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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07화 (104/229)

107화.

뭘 하고 싶으냐니.

레녹스가 그런 걸 물은 적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줄리엣은 이 질문의 대답에 신중해야 한다는 걸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지난여름 휴가 때는 배를 타 보고 싶다고 했다가.…….

"결국 뱃놀이는 못 했지.”

뱃놀이는커녕 남은 일정을 다 다 취소하고 공작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일은 그녀에게도 꽤나 상처였다. 그 직후 앓아누웠다가 깨어나니 이 남자는 배를 사들였다는 얘기를 했다.

"배를 갖고 싶다며?”

하지만 호수에 떠다니는 조각배와 초대형 갤리선은 꽤 거리가 있었다.

“줄리엣.”

대답을 재촉하듯 공작이 그녀를 부르자 줄리엣은 조금 불안해졌다.

무슨 꿍꿍이지?

하지만 여기서 곧이곧대로 그를 믿고 냉큼 소원을 말할 만큼 줄리엣은 순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들이랑 어울리기는 싫었다.

이대로 별장으로 돌아가 몇 날 며칠이고 침실에 틀어박히는 것도 사양이었다. 앞으로 몇 달 만이야, 하고 생각했지만 마땅한 핑계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영락없이 레녹스의 페이스에 끌려 다니게 생겼다.

"아."

고민하던 줄리엣의 눈에 아래층에서 기름 먹인 붉은 색지를 자르고 있는 시종들이 들어왔다.

온실에 모여 있는 저택의 손님들에게 나눠줄 모양이었다. 그건 오래된 겨울 풍습이었다.

“색지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아래층으로 내려가 그렇게 말하니 시종들은 흔쾌히 종이를 나눠주었다.

겨울에 어린아이들이 흔히 하는 놀이였다. 종이 등을 접어 행운을 기원하는 거다. 사실은 멀리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길을 잃지 말라고 걸어 두는 거지만.

창가에 종이 등을 접어 불을 밝힌 다음 걸어 두면 액운을 물리쳐 주고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여기요.”

줄리엣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곁에 서 있던 남자의 손에도 커한 장 다란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걸로 뭘 하라고?”

“접어요.”

“내가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잖아.”

"저 이거 만들고 싶어요.”

그의 표정이 나빠지는 걸 보고 줄리엣이 슬쩍 덧붙였다.

“같이요.”

"......."

레녹스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줄리엣은 왠지 흡족해졌다.

급조한 것 치고는 괜찮은 해결책이었다. 최소한 쓸데없는 돈낭비는 안 하겠지.

누구한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무엇보다 공연히 마음 상하는 일도 없을 터였다.

레녹스가 어이없어 하는 것도 상관 없었다.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면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줄리엣이 창틀에 걸터앉아 능숙하게 종이 등을 만드는 동안 레녹스는 가만히 그녀가 하는 양을 옆에서 구경하기만 했다.

줄리엣은 손재주가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붉은 종이 등만큼은 제법 잘 만들었다. 매년 겨울 부모님과 함께 접은 기억이 있었다. 불장난한다고 매번 혼나긴 했지만.

“예쁘게 만드셨네요."

힐끗 건너다본 시종이 칭찬해 해주었다. 그러나 덩그러니 손에 종이를 쥐고 선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리엣은 그제야 제가 쥐여 줬던 모양 그대로란 것을 깨닫고 의아해졌다.

“접을 줄 몰라요?"

“몰라.”

줄리엣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입에서 뭘 할 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없어.”

그녀는 조금 당황했다.

처음에는 장난인가 했지만 레녹스 칼라일은 이런 걸로 농담할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북부의 공작성에서는 단 한 번도 창가에 풍등이 매달린 것을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북부의 관습인데?

정작 북부의 대귀족이 모른다는 게 몹시 이상하게 느껴졌다.

줄리엣이 할 말을 잃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그가 못마땅한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꼭 알아야 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하지만 제국민이라면 누구나다 알고 있을걸요."

종이접기 같은 건 어릴 때 다해 보지 않나?

어머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았나요? 하마터면 줄리엣은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살벌한 공작가의 가풍을 생각해 보면, 선대 공작 부부가 멀쩡히 살아 계셨더라도 화기애애하게 종이 등이나 만들고 놀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이 남자가 냅킨을 접는 법이나 알까 싶었다.

줄리엣은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마침 저택의 시종들이 슬금슬금 그들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기 시작해서 신경 쓰이던 차였다.

“이리 주세요.”

줄리엣은 색지를 몇 장 더 얻은 다음 그를 데리고 빈 응접실로 갔다.

유치한 짓을 한다고 비웃거나 중간에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줄리엣을 순순히 따라왔다.

조금 이상한 경험이긴 했다.

북부에 머무는 동안 줄리엣은 은그로부터 배운 게 꽤 많았다. 석궁이라거나 승마라거나. 다소 살벌하지만 실용적인 생존법이라거나.

소소하게는 어깨너머로 대충 기사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배웠다. 하지만 정작 줄리엣이 그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접으면 돼요. 아시겠죠?”

짠!

요리조리 접은 모양을 펼치자 육각 형태의 입체가 살아났다.

줄리엣은 일부러 천천히 한 번 더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물끄러미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내려다보던 남자가 힐끔 시선만 움직여 대꾸했다.

“모르겠는데.”

“그냥 네가 접은 걸 주면 되잖아.”

“안 돼요.”

줄리엣은 눈살을 찡그리며 그의 손에서 완성품을 빼앗았다.

“왜?”

“자기 건 직접 만들어야 의미가 있어요.”

레녹스는 그런 줄리엣을 쏘아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

커다란 손으로 종이를 접는 모습은 꽤 어색해 보였지만 눈썰미와 손재주는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녹스는 곧잘 줄리엣이 시키는 대로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의외로 모난 데 없이 깔끔하게 각이 잡혀서 조금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이제 이걸 창가에 달면 돼요.”

“시시하군.”

말로는 그러면서도 레녹스는 순순히 줄리엣이 요구대로 따라 주었다.

“시시하다뇨. 그러면 겨우내 감기에 안 걸린다고 엄마가……."

항의하던 줄리엣은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저기에 달아 주세요.”

레녹스는 줄리엣의 반응을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 종이 등을 달아 주었다.

“이걸로 겨울 동안 액운을 막아줄 거예요.”

레녹스는 종이로 액운을 막을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누리지 못한 유년 시절에 대한 상실감이나 박탈감 또한 딱히 느끼지 못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다만 그는 달아 둔 풍등을 보고 조용히 웃는 여자를 보고 묘한 갈증을 느꼈다.

**

로이는 숲의 공터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빛도 들지 않을 만큼 빽빽한 나무가 우거진 숲 한가운데 로이는 조용히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아래에는 거대한 회갈색 늑대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너, 너……! 이 건방진 놈 같으니!”

그레이엄이 로이를 쏘아 보았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숲의 일족들도 동복형제를 죽이는 것만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이는 그의 계획을 영영 망쳐 버릴 뻔한 멍청한 그레이엄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마터면 그는 줄리엣을 잃을 뻔했다.

“대체 뭐가 불만이야?"

로이는 짜증스럽게 그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크윽!"

“날 .”

“언제는 날 더러 반쪽짜리라며."

발아래에서 그레이엄이 신음했지만 로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현재 일족의 우두머리는 헤바론이었다.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미 실질적인 지배권은 헤바론의 막내아들인 로미오에게 넘어온 뒤였다.

다 죽어 가는 아버지에 대한 예로, 혹은 의뭉스러운 속내를 숨기기 위해 그를 로드 자리에 앉혀 둔 것뿐이지.

그런 상황에 불만을 품은 것은 로이의 형제들이었다.

로이는 그들 세대 중 가장 나중에 태어난 후계자였다.

이미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 자리를 잡고, 심지어 아이까지 낳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그들의 막냇동생은 앞뒤 분간 못하고 날뛰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로이의 손위 형제인 그레이엄은 내심 로미오가 평생 반려를 찾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제맛 게 아무리 힘이 세봐야 철부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너희가 원하는 대로 각인하고 반려를 찾아왔잖아.”

“커헉……!”

쯧. 로이는 못마땅한 듯 짧게 혀를 찼다.

라이칸슬로프 로드의 직계혈족들은 무시무시한 재생력을 갖고 태어난다. 애석하게도, 그레이엄은 로이와 같은 배를 타고 태어난 형제였다.

즉, 그레이엄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목이라도 날리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바꿔 말하면 덕분에 그래서 정도를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니까.

“젠장.”

로이는 제가 초조해하는 이유를 알았다. 사실 그가 지금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상대는 그레이엄이 아니라 줄리엣이었다.

며칠 전 황궁의 연회장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줄리엣의 얼굴이 떠올랐다.

"금방 올게요.”

매번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면 줄리엣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거나 잘 다녀오라며 그를 배웅해 주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로이는 필사적으로 줄리엣의 표정을 읽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마지못해 웃어 주었을 뿐 이전처럼 다정하고 친밀하게 대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안달이 났다. 어떻게든 착하게 굴려고 애썼는데.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서.

“캬핫....…!”

그레이엄이 바람 빠지는 이상한 소리로 웃었다.

“그 인간 계집이 네가 찾아낸 반려라고?"

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싸늘하게 그의 형제가 지껄이는 것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그레이엄은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다.

그레이엄은 숲에서 그 인간 여자를 찾아냈을 때부터 직감했다.

사실 찾기 어렵지도 않았다. 로이가 제 흔적을 잔뜩 그녀의 주변에 남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멍청아! 그 인간 여자는 재앙을 가져올 거다!”

“뭐?”

“그 계집이 스노우드롭을 가지고 있다고! 그런 여자는 필시 재수가 없……!”

“스노우드롭?”

그게 뭐지?

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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