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황제 부처는 칼라일 공작이 등장한 순간부터 노선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자애로운 양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줄리엣을 챙기기 시작했다.
“회복될 때까지 내 궁에서 함께 머무는 게 좋겠어요.”
황후가 호화로운 손님방까지 내주며 너그럽게 제안했다.
그 배려라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긴 했다. 따지고 보면 황궁에 늑대가 난입한 데에는 그녀도 얼마쯤 책임이 있었으니까.
다행히 황제 부부의 생각은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않은 것 같았다.
로이와 그의 일행들은 그레이엄을 붙잡아 돌아갔다. 하지만 줄리엣과 로이가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줄리엣은 일단 황후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굴기로 했다. 나중에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우선 잘 보여 두는 게 좋았다.
줄리엣은 황후가 골라 준 드레스를 입고 얌전히 연회장에 앉아 있었다.
낮에 있었던 소동으로 사람들은 그녀를 먼발치에서 두려운 눈으로 힐끔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조아리거나 아니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줄리엣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어, 모나드 백작님.”
대신 조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여 오기 시작했다.
"네?"
줄리엣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얌전하게 생긴 귀족 영애의 이름을 몰라서 대충 대꾸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얌전한 아가씨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외람되지만, 아침에 폐하를 알현한 신사분과는 어떤 사이신가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아가씨들은 부담스러웠지만 별다른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숨길 게 뭐 있나.
“친구예요.”
"어머, 그러셨군요!"
"라이칸슬로프와 친구가 되시다니, 대단해요!”
줄리엣은 지그시 아가씨들을 훑어보았다.
지난 몇 년간 별로 접해 보지 못한 유형들이라 신선했다.
줄리엣은 제 나이답게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귀족 아가씨들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 오는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네, 여행 중에 만났답니다.”
“어머나.”
예상했던 반응들이었다.
“저, 그러면 혹시 그분과는 미래를 약속한……?"
“아뇨, 그런 건 절대…….”
뭔가 이건 아닌데 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가던 무렵이었다.
“아닙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줄리엣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비딱하게 선남자가 그녀를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작 전하."
줄리엣은 예의 바르게 싱긋 웃으며 응대했다.
“저, 저희는 이만……."
줄리엣을 둘러싸고 귀엽게 수다를 떨던 아가씨들은 맹수와 마주친 초식동물처럼 후다닥 도망쳤다.
“제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레이디께 춤을 청하는 것뿐입니다.”
줄리엣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레녹스 칼라일이 춤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공작가 사람들이 듣는다면 놀라 뒤집힐 말이었다.
하지만 그를 훑어본 줄리엣은 그의 착장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히 차려입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왼손에 감긴 붕대를 제외하곤 완벽했다. 정말로 무도회에 온 사람처럼.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제가 거절하면요?"
“제가 백작이라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가 웃지도 않고 말했다.
협박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중한 말투였지만 줄리엣은 문득 불안해졌다.
".....…좋아요.”
그와 춤을 춰 본 것은 까마득한 예전의 일이었다.
줄리엣은 의도를 알 수 없는 남자를 힐끔 보면서 실수인 척 발등이라도 꽉 밟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레녹스는 남들 앞에서 춤추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줄리엣은 몇 번 그와 춤 춘 적 있었다.
사실, 그는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잘했다.
플로어로 걸어가는 동안 춤곡이 느린 곡조로 바뀌었다. 애초에 그가 줄리엣에게 말을 건 순간부터 사방이 조용해져 있었다.
쏟아지는 시선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줄리엣은 이 광경이 남들 눈에는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를 생각했다.
"대답해 봐, 줄리엣.”
그러나 그녀는 춤곡이 시작되고 첫 스텝을 뗀 순간, 호기심을 못이기고 그를 따라 손을 잡은 것을 후회했다.
“그 늑대 새끼가 왕비 자리라도 약조하던가?”
손과 허리를 내맡긴 채로는, 그녀를 지그시 노려보는 남자에게서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줄리엣은 냉담하게 대꾸했다.
“그렇대도 전하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질문할 권리 없으세 세요.”
“이런.”
그러나 레녹스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생명의 은인에게 할 소리는 아니군.”
“은인?”
“나한테 갚아야 할 빚이 있잖아.”
줄리엣은 잠시 고민하다 깨달았다.
"아.”
사냥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가 아니었더라면 눈 눈덮인 숲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랐다. 황궁 사람들은 칼라일공작이 도착한 다음에야 그녀를 찾아 나섰다고 들었으니까.
줄리엣은 마지못해 물었다.
“그래서 뭘 바라세요?”
“계약 연장.”
줄리엣은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작게 실소했다.
“그 얘기 하려고 춤을 청하셨어요?”
그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테니까. 더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끝까지 들어.”
그러나 레녹스는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당기며 속삭였다.
“네가 들고 왔던 계약서를 앞으로 세 달간 연장하면, 그 이후에는 깔끔히 놓아주지."
“왜 그래야 하죠?
“.…… 그다음엔 네가 갖고 싶어하는 걸 얻게 될 테니까."
줄리엣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
“전하는 제게 주실 수 있는 게 없으세요.”
“그렇지 않을 텐데. 잘 생각해 봐.”
줄리엣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뭘 주겠다는 걸까? 깔끔한 이별?
“제가 거절하면요?”
"그러지 않을 거야.”
레녹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네게 소중한 걸 잃고 싶지 않을 테니까.”
줄리엣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이마가 찌푸려졌다.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세요?"
어린애도 아니고.
줄리엣이 한숨짓듯 속삭였다.
“선후 관계가 잘못됐네.”
레녹스가 싱긋 웃으며 태연히 받아쳤다.
"네가 자꾸 나를 유치하게 만드는 거지.”
줄리엣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그가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이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줄리엣 모나드라는 여자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웃음을 터뜨리는지. 혹은 얼마나 달콤한 소리로 흐느끼며 우는지.
7년은 긴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존재가 당연해지고 흥미를 잃어버리기에 충분히 길었다. 그래서 질리도록 익숙해졌다.
고 생각했다.
더 이상 궁금한 것도 흥미로울 것도 없을 정도로, 그러나 그의 자만심은 가볍게 박살 났다.
그를 매정하게 속이고 달아난 여자는 7년간 나붓이 안겨 오던 줄리엣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처음으로 줄리엣이 그에게서 달아났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배신감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줄리엣 모나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때, 짧은 춤곡이 끝나고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전하.”
얕은 한숨을 내쉰 줄리엣은 어린애를 달래듯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드릴 게 없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게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줄리엣은 조곤조곤 그를 설득했다.
“전하가 그러셨잖아요. 계약이란건 주고받을 게 있어야 성립한다고, 그러니까”
“있어.”
레녹스는 힘주어 말하며 줄리엣의 손등을 붙잡았다.
줄리엣은 조금 혼란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지금처럼, 줄리엣은 종종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있다뇨?”
아슬아슬한 푸른 눈으로 그를 응시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그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여자가 사라질 것처럼 조바심이 났다.
당장 끌어안고 존재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것이었다.
“네가 나한테 줘야 할 게 있다고.”
그러나 간신히 갈증을 억누르며 레녹스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더없이 정중한 태도였다.
“전하.”
“그러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나 손등에 입 맞춘 채 그녀를 올려다보는 붉은 눈은 더없이 불손하고 위압적이었다.
"알잖아, 줄리엣.”
흠 잡을 데 없는 태도로 줄리엣을 다시 제자리로 에스코트하면서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난 인내심이 별로 없거든.”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