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레녹스는 저보다 한참 작은 여자의 손에 이끌려 홀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걷는 내내 줄리엣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제 손목을 붙든 손과 앞서 걷는 여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줄리엣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조금 떨어진 한적한 테라스였다.
달칵.
테라스의 문을 닫기 위해 줄리 엣이 그의 손을 놓고 돌아서는 순간, 레녹스는 아쉬움마저 느꼈다.
온기가 남은 손목이 묘하게 저 릿했다.
아무리 남부라도 저녁 공기가 꽤나 쌀쌀했다. 레녹스는 겉옷이라도 건네주고 싶었으나 줄리엣이 받을 것 같지 않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야 줄리엣은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도움은 필요 없었어요."
“.……그게 도와준 사람에게 할 소린가?”
빈정거리는 물음이 먼저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레녹스칼라일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줄리엣은 그의 도움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신이 순간의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뛰어든 것뿐.
돌이켜보면 매번 그랬다. '성가 시게 하지 않겠다.'는 말이 자기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제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끼어들지 마세요......"
바로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레녹스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지금 매달리는 쪽은 그였다.
줄리엣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단번에 물었다. 그녀는 돌려 묻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별장도 사들이셨나요?"
“놀라지도 않는군.”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커튼 색이나 가구, 은 접시에 담겨 나오는 과일 하나까지도 모두 줄리엣의 취향에 꼭 맞춘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매년 그들이 시간을 보내던 여름 별궁을 많이 닮아 있었다.
“제가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레녹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홀에서 그를 발견하고도 줄리엣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줄리엣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저한테 뭘 원하세요?”
별장을 꾸미고, 대부인을 시켜 그녀를 남부로 초대하고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벌인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레녹스는 대답 대신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보면 알아."
레녹스는 설명 대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아니고서는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녀가 저를 다시 만나 줄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가 내민 것을 받아 든 줄리엣은 곧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이걸 왜…….”
줄리엣도 아는 물건이었다.
7년 전, 그녀가 써 달라고 했던 계약서였으니까.
“네가 멋대로 끝냈으니 나한테도 바로잡을 기회를 줘야 공정하지. 안 그래?”
줄리엣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네가 좋아하는 그 계약, 다시 하자는 거야. 처음부터 전부.”
눈을 깜박이던 줄리엣은 그제야 얼마 전 춤을 청하며 레녹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계약 연장.
"전하, 어디 아프세요?”
경악한 얼굴로 줄리엣이 제정신 이냐는 말을 돌려 했다.
“우리 계약은 끝났어요. 그렇게 합의 하셨잖아요.”
“'원만한 합의'랬잖아. 나는 합의한 기억이 없는데.”
어린애도 아니고.
그의 억지에 줄리엣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야….”
스스로 듣기에도 떼쓰는 것처럼 들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전 홀에서 벌어진 일만 해도 그렇다.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저딴 벌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일단은 줄리엣을 제 옆에 붙잡아 두는 것이 먼저였다.
이게 그가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그때 연회장에서의 일 이후로 그는 깨달았다.
어떤 말로 과거에 대해 속죄한다 한들, 줄리엣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줄리엣은 애초에 그가 과거를 를바로 잡고 싶어 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익숙한 방식이 나았다. 용서니 속죄니 그런 말랑하고 온건한 방식은 그들에게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
'협박과 계약이 훨씬 빠르지.'
레녹스 칼라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제 옆에 다시 붙들어 놓을 수 있는 방도를 떠올리려 했다.
그래서 레녹스는 최대한 줄리엣의 사고방식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그가 아는 줄리엣은 의외로 고지식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를 정도로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약이나 약속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맞았다. 줄리엣은 마지못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미친 소리를 아예 못들은 척 무시하진 않았다.
“저는 또 몇 년이나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전하."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레녹스는 애써 담담히 말했다.
줄리엣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있다고는 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반년쯤이라면 줄리엣이 저를 밀어내지 못할 거라고 계산했다.
어차피 몇 달 뒤에 제가 멀쩡히 살아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레녹스는 주치의가 경고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멀쩡하더라도 무슨 부작용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고, 반년은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여섯 달.”
“6개월 후에는 깨끗이 네 눈앞에서 사라져 주지."
6개월.
그 단어에 줄리엣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러나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바람에 레녹스는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네게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닐 텐데.”
레녹스는 어린애를 달래듯 줄리 엣에게 말했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딱 여섯 달만 지내 주면 돼.”
저를 견뎌 내면 별장이든 재산이든 뭐든 주겠노라고. 그는 애걸하듯 매달렸다.
사실 남부의 별장은 이 일과는 별개의 사안이었다.
일레나 대부인을 통해서라도 억지로 줄리엣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줄리엣이 그의 짓임을 눈치채 버린 이상 이런 조건이라도 달지 않으면 받아 주지 않을 게 뻔했다.
“.… 제가 거절하면요?" ”
“그러지 않을 거야.”
레녹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네게 소중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을 테니까.”
레녹스는 그녀의 눈이 경악과 경멸로 물드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가는 팔목을 그러쥐었다.
“반년이면 돼. 그다음엔 네가 알고 싶어 하던 걸 전부 말해 줄 테니까.”
“……제가 뭘 알고 싶어 하는데요?”
“스노우드롭.”
그 말에 줄리엣이 흠칫했다.
“그 이름을…… 왜 알고 계세요?”
“너는 항상 네 나비들에 대해 알고 싶어 했잖아."
줄리엣의 얼굴에 의심이 스쳤다.
하지만 레녹스는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초조함을 숨기려고 애쓰며.
줄리엣이 계약에 약하다면,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협박과 회유였다.
결혼도 싫다, 공작성도 싫다는 여자.
그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걸 거부하고 도망치기만 하는 여자를 어떻게든 제 곁에 붙들어 놓기 위해 궁리해 낸 방법이 비참하게도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왜요?”
줄리엣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제가 아직도 전하께 가치가 있나요?”
그 말에는 레녹스도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 드릴 게 없어요. 제게 뭘 바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얼핏 성의 없이 들리겠지만 레녹스는 정말로 그것 외에는 할말이 없었다.
지난 몇 달간 그 스스로도 끊임없이 되뇌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정이라도 들었나 보지.”
그가 원하는 것은 줄리엣을 제 곁에 붙잡아 두는 것뿐이었다.
그 이상의 일이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전하.”
한참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줄리엣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그러나 줄리엣은 말 대신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춰 주면서, 레녹스는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가 채 묻기도 전에 줄리엣이 서투르게 입술을 맞대어 왔던 것이다.
입맞춤이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눈치를 살피듯 겨우 입술을 가져 다 대었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의 이성을 날리기에는 충분했다.
“....… 젠장.”
잠시 후 줄리엣이 숨을 할딱이며 그를 밀어내지만 않았어도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게 뻔했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레녹스는 성마른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숨을 고르던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바라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닌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자신이 듣기에도 설득력 없었다.
험악한 얼굴로 줄리엣의 어깨를 떼어 놓은 레녹스는 조금 전의 자신을 죽이고 싶어졌다.
“네가 싫다는 건 안 해.”
퍽이나 믿겠다.
“알아들어? 고작 이딴 것 때문이 아니라…!”
말을 할수록 엉망이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윽박지르려던 게 아니었다. 지금 매달려야 하는 쪽은 그였다. 그러나 줄리엣의 표정은 은읽을 수 없었고, 그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알겠어요.”
“뭐?”
줄리엣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어깨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내리게 했다.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손해 보는 조건은 아니니까요.”
레녹스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저게 지금 승낙인가?
"대신 약속해 주세요.”
“뭘.”
줄리엣은 꽤 단호한 투로 말했다.
“6개월 후에는 저 계약서로 협박하셔도 소용없어요.”
“.……좋아. 약속하지."
레녹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줄리엣의 조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사지를 찢겠다느니, 목을 베겠다느니 협박하면 안돼요.”
레녹스는 조금 불만스러웠다.
홀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건 협박이 아니었다.
“왜?”
“살인은 나쁘니까요."
줄리엣은 웃지도 않고 엄하게 말했다.
그러나 레녹스는 항의하고 싶었다. 아까의 버러지는 그의 기준에 인간이 아니었다.
“그럼 인간이 아니면 괜찮은 건가?”
“전하.”
“.……알겠어. 알겠다고."
마지못해 대답한 레녹스는 줄리 엣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무래도 날씨가 쌀쌀한 게 마음에 걸렸다. 레녹스는 그녀가 손추가뿌리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의외로 줄리엣은 그를 따라 실내로 돌아왔다.
손안의 익숙한 온기가 만족스러웠다. 레녹스는 줄리엣이 보지 못하는 사이 조금 웃었다.
줄리엣은 분명 '다른 사람들 앞에서'라고 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