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06화 (103/229)

106화.

일레나 대부인이 조금 질린 듯 설명했다.

“푸실리 자작에게 손모가지와 모가지 중에 뭘 잃을지 직접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고…… 칼라일 공작이 그러더구나.”

줄리엣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레녹스가 대부인을 압박한건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부인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푸실리 자작은 별 볼 일 없지만 그 뒤에 있는 사람이 문제였다.

자작은 기네스 후작가의 가신이었다. 그리고 기네스 후작은 남부의 대영주였다.

만약 칼라일 공작의 손에 자작을 넘겨준다면 푸실리 자작은 목숨을 잃거나 그보다 끔찍한 꼴을 당할 게 뻔했다.

그러면 기네스 후작이 일레나 대부인에게 항의할 빌미가 된다.

대부인은 칼라일 공작과 기네스후작, 두 대귀족 사이에서 어느 쪽과도 앙금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대부인다웠다.

줄리엣은 솔직히 대부인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는 않았다.

일레나 대부인은 호탕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손녀딸들이 어깨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는 걸 야단칠 정도로 보수적인 옛날 사람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줄리엣이 물었다.

“푸실리 자작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고 하셨죠?”

“그래. 널 만나고 싶어 하더구나. 하지만 걱정할 거 없단다. 네가 만나기 싫다고 하면 당장 쫓아 버리마.”

일레나 대부인은 어쩐지 줄리엣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실은 짐을 다 챙겨서 짐마차에 실어 놨단다.”

“네, 알겠어요.”

줄리엣은 상황을 이해했다.

들어오면서 얼핏 봤던 짐마차가 푸실리 자작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자작은 그 마차에 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은, 자작이 너를 직접 만나서 사과하고 용서받겠다고 우기기에.”

“할머니!”

“아이고, 알겠다! 그래. 내 당장 떠나라고 하마.”

대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서 있던 하인이 잽싸게 온 실 밖으로 나갔다. 축객령을 전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대부인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나도 줄리엣 네가 별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단다.”

그 말을 들은 줄리엣은 의미심장하게 조용히 웃었다.

“네. 굳이 직접 만날 필요도 없는걸요.”

팔랑.

“어? 나비다.”

싱글거리던 엠마는 처음 보는 색의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주변에는 꽃도 없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솟아난 듯 이질적이었다.

잠시 나풀거리며 돌아다니던 나비는 엠마의 혼을 쏙 빼놓은 다음 순식간에 온실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할머니! 방금 저 나비 보셨어요? 신기하게 생긴-”

“어휴, 온실에 나비가 있는 게 뭐 대수라고. 어린애처럼 호들갑떨지 말거라, 엠마.”

일레나 대부인이 핀잔을 주었지만 엠마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줄리엣도 못 봤어요?”

“글쎄요.”

“진짜 예뻤는데…….”

줄리엣은 활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차향이 좋네요.”

**

일레나 대부인은 줄리엣을 오찬에 초대했다. 온실에서 다른 손님들과 좀 더 어울리다가 점심까지 들고 가라는 제안이었다.

줄리엣은 문득 점심 전에 돌아 오겠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기다릴 테면 기다리라지.'

어차피 북부의 공작가에서 보좌관들이 단체로 내려왔으니, 레녹스는 한동안 바쁠 게 뻔했다.

줄리엣은 굳이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어제 저녁 있었던 일들 때문인지 대부인의 손님들은 줄리엣에게 묘하게 친절했다.

그리고 애초에 줄리엣보다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안녕하세요, 모나드 백작님."

동그란 얼굴의 온화한 귀부인 하나가 줄리엣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샬롯 그린이에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줄리엣은 금방 알아들었다.

“엠마 양의 언니시군요.”

그리고 일레나 대부인의 맏손녀이기도 했다. 엠마가 “샬롯 언니 가 아기를 낳는대요!”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발랄한 엠마와는 달리 얌전해 보이는 외모의 샬롯은 만삭의 임산부였다.

“곁에 앉아도 될까요, 백작님?”

“그럼요. 편하게 줄리엣이라고 불러 주세요.”

“어머. 그래도 될까요? 그럼 저도 샬롯이라고 불러 주세요."

줄리엣은 샬롯의 동그랗게 부푼배가 신기했다. 조심스레 힐끔거리자 샬롯이 웃으며 “예정일은 4주 뒤랍니다.” 하고 말해 주었다.

“엠마가 밤새 줄리엣 양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꼭 뵙고 싶었어요.”

샬롯은 줄리엣에게 소곤거렸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실은다들 고소해하고 있답니다."

"뭘요?"

“푸실리 자작은 손버릇이 나쁘기로 전부터 유명했거든요. 다들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자작을 그렇게 보내 버리시다니.…..”

“샬롯!”

“사실이잖아요, 할머니."

“그래도 임산부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단다. 고운 말만 써야지.

아기가 뭘 배우겠니?"

“몹쓸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걸 배우겠죠.”

일레나 대부인은 엄하게 꾸짖었지만 줄리엣은 샬롯이 금방 좋아졌다. 얌전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샬롯은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갑자기 시종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대부인!"

“무슨 일이지?"

“푸실리 자작이 영지로 향하던 중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답니다.”

“발작이라니?”

온실 안에서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모두 술렁였다.

“저어, 그래서 푸실리 자작의 하인들이 다시 되돌아오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데요....…."

“으음.”

일레나 대부인은 힐끔 줄리엣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줄리엣의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연달아 항의했다.

“대부인, 속으시는 건 아니겠죠?”

“어휴, 그거 다 쇼하는 거예요.”

“그럼요. 그 인간이 얼마나 음흉한데!”

“동정표를 사려고 별의별 수를 다 쓰네요. 출발 전에는 멀쩡하더니!”

샬롯의 말대로 다들 푸실리 자작을 잔뜩 벼른 게 틀림없었다.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무슨 일일까요?”

“그러게요.”

줄리엣은 때마침 조용히 돌아와 팔랑거리며 찻잔에 내려앉은 푸른 나비를 보고 싱긋 웃기만 했다.

***

줄리엣은 온실을 빠져나와 저택의 복도를 따라 조금 걸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온실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어서 복도에는 하인들 몇몇을 제외하면 인적이 없었다.

“줄리엣.”

어느 틈에 그녀를 뒤따라와 묵묵히 걷던 남자가 더 참지 못하고 손목을 붙잡아 돌려세울 때까지.

줄리엣은 붙잡힌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이제는 만져도 괜찮은가 보죠?”

"뭐?"

“손이 닿을 때마다 이상하게 구셨잖아요.”

“내가 언제-”

어제 저녁, 연주홀을 나와 별장으로 돌아오는 내내.

레녹스는 조금 이상했다. 무릎이 스칠 때마다 어딘가 불편한 듯 인상을 쓰더니, 화가 난 사람처럼 창밖만 쏘아보았다.

처음엔 착각이겠지 의아했던 줄리엣은 나중엔 좀 억울해졌다.

마차가 아무리 넓어도 한 공간에 있는데 어떻게 접촉이 아예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마차에서 내릴 때는 손을 잡아 주긴 했지만.

어차피 장갑 낀 손으로 부축해 주는 주제에 눈을 마주치려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오늘 아침이었다.

줄리엣은 그가 왜 기분이 상해 보이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레녹스는 6개월간 곁에 남으라고 했지 예전처럼 비위를 맞추라고는 하지 않았다.

“제가 만지는 게 싫으시면 앞으로는 그냥 말로 해 주세요.”

“그건 ”

레녹스는 뭔가 말할 듯하다가 멈칫했다.

“…… 싫다고 한 적 없어.”

“그럼요?”

“그보다.”

레녹스가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 자작 놈이 떠났다던데."

"아, 그거요.”

소문이 빠르기도 했다.

줄리엣은 레녹스가 대부인의 저택에 사람을 몇이나 심어 두었을까 생각했다.

"잘됐죠?”

줄리엣은 활짝 웃었다.

반대로 레녹스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쫓겨난 푸실리 자작이 발작을 을일으켰다는 보고를 들은 순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레녹스는 그게 줄리엣이 꾸민 일임을 눈치했을 터였다.

그러나 줄리엣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레녹스는 자작에게 공개적으로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없으니 뒤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리겠단 작정이었겠지만'줄리엣은 굳이 그의 손을 빌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줄리엣은 푸실리 자작을 좀 더 살려 둘 계산이었다. 자작은 아직 쓸모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줄리엣을 잠시 노려보긴 했지만 레녹스는 한 발 물러났다.

“됐어. 그만 가지."

"어딜요?”

“화랑에.”

“그림 사시게요?”

“…… 네가 좋아한다던데."

“누가 그래요?”

"엘리엇이.”

이번에는 줄리엣이 당황해 멈춰.

섰다.

“저 그림 별로 안 좋아해요.”

“......."

사는 걸 좋아하지.

그림은 훌륭한 투자 수단이었다.

사실 보는 것도 꽤 좋아하긴 하지만, 줄리엣은 레녹스가 그런 취미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음악회는 전시회는 줄리엣은 지루한 행사가 끝날 때까지 그의 눈치를 살피는데 이골이 났다.

“젠장. 그럼 뭘 하고 싶은데?"

뭘 하고 싶으냐고?

줄리엣은 황당해 말문이 막혔다.

왜 이 남자가 안 하던 짓을 하지?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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