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레녹스는 어이가 없어 조금 웃었다.
'교활한 노인네 같으니.'
그는 지금 일레나 대부인이 개최한 연주회에 있었다.
악단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홀의 아래층 플로어에 몰려있었다.
일레나 대부인은 바빠서 오늘 밤 남부를 떠나겠다는 그를 부득불 붙잡았다.
'좋은 연주자를 데려왔으니 꼭 듣고 가라'며 끈질기게 권했다.
심지어 사람들 눈에 띄기 싫다면, 2층을 개방해 둘 테니 조용히 와서 듣고 가도 된다고 제안했다.
칼라일 공작은 음악이니 미술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전무했다.
하지만 떠나기 전 잠시 들러 줄리엣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녹스는 오늘밤의 행사가 음악 감상회 따위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이건 대부인이 꾸며 둔 연극 무대였다.
일레나 대부인은 그가 기대어 서 있던 난간 쪽을 한번 힐끔 보더니 곁에 선 줄리엣에게 말을 걸었다.
“이리 오렴 줄리엣. 네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신사분들이 많단다.”
그러고는 줄리엣을 끌고 사람들 사이를 누볐다.
연주회라더니 연주는 뒷전이고 줄리엣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소개하기 바빴다.
장소가 달라져서 그런 것인지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져서인지, 줄리엣의 얼굴은 평소보다 편안해 보였다.
등이 훤히 드러나는 원색의 홀터넥 드레스를 입고 숄을 걸친 줄리엣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방긋방긋 웃으며 앞다투어 다가오는 얼간이들의 인사를 상냥하게도 받아 주었다.
"듣던 대로 눈부시게 아름다우시네요.”
“일레나 대부인께서 이런 분을 소개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화기애애한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레녹스는 그만 심사가 뒤틀렸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줄리엣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호감을 사는 타입이었다.
칼라일 공작의 정부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줄리엣은 훨씬 밝고 따뜻한 세계에서 살았을 터였다.
"내 조카손녀뻘 아이랍니다. 아시죠? 그, 모나드 백작의 …….”
“알고말고요. 참 훌륭한 가문인데 말이죠.”
“그래요. 저 애도 하루빨리 제 짝을 만나야 할 텐데 말이죠.”
줄리엣이 사람들에게 둘러 싸이는 것을 본 일레나 대부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보란 듯 공작이 서 있던 2층을 다시 힐끔 곁눈질했다.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교활한 노부인의 행동에 레녹스는 어이가 없었다. 너무 노골적이라 되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레녹스는 정신없이 줄리엣을 훑어 대는 얼간이들의 눈을 당장이라도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줄리엣이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걸 알아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레녹스는 저런 도발에 넘어가 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줄리엣을 남부에 데려다 놓고, 잘 지내는 것을 잠시 확인한 다음 조금 지켜보다가 자리를 뜰생각이었다.
“크흠"
그러나 다음 순간,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줄리엣을 둘러싸고 있던 얼간이들 중 하나가 샴페인 잔을 향해 슬쩍 손을 뻗는 척하면서 그녀의 드러난 등허리를 더듬었던 것이다.
생글생글 웃고 있던 줄리엣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멈칫한 줄리엣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친절한 사람들에게 잔뜩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대부인이 바로 지척에서 보고 있는 장소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
니.
“어흠……!”
그러나 줄리엣이 파렴치한의 얼굴을 확인하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음악이 뚝 끊겼다.
쿠당탕!
"아악!”
어리둥절한 얼굴의 사람들은 대뜸 홀 바닥에 쓰러진 푸실리 자작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난입한 낯선 남자 하나도.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누군 줄 알고……!”
바닥에 내쳐진 푸실리 자작이 이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악! 의, 의사 불러! 갈비뼈가……!”
자작이 옆구리를 붙잡고 신음했다.
그러나 손님들은 더 이상 자작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칼라일 공작……?”
“뭐, 뭣?”
“아니, 공작!”
가장 당황한 것은 일레나 대부 인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부인은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공작이 검을 빼 들고 제 손님들 중 하나를 위협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안목이 형편 없으시군요, 대부인.”
공작은 사납게 대부인을 노려보았다.
“두 발로 걷는다고 다 인간은 아닐 텐데.”
“그게 무슨 말이오?”
“저 새끼의 목을 잘라 가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히익!
푸실리 자작이 기겁했다.
“공작! 최소한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니요!”
“자작이 그대에게 무슨 무례라도 저질렀소?”
레녹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한 것은 그의 옆에 서 있던 줄리엣이었다.
“무례를 당한 건 저예요, 대부인.”
“줄리엣?”
"조용히 해.”
레녹스는 그녀를 제 뒤로 끌어 당겼다. 그러나 줄리엣은 그를 무시하고 대부인을 향해 말했다.
“방금 저……… 인간이 제 허리를 더듬었어요. 실수는 절대 아니었죠.”
사람들이 술렁였다.
화살은 푸실리 자작에게로 옮겨갔다.
“푸실리 자작! 저 말이 사실이 오?”
“그, 그게 아니라……."
레녹스는 슬슬 짜증이 치밀었 었다.
그는 놀란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줄리엣을 새삼스레 훑어보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변명을 궁리하던 푸실리 자작이 아무 말이나 지껄여 댔다.
“하! 애초에 그런 옷을 입으니, 문제지! 그렇게 등을 드러내고 있는데, 거 실수로 손 좀 닿을 수 있는 거 아니요!"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정신을 차린 푸실리 자작은 실수라고 우기기로 한 모양이었다.
레녹스는 그 헛소리를 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일레나 대부 인에게 양해를 구할 가치도 없었다.
“그래서?"
그러나 뒤에서 잠자코 있던 줄리엣이 레녹스를 밀어 내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필 이런 드레스를 입고 있던 내 탓이다?"
“....…바로 그 말이요! 일레나 대부인, 보십시오! 대부인께서 항상 말씀하셨잖습니까. 레이디라면 모름지기 '정숙한 옷차림을 해야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그 말에 일레나 대부인은 멈칫했다.
보수적인 대부인은 언제나 자신의 손녀들에게도 노출이 심한 드레스는 삼가도록 단속했다.
대부인은 오늘 밤 줄리엣의 드레스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던게 사실이었다.
“그건.….”
그러나 줄리엣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럼 '정숙한 옷차림'이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죠?"
“다, 당연히 그렇……."
"아니에요!”
그때, 사람들 틈에서 입을 틀어 막고 있던 엠마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조모인 일레나 대부인의 곁으로 달려가 일러바쳤다.
“할머니, 저도 겪었어요! 푸실리자작이 아까부터 손님들을 더듬고 다녔는걸요!”
엠마가 분통에 차서 외쳤다.
일레나 대부인이 흠칫했다.
“엠마, 그게 정말이냐?”
“네! 그리고 모나드 백작님의지적이 맞아요!”
엠마가 씩씩거렸다.
“제 옷이요! 할머니가 시키신 대로 갈아입었잖아요!”
엠마는 엄한 일레나 대부인의 눈총을 받아, 연주회가 시작되기 직전 목 끝까지 올라오는 얌전한 비둘기 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와야 했었다.
“....… 저도 봤습니다!" ”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자작이 해고한 하녀들이…….”
사람들이 저마다 보고 들은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연주회장은 성난 사람들의 성토장으로 돌변했다.
"이, 이건 모함입니다. 대부인!"
“세상에…."
대부인은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할머니!”
사람들이 술렁였다.
무슨 무대 위의 구경거리라도 된 모양새라 레녹스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구구절절 시비를 가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그저 저 새끼의 사지를 잘라 효수하는 일뿐이었다.
“전하.”
그러나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 뒤에서 줄리엣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흠칫하는 틈을 타서 줄리 엣이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따라오세요.”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