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하! 내가 말해 줄 성싶으냐!"
그레이엄은 실실거렸다.
로이는 그들 형제 중 가장 어린 탓에 숲에 은밀히 전해지는 이야기는 아직 알지 못했다.
“어쨌든 분명한 건 그 여자가 네 반려가 될 일은 절대 없다.
는……!”
빠각.
뭔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레이엄이 졸도했다.
“아.”
로이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레이엄을 기절시킨 것이다.
“이런.”
로이는 별로 아쉽지 않은 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레이엄이 떠들던 이야기에는 그도 관심이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로이가 입을 열었다.
“엘자.”
"응…… 으응?"
조금 떨어진 나무 사이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자가 무심코 대답해 버렸다.
옆에서 같이 숨어 있던 나단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아차.'
엘자는 뒤늦게 후회 막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와.”
그녀는 마지못해 쭈뼛쭈뼛 밖으로 나왔다.
"너 뭔가 알아?”
“응, 아니! 네, 그게…"
횡설수설하던 엘자는 눈을 질끈 감고 실토했다.
“줄리엣이 그러는데, 그레이엄이 줄리엣의 목걸이가 ‘스노우드롭'이라고 했대!”
“뭐야, 그 이상한 이름은?"
그러나 그 말을 들고도 로이의 반응은 영 심드렁했다.
“그건 꽃 이름이잖아?"
그의 물음에 답해 준 것은 숲바닥에 정신을 잃고 혼절한 그레이엄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엘자도 아니었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뒤따라 나온 나단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로드께서도 들어 본 적 있으실 겁니다. 숲 밖에는 사람을 미혹하는, 아름답지만 사악한 것들이 존재한다고요.”
"알아. 시프 할멈이 해 주던 옛날 얘기잖아.”
엘자의 할머니는 카티아의 숲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고 지혜로웠다.
그녀는 어린애들을 앉혀 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그건 그냥 옛날 얘기가 아닙니다.”
“그럼?”
“고대의 어리석은 인간 왕들은 차원 너머의 존재들을 불러낼 수 있는 통로가 될 물건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진지한 나단이 그런 얘기를 심각하게 하는 게 꽤 웃겼다.
"통로?”
"예. 자격을 갖춘 자가 그 물건을 손에 넣으면 불러낼 수 있다.
고 합니다.”
로이는 심드렁히 물었다.
“뭘 불러내는데?”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사악한 신격들이죠.”
로이는 점점 더 웃을까 말까 하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줄리엣이랑 무슨 상관이야? 설마하니 그 열쇠가”
그러나 엘자는 불안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그레이엄을 힐끔거렸고, 나단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줄리엣 양이 가진 열쇠가 진짜 그 물건 중 하나인지는 모릅니다. 그런 물건들이 모두 몇이나 있는지도 모르고요. 몇몇은 이미 파괴되었고, 몇몇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그레이엄이 그랬다던 걸! 줄리엣이 가진 게 스노우드롭이랬어.”
엘자가 끼어들었다.
로이는 바닥에 쓰러진 그레이엄을 노려보다가 다시 엘자에게 물었다.
“대체 스노우드롭이 뭐야?”
“로이도 알잖아. 우리 할머니가 해 준 얘기에 나오는………."
"이름이 알려진 것들은 극히 드물지만, 스노우드롭은 이름과 정체가 알려진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입니다.”
로이는 더는 웃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사악한 존재라는 게…… 줄리엣의 나비를 말하는 건가?”
“그럴지도요.”
줄리엣이 정령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강력한 마물을 소환해 부린다는 것은 로이 역시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나비 마물은 열차에서는 마지못해 그를 풀어 주기도 했었고, 또 루체른에서는 여신체를 소환해내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인간들은 모두 그들의 법황이 신체를 소환했다고 착각했지만 로이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짜 법황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여신체를 불러낸 것은 줄리엣이었다.
혹은 줄리엣이 몸에 지니고 있던 소울스톤과 그녀가 부리던 나비 마물들의 힘이 충돌했기 때문이라든지.
줄리엣에게 그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로이는 그럴 거라고 추측했었다.
내심 그 마물들을 꺼림칙하게 여기던 터라, 줄리엣이 나비들이 사라졌다고 낙담했을 때 한편으로는 안도하기도 했었다.
"이름과 정체가 알려져 있다며.
그럼 그 나비들의 정체는 뭔데?"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사람의 감정을 먹어 치우는 괴물입니다."
허황된 말에 로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나단은 굳은 얼굴로 충고했다.
"로이 님, 지금부터라도 줄리엣 양을 멀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이런 건 처음 봐요.”
줄리엣은 눈앞의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요한 호수 주위로 붉고 흰 매화가 만발해 있었다.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랍니다.”
그들을 안내한 남부의 관리인이 웃으며 참견했다.
“눈이 왔다면 더 운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줄리엣은 이만하면 충분히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계절에 꽃이 만발한 겨울 호수라니. 북부는 아직도 한겨울이라 호수는 전부 얼어 있을 텐데.
이곳에만 이른 봄이 온 것 같았다.
매화를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줄리엣과는 달리 레녹스는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안전한 건가?”
"물론입니다, 전하."
레녹스는 작은 배를 미심쩍다는 듯 훑어보았지만 줄리엣의 기대와는 달리 거절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간단한 간식거리가 든 바구니를 건네받고 돌아선 줄리엣은 조금 당황했다.
“왜?”
“직접 저으시게요?”
"......"
조금 심술궂은 기대와는 달리 두 사람만 태운 배는 순조롭게 나아갔다.
별로 헤매지도 않고 노를 젓는 솜씨가 제법 능숙했다.
사실 얼마쯤 가자 노는 별로 필요가 없었다. 마력석이 장착된 배가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햇빛을 가릴 양산은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아 접어 넣은 다음, 줄리엣은 힐끔 레녹스의 눈치를 살폈다.
지난 며칠간 레녹스는 부쩍 이상하게 굴었다.
뭘 하고 싶으냐 묻질 않나, 줄리엣이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어 대는 것마다 죄다 고개를 끄덕일 뿐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되레 너무 순순하게 굴어서 불안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꽃놀이까지 왔지만.
칼라일 공작이 꽃놀이라니.
공작가 비서들은 기겁했었다.
이다음엔 무슨 짓을 하려고?
"바쁘지 않으세요?”
"별로.”
거짓말.
줄리엣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공작가 행정관들이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내려온 걸 보니 급한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겨울에는 영지에 마수 출몰이 이 잦지만 고작 그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물어봐도 그녀는 공작가 사람은 아니니 가르쳐 주지 않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줄리엣은 피식 웃었다.
“왜?”
"아…….”
줄리엣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
말했다.
“대부인이 동행 없이 와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아침나절부터 뜬금없이 꽃놀이를 하자고 줄리엣을 불러낸 것은 일레나 대부인이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굳이 같이 오시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에요.”
“누구 좋으라고?"
“네?”
레녹스는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향하고 있는 강 건너편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티파티가 한 창이었다. 그리고 참석자들을 대충 훑어본 레녹스는 줄리엣에게 참한 신랑감을 찾아 주겠다는 대부인의 계획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쩐지 이른 아침부터 줄리엣을 불러내더라니. 포기를 모르는 노부인이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