는 척하려는 남자들이 그랬다.

작은 공작이 나타난 순간부터 자샬롯의 남편이라는 그린우드 자신의 사업 이야기를 떠들기 바빴다.

줄리엣은 냉랭하다 못해 살벌한 표정의 레녹스가 자작을 어떻게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워서 힐끔거렸다.

그런 줄리엣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그린우드 자작은 사람 좋은 척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실례했습니다. 레이디께 사업 이야기는 알아듣기 어렵고 지루하셨을 텐데요.”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별로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던걸요.”

“…… 그, 그렇습니까?”

“네. 간단한 얘기를 복잡하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최근 기네스 후작이 마력석으로 큰 돈을 벌어들였답니다, 하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을 뿐이었다.

마력석 광산이든 기네스 후작에 대해서든 자작보다는 줄리엣이 훨씬 잘 알 터였다.

레녹스를 그런 남자들 틈에 던져두고, 줄리엣은 샬롯 자매와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만발한 꽃나무 아래에서 즐기는 티파티는 낭만적이었다.

티파티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책 한 권을 끼고 나타난 엠마가 찻잎 점을 봐 주겠다고 나섰다.

수도 사교계에서 어린 층 사이에 인기 있는 놀이였다.

차를 우려낸 다음 찻잔에 남아 있는 찻잎의 모양을 보고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점술 책을 넘겨보던 엠마가 샬롯의 찻잔을 해석했다.

“이건 비둘기처럼 생겼으니까, 샬롯 언니의 아기는 여자아이일거야!”

“하지만 엠마, 이건 새보다는 강아지처럼 보이는데? 강아지는 남자아이……."

“그렇지만 난 조카로 여자애가 갖고 싶은걸!”

대충 이런 식이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끼워 맞추는 해석이었지만 재미만 있으면 그만인 모양이었다.

“줄리엣도 봐 줄게요!"

엠마가 명랑하게 줄리엣의 옆에 와서 찻잎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초승달이네요! 그리고 오른쪽은 물고기인가?"

줄리엣도 자신의 찻잔을 들여다 보니, 과연 초승달처럼 생긴 찻잎이 보이긴 했다.

“초승달은 첫사랑이란 뜻이고 작은 물고기들은……. 아, 알겠다!”

열심히 해설서를 뒤적거리던 엠마가 점괘를 내놓았다.

“줄리엣이 첫사랑과 재회해서 아기랑 행복한 가정을 갖게 될 거래요!"

엠마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줄리엣의 첫사랑은 누구에요?”

줄리엣은 얕은 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어요, 엠마.”

엉성한 해석에 줄리엣은 조금 키득거리다가 말했다.

“제 첫사랑은 아이가 필요 없다고 말한 남자였거든요."

“왜요?"

“글쎄요. 하지만 낳을 필요 없다고 했으니까…….”

무심코 고개를 든 줄리엣은 엠마가 놀란 눈으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힐끔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말한 상대를 칼라일 공작이라고 넘겨짚는 눈치였다.

괜한 얘기를 했다고 후회하는 동시에 줄리엣은 다급히 덧붙였다.

"아뇨. 그 남자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공작님은 아니에요.

줄리엣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세상에.”

경악하는 엠마의 반응을 보니 그녀의 의도가 전달된 것 같았다. 대신 엠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죽었나요?”

그제야 줄리엣은 엠마가 그녀의 말을 조금 다른 식으로 해석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뭐 어떤가. 말실수를 얼버무리기에는 이게 더 좋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에요, 그 남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거짓말도 아니었다. 줄리엣이 그런 말을 들었던 건 지난 생에서였으니까.

울상이 된 엠마가 소곤거리며 사과했다.

“줄리엣, 저는 몰랐어요. 괜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보다 엠마, 이 얘기는 비밀로 해 줬으면 해요."

사람들이 알아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네, 물론이죠…… 엄마야!”

대답과 동시에 엠마가 기겁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그러나 싶어 뒤를 돌아본 줄리엣은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면, 저는 이만……….”

눈치를 살피던 엠마가 후다닥 사라지자 레녹스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그가 불쑥 등 뒤에서 나타나자 줄리엣은 조금 긴장했다.

설마 들었을까?

그렇대도 잡아떼면 그만이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불편할 정도로 빤히 줄리엣을 보던 레녹스는 대뜸 말했다.

“손 줘.”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던 줄리엣은 장갑을 벗은 그의 맨손이 닿자 조금 움찔했다.

“열이 있잖아.”

“....…그러네요.”

조금 덥다고 느끼긴 했는데 사실은 나비들이 역소환당한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는 거였다.

'컨디션이 나빴던 게 그래서였구나.'

서늘한 마력이 흘러 들어오자 조금씩 더운 기운이 가셨다. 얌전히 손을 내맡기고 있던 줄리엣은 그를 힐끔거렸다.

이론상 마력의 흐름을 안정화시키는 건 피부를 맞대는 행위로 가능하다. 그 스킨십이 친밀할수록 효과가 빠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하염없이 손을 붙들고 있자니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

이전 같았으면 입맞춤 한 번으로 끝냈을 일인데 이래서야 어느세월에?

줄리엣은 조금 웃을까 말까 고민했다.

오늘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줄리엣의 생각을 읽기라도한 것처럼 레녹스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 안쪽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주변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져서 줄리엣은 조금 민망해졌다.

“마력 양이 풍부하지 않아서 쉽게 불안정해지는 거래요.”

"누가 그래?”

상단의 마법사, 에셀리드가 그랬다. 마력이 많지는 않은데 기이하게도 항상 찰랑찰랑 차 있는 상태라고.

"그냥, 저번에 누가 그랬어요."

하지만 왠지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꽤나 은밀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형편없진 않아.”

“풋.”

꽤나 관대한 평가에 줄리엣은 웃음을 터뜨렸고, 레녹스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줄리엣!”

그때, 저쪽에서 보닛을 쓴 귀부인이 살갑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봐요!”

“샬롯이에요.”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준 다음 짤막하게 설명했다.

“대부인의 손녀요.”

짧은 설명이었지만 레녹스는 알아들었다. 지난 며칠간 줄리엣이 몇 번 샬롯에 대해 이야기한 적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사람을 사귀지 않는 줄리 엣이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눌 만큼 며칠 만에 친해졌다는 게 조금 의외라고 그는 생각했다.

샬롯이라는 여자가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스레 마차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레녹스는 샬롯이 홑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이를 낳으러 왔다던 맏손녀인가?”

“네. 봄에 아기가 태어난대요.”

줄리엣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귀엽겠죠.”

줄리엣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레녹스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아직 아이가 가지고 싶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줄리 엣은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제가 바라던 대답이었음에도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레녹스는 저도 모르게 줄리엣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왜?”

“왜라뇨?”

“좋아하잖아, 저런 거."

어리고, 연약하고, 보드라운.

그가 알기로 줄리엣은 어린 새끼 동물이라면 지나치질 못했다.

거기에 불쌍하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다.

레녹스는 겨울마다 어미 잃은 새끼 눈 여우들이 먹을 걸 찾아 성으로 내려오면 몰래 돌봐 주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했다.

아기는 그녀의 기준에 꼭 맞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어이없다는 듯 픽 하고 웃었다.

그녀가 사족을 못 쓰는 귀여운 아기 동물들을 '저런 거라고 퉁치는 레녹스의 표현력이 웃겼고, 숨은 뜻을 단번에 알아듣는 자신이 우스웠다.

“좋아한다고 다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한 줄리엣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조금만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 뭐든 사들이지 못해 안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명이 좀 더 필요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좋아한다고 다 가지고 싶다는 뜻은 아니란 거죠.”

그러더니 줄리엣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이 얘기 더 안 할래요. 그만 가요.”

“.… 그러지.”

결국 줄리엣을 다그쳐 원하던 답을 들었음에도 그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레녹스는 자신이 지난 며칠간 왜 그토록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이었는지 알았다.

그는 줄리엣이 제가 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될까 두려웠다.

그에게는 줄리엣의 나비들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지금 그에게 가장 끔찍한 악몽을 보여준다면 뭘 보게 될지 뻔했다.

'저는 아이를 가지고 싶으니 안되겠네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줄리엣이 떠나 버리는 장면일 터였다.

그러니까 줄리엣이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안도해야 옳았다.

"제 첫사랑은 아이가 필요 없다고 말했던 남자였거든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이상,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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