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02화 (99/229)

102화.

**

줄리엣은 이동하는 마차 안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었다.

[‘달리아’라는 이름의 성직자는 찾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줄리엣이 정보 길드에 의뢰했던 내용의 보고서였다.

혹시나 해서 달리아의 인상착의를 최대한 상세히 알려 주고 이런 여자는 없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다른 이름을 쓰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인상착의의 여자도 본 사람이 없답니다.]

줄리엣은 잠시 창밖을 내다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빠르게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무슨 유령도 아니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기에는, 줄리엣은 분명 달리아를 마주쳤던 것이다.

세 번씩이나. 그것도 매번 다른 장소에서.

'정체가 뭐지?'

카르카손의 경매장에서 한 번, 루체른의 연회장에서 한 번. 그리고 얼마 전, 수도의 대신전에서도, 매번 장소가 달랐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꼭 그녀를 뒤쫓아 다니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확실하진 않지만…….'

혹시나 해서 길리엄 추기경에게 연락을 취해 물어봤지만 굉장히 화가 난 추기경으로부터 “종단에 그런 이름의 사제는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추기경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사제가 아닌데 사제 행세를 하고 있었다고?'

첫 번째 삶에서는 어떠했더라?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달리아는 법황 제바스티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등장했었다.

‘하지만 그 제바스티안은 이제 감옥에 있으니.’

혹시 그것 때문에 달리아가 나타나지 못하는 걸까?

“줄리엣, 뭘 그렇게 보세요?”

“아.”

줄리엣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어린 아가씨가 하나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엠마.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보다 곧 도착한대요!”

줄리엣은 엠마와 함께 남부로 가는 중이었다.

“곧 할머님을 뵐 수 있을 거예요.”

엠마가 기쁜 듯 말했다.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엠마의 의

‘할머님은 그 유명한 일레나 대부인이었다.'

일레나 린드버그.

흔히 일레나 대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노부인은 죽은 모나 드 백작 부부의 지인이었다.

얼마 전에는 줄리엣의 초대로 살롱에 참석해 그녀를 도와준 적도 있다.

일레나 대부인은 소문난 난봉꾼이었던 남편과 이혼해 버리고 지금은 친구들과 손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남부에 영지를 가진 대부인이 줄리엣을 초대한 것이다. '내 손녀랑 함께 와서 잠시 머물다 가지 않으련?' 하고, 줄리엣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잠시 복잡한 일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눈 덮인 숲에서 며칠 고생하다.

보니 추위는 지긋지긋했다.

사실 숲에서 로이의 형제에게 습격당했던 그 날 이후 로이도 엘자도 카티아의 숲으로 떠났고, 줄리엣은 아직 그들을 다시 본적 없었다.

그래서 때마침 수도에 머물고 있었던 대부인의 손녀, 엠마와 함께 남부로 떠나게 된 것이다.

제국의 수도가 서남부에 치우쳐 있긴 했지만, 사실 일레나 대부 인의 영지는 꽤 멀리 가야 했다.

그런데도 대부인은 통 크게 게이트를 통해 오라며 마차를 내주고 비용까지 지불해 주었다.

데뷔탕트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엠마는 명랑한 소녀였다.

“샬롯 언니가 곧 아기를 낳거든요!”

남부로 향하는 내내 엠마는 '샬롯 언니'의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대부인의 첫째 손녀인 샬롯은 아기를 낳기 위해 집안의 영지인 남부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제가 이모가 된대요!"

엠마는 마구 흥분한 눈치였다.

'귀여워라.'

“샬롯 언니의 아기가 태어나면, 정말 예뻐해 줄 거예요."

줄리엣은 엠마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이모를 가져 본 적은 없지만, 엠마라면 좋은 이모가 될 것 같았다.

***

남부는 누구나 별장 하나쯤은 가지고 싶어 하는 인기 있는 휴양지였다.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고풍스러운 저택들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모여 있었다.

매일 저녁이면 저택의 문을 활짝 열고 소규모의 음악회나 무도회가 벌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줄리엣은 일레나 대부인의 저택에 머무르지 못했다.

일레나 대부인이 내준 거처는 는그녀의 별장 내의 방 하나가 아니었다.

"아가씨가 머무르실 곳은 조금 더 가셔야 합니다."

점잖은 얼굴의 집사가 데려간 곳은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언덕 위에 위치한 작은 별장이었다.

"와!"

어리둥절한 얼굴로 쪼르르 따라왔던 엠마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할머니가 이 별장을 사들이셨어요? 어떻게? 언제?"

그냥 거처로 쓰라고 내주기에는 다소 과한 것 같은 규모였다. 규모는 아담했지만 공들인 게 분명한 정원이며, 분수며…….

“혼자 쓰기에는 조금 과한 것 같네요.”

줄리엣이 돌아보자 집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불편하실 테니 이곳에 머무르시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줄리엣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부인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예.”

집사가 돌아간 다음 엠마는 줄리엣의 짐을 푸는 걸 도와준다는 핑계로 남아 별장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할머니가 이 건물을 사들이 실줄은 몰랐어요. 전부터 탐내시긴 했지만 너무 비싸게 나왔다고 그러셨거든요. 분수도 있네?”

천천히 별장 안을 돌아보던 줄리엣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글쎄.’

정성껏 신경 썼다는 것이 곳곳에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한 번쯤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본 이상적인 집이었다.

햇살이 잘 드는 거실과 아늑한 침실들. 정원에는 분수와 잘 가꾼 꽃나무들이 가득했고, 심지어 커다란 개도 두 마리나 있었다.

돌아보다 보니 어쩐지 구조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꼭 누가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줄리엣은 응접실 테이블 위에서 과일이 가득 담긴 은 접시를 발견했다.

이 계절에 오직 남부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과일들이 그득했다. 큼직한 복숭아 하나를 집어는 줄리엣은 조금 서늘한 눈으로 집 안을 훑어보았다.

*

일레나 대부인은 응접실에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은회색 머리칼을 멋스럽게 넘긴 일레나 린드버그, 그녀는 한때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지만, 지금은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자신의 남부 영지에서 머무는 일이 많았다.

특히 요즘처럼 쌀쌀한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겨울을 나는 게 그녀의 취미였다.

그러나 사교계를 호령하던 대부인은 조금 긴장한 채 찻잔을 들었다.

일레나 대부인은 힐끔 눈앞의 청년을 건너다보았다.

그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황제보다도 대하기 까다로운 상대기도 했다.

“차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요, 공작.”

“괜찮습니다. 좋은 차군요.”

찻잔에 손도 대지 않은 주제에.

젊은 남자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손님의 신분이면서 응접실 의자에 앉은 모습이 마치 제 안방에라도 앉은 듯 여유가 넘쳤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이에 맞지 않는 관록이었다.

'흥, 어린 녀석이.'

일레나 대부인은 조금 입을 비죽거리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문이야 수없이 들었지만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대부인도 칼라일 공작과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서늘한 눈매 하며 흠잡을 데 없누구라도 돌아보지 않고는 못배길 만큼 인상적인 미남자였다.

이 균형 잡힌 체격 하며. 소문과는 달리 단정하다 못해 성스러운 외모였다.

무슨 까닭인지 왼손에 감긴 붕대가 유일한 흠이었는데, 그조차도 사람을 궁금하게 하는 요소였다. 칼라일 공작의 덧없는 연애사 따위에 수도의 귀족들이 열광할 만했다.

하지만 자고로 잘생긴 남자는 '얼굴값을 한다.'는 게 대부인의지론이었다. 그녀의 첫 남편처럼 말이다.

“내 전남편보다 인물이 훌륭하시구려. 듣던 것보다 나아.”

“과찬이십니다.”

흰소리에도 꼬박꼬박 존댓말로 대답했다. 노인 공경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생각보다 정중한 태도에 대부인은 조금 심술궂게 그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사실 죽은 모나드 백작 부부와 가까운 사이였던 대부인은 칼라일 공작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 잃고 고아가 된 애를 먼 북부로 데려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부인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약혼녀도 아닌 여자를 몇 년 동안 붙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진즉 놓아주기라도 했었어야지.'

전남편을 탈탈 털어 쫓아내긴 했지만, 일레나 대부인은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노인이었다.

쯧. 대부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랬으면 좋은 집안과 연을 맺게 도와줬을 텐데.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다고 했다. 칼라일 공작이 연회장에서 검을 빼 들었던 일화는 단 며칠만에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일레나 대부인은 그 이야기를 듣고 퍽 재밌어 했다.

'지난 수년 동안 모른 척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어쨌든 일레나 대부인이 생각을 바꿔 먹고 칼라일 공작의 수상한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그 사건 때문이었다.

“작고한 모나드 백작과 막역한 사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불쑥 칼라일 공작이 찾아 왔을 때, 일레나 대부인은 몹시 놀랐다. 그의 용건이란 것도 꽤나 수상쩍은 내용이었다.

“매입한 별장의 권리증입니다.”

값비싸기로 유명한 남부의 별장을 매입해, 며칠간 뜯어고치더니.

대뜸 줄리엣을 초대해 머물게 해달라고 했다.

“부인께서 적당한 시기에 줄리 엣에게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테이블 위에 서류 봉투를 밀어 놓으며 그가 말했다.

“핑계는 작고한 모나드 백작에게 진 빚이 있었다는 정도면 되겠군요.”

‘……이놈 봐라?'

아예 완벽하게 핑계까지 만들어왔다. 빈틈없는 태도에 일레나 대부인은 점점 더 흥미를 느꼈다.

“왜 직접 주지 않고?”

“줄리엣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고 공작은 잠시 멈칫했다. 얄미울 정도로 빈틈없어 보이던 남자가 처음으로 머뭇거리는 걸 대부인은 놓치지 않았다.

“…제가 주는 건 뭐든 받지 않을 겁니다.”

의외로 주제 파악도 정확히 하고 있었다.

일레나 대부인은 공작이 자리를 뜨기 전 공작에게 너그럽게 제안했다.

“원하신다면 남부에 있는 동안은 내 저택에 머물러도 좋소.”

그러나 칼라일 공작은 고개를 를 한 번 까딱하고는 그대로 응접실을 떠났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호의에 감사한다고만 했지,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대부인은 생략된 말을 알아들었다.

“쯧쯧.”

공작이 떠난 다음, 일레나 대부인은 퍽 즐거운 표정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때를 놓치고 괜한 짓을 한다니까. 하지만 이제 와 저러면 뭘 하나.

"마음이 식은 걸 무슨 수로 되돌리려고?”

방관자의 즐거움을 느끼며 대부인은 하녀에게 지시했다.

“얘야, 손님 명단 좀 가져오렴.

누가 아직 미혼이랬지?"

일단 공작의 요청을 들어주기는 했다만, 일레나 대부인은 마냥 공작을 도와주기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흥. 저도 속 좀 끓여 보라지."

일레나 대부인은 의미심장하게 후후 웃었다.

잊혀진 줄리엣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