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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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줄리엣은 어둑한 방안에 앉아 있었다.
'……놀랍지도 않지.'
줄리엣은 얇은 종이 한 장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이 계약서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몇 달 전 줄리엣이 그에게 돌려주었던 바로 그 계약서였다.
한 단락이 추가되었을 뿐, 기본적으로 같은 내용이었다.
기간은 여섯 달.
계약을 6개월 연장하는 대가로 레녹스는 그녀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이 계약에서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손해 볼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제안이었다.
사실 줄리엣은 그가 주겠다고 말한 것들에는 큰 기대가 없었다.
'스노우드롭'이 나비들을 불러내는 은 열쇠의 이름이라는 것 정도는 이제 줄리엣도 알았다.
비록 정보 길드를 아무리 닦달해도 그 이상의 정보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고?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레녹스가 말한 기간이었다.
'6개월이라.'
줄리엣은 가만히 남은 날짜를 헤아렸다.
그가 약속한 기간이 지나면 줄리엣은 스물다섯 살의 늦여름, 혹은 이른 가을을 맞고 있을 터였다.
팔랑.
줄리엣이 계약서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나비두어 마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거울 주변을 나풀거리던 나비 한 마리가 종이 위에 내려앉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읽는 것을 훼방 놓기라도 하듯, 종이 위에 내려앉아 날개를 파닥였다.
(할거야? 서명.)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줄리엣은 피식 웃었다.
“이제 다시 나랑 말하기로 한 거야?”
나비들이 다시 말을 걸어온 것은 눈 덮인 숲에서 돌아온 이래로 처음이었다.
(우리. 똑똑해.)
(기억해. 전부.)
(인간, 남자. 나빠.)
(계약자. 울었어. 많이.)
(어.)
나비들은 묵언 수행에 질렸다는 듯 앞다투어 말을 쏟아 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줄리엣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반년만 예전처럼 지내면 너희 비밀을 알려 주겠대.”
(.....)
“레녹스도 너희 이름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나는 몰랐다는 게 말이 돼?”
줄리엣은 슬쩍 구슬리듯 말했다.
“너희가 처음부터 알려 줬더라면 이런 계약을 할 필요도 없었을 거 아냐.”
(.......)
“또 나랑 말하기 싫어졌어?"
한참 만에 나비들이 내놓은 말은 이랬다.
(계약자. 안. 물어봤어.)
(안.)
기가 막혔다.
다섯 살 어린애가 거짓말해도 이보다는 낫겠다.
“그럼 왜 돌아왔어?"
(가지. 않았어!)
(처음부터!)
(있었어! 여기.>
그 목소리는 퍽 억울하게 들리 기까지 했다.
줄리엣은 조금 놀랐다. 나비들이 칭얼거리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드문일이었다.
(나빠! 그 목걸이!)
“목걸이?”
제노비아의 소울스톤을 말하는 건가?
(그 인간 남자도! 늑대도!)
(계약자야.)
(계약자야.)
(그것이 너를 노리고 있어.)
(우리가 너를 지켜 줄 수 있어.)
(나 안하지만 인간 남자나 늑대는 안돼.)
(방해만 돼!)
줄리엣은 숨을 죽였다.
나비들이 이렇게나 유창하게 말을 쏟아 내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한 징조였다.
(우리. 똑똑해!)
(그러니까. 기억해.)
나비 한 마리가 그녀의 손등 위에 내려앉아 속삭였다.
(6개월, 반년 뒤.)
(네가 죽던 날.)
줄리엣은 흠칫했다.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너희가 어떻게 알 알아?”
그건 줄리엣이 줄곧 고민하고 있던 문제였다.
6개월 뒤의 늦여름.
전생의 그녀가 죽은 것도 그 계절이었다.
하지만 회귀 전의 삶에서 줄리 엣은 나비들을 만난 적 없다. 그러니까 이 마물들은 그녀의 전생을 알 리가 없다.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
"대답해!”
날카롭게 소리치자 나비들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우리는 알아!)
(하지만 우리는 말할 수 없게 돼 있어!)
(그게 '그것'이 건……….)
유창하던 나비들의 말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다시 더듬더듬단어를 나열했다.
(계약자. 화내면. 안 돼.)
(. 안 돼.)
(우리. 속이지. 않았어.)
속인 건, 우리. 아니야.)
화르륵!
갑작스레 나비들은 일제히 푸른 불꽃에 휩싸이더니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줄리엣은 이 현상의 의미를 알았다.
역소환이다.
어디까지나 차원 너머의 존재인 나비들이 지나치게 그녀의 세계에 간섭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는 멀쩡하게 다시 나타나므로 줄리엣은 나비들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줄리엣은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조금 전 나비들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속인 건 '우리'가 아니라고?
그럼 누가, 무엇을 속였다는 걸까.
*
아래층의 응접실로 내려온 줄리 엣은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전날 저녁까지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히익!”
어쩐지 살금살금 도둑걸음으로 걷던 사람들은 계단을 내려오는 줄리엣을 보고는 기겁하는 눈치였다.
줄리엣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곤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엘리엇.”
공작가의 비서인 엘리엇이었다.
“자, 잘 지내셨지요, 줄리엣양?”
"네, 덕분에요.”
“전하께 급한 결재가 필요한 사안이 있어서, 저희가 잠시……."
엘리엇이 변명하듯 말했다.
“절대로 전하를 오래 귀찮게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렴요!"
아하.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엘리엇을 보고서야 줄리엣은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아챘다.
북부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으니 공작성의 행정부 전체가 그를 쫓아 내려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레녹스가 일거리에 파묻히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어차피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건 익숙했다.
“전하는 안에 계세요?"
"아, 예. 서재에 계십니다.”
“그럼 저는 일레나 대부인을 뵙고 올게요.”
남부에 머무는 동안은 대부인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니, 줄리엣은 어제 저녁에 벌어진 일을 대부인에게 설명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점심 전에는 돌아올 거예요."
줄리엣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별장을 나섰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엘리엇이 그녀를 쫓아 나오더니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런 엘리엇을 물끄러미 보던 줄리엣이 불쑥 말했다.
"엘리엇.”
“예, 아가씨.”
“정원에 있는 수반이 예쁘던데요.”
“그렇지요? 역시, 아가씨가 좋아하실 줄……….”
아차.
무심코 반갑게 아는 척을 했던 엘리엇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황급히 줄리엣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생각해 보니까 여름 별궁에 있던 거랑 모양이 똑같더라고요."
“그, 그렇지요.”
왜 진즉 알아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 예!”
줄리엣을 태운 마차는 별장의 진입로를 빠져나왔다.
대부인의 저택까지 가는 동안 줄리엣은 조심스레 나비들을 불러내 보았다.
소환된 작은 나비들은 멀쩡하게 파닥거렸지만,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다시 말이 없었다.
일레나 대부인의 저택까지는 금방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줄리엣은 힐끔 저택 앞에 세워진 짐마차 한 대를 보았다.
대부인의 손님들 중 한 명이 떠날 채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줄리엣!”
밝은 얼굴의 엠마가 쪼르르 나와 반겨 주었다. 엠마는 파격적일 만큼 샛노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부르러 가려던 중이었어요.”
“저를요?”
줄리엣은 엠마의 환대가 조금 당황스러웠다.
"네!"
그러나 엠마는 다짜고짜 줄리엣의 팔짱을 끼고 저택 후원의 온 실로 끌고 갔다.
일레나 대부인의 온실은 모나드백작가의 것보다 세 배는 크고 훌륭했다. 남부 특유의 알록달록한 꽃나무들이 잔뜩 있어서 이국적인 정취를 풍겼다.
“할머니가 줄리엣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대요.”
엠마는 어쩐지 신이 난 기색이었다.
"왔구나.”
“좋은 아침이에요, 대부인."
온실 한가운데 넓은 티테이블을 홀로 차지하고 앉아 있던 일레나 대부인이 줄리엣을 보고 아는 척했다.
“앉거라.”
줄리엣과 엠마가 자리에 앉자 일레나 대부인은 끙 하더니 짧게 말했다.
“어제 있었던 일은…… 내가 미안하구나, 줄리엣.”
줄리엣은 조금 놀랐다.
사실 그녀는 대뜸 검을 들고 난 입한 칼라일 공작 때문에 일레나 대부인이 화가 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은 순전히 푸실리 자작의 추잡한 손버릇 때문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이 아는 일레나 대부인은 고루한 옛날 사람이라, 푸실리 자작의 편을 들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대부인의 잘못도 아닌걸요.”
“그래도 내가 사과해야지. 내가 그딴 추잡한 놈팡이를 손님이랍시고 내 집에 들였으니."
줄리엣은 엠마가 발랄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도 대부인이 왜 잔소리를 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푸실리 자작은 내 단단히 조치해 두었다. 다시는 남부 사교계에 발을 들이지 못할게야.”
“자작을 추방하신 건가요?”
“그렇지.”
추방이라. 꽤나 단호한 대처였 였다. 하지만 저지른 짓에 비하면 가벼운 벌이 아닐까?
줄리엣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일레나 대부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칼라일 공작이 자작의 신병을 넘겨 달라고 하더구나.”
이게 본론이었구나.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