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00화 (97/229)

100화.

*

“차인 건 내 쪽이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틀린가?"

그를 발견한 줄리엣이 놀라지도 않고 조용히 눈을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레녹스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한 무리의 사람들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이리 떼처럼 교활한 것들.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준으로 인간도 도못 되는 존재들이 여자 하나를 둘러싸고 온갖 모욕적인 소리를 를지껄여 대는 순간, 눈앞의 것들이 인간이든 짐승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정작 저는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까, 또다시 등을 돌릴까 까두려워 차마 세게 움켜쥐지도 못하는 여자를 감히 저들 좋은 대로 입에 올리는 꼴들을 보고 있으니 부아가 치밀었다.

“언제부터 내 가문의 일을 멋대로 입에 올려 댔지?"

조금 전까지 이리 떼처럼 여자 하나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하던 자들이 파랗게 질린 채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오, 오해십니다. 공작……!"

“저희는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내 가문의 명예를 네깟 것들의 더러운 세 치 혀로 보상할 수 있을 것 같나?"

입을 놀리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 하찮은 몸뚱이로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쳐 주지.”

캉!

레녹스는 기립해 있던 경비병의 검을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뽑아라.”

히익.

잠시 어안이 벙벙해 그 광경을 쳐다보던 자들이 일제히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이해했다.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결투하는 것. 그리고 그건 친절히, 합법적인 방법으로 죽여 주겠다는 소리였다.

제국법상 결투 및 영지전으로 인한 살인은 죄가 아니었다.

그들의 눈앞에 선 남자는 스무살도 채 되기 전부터 소드마스터로 악명을 떨쳤던 자였다.

여기저기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 공……!”

“뭐하나. 검을 들지 않고."

느긋하게 재촉하는 음성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직하고 높낮이가 없었다.

하지만 덜덜 떠는 자들은 도살장에 몰린 가축들처럼 도망갈 곳조차 찾지 못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연회장에 들어기 때문이다.

온 공작이 문을 등지고 서 있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가장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부터 차례대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여기저기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레녹스 칼라일의 서릿발 같은 표정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 어깨에 얹은 물건으로는 생각이라는 걸 못하는 모양이지?"

“예……?”

“정작 누구한테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그럴 바엔 떼어 버리는 게 낫겠군.”

스릉.

칼라일 공작의 새카만 검날이 금방이라도 휘둘러질 듯 시퍼런 빛을 반사했다.

“그, 그게 무슨……….”

잠시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은 조금 후에야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모나드 영애!”

“백작님!”

“목숨만 살려 주시면 뭐든지 다하겠습니다!”

다급히 방향을 바꿔 무릎걸음으로 기어간 귀족들이 줄리엣의 앞에 고개를 조아려 댔다.

꽤나 보기 우스운 광경이었으나 그들을 내려다보던 줄리엣의 얼굴에는 웃음기 비슷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물 바람으로 호소했으나 줄리 엣의 입에서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검을 든 남자가 힐끔 좌중을 훑었다.

“용서를 구한다더니 말뿐인가?"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곡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아, 아닙니다! 모나드 영애, 다시는 건방지게 영애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절대로……!”

“제발, 저희 좀 살려 주십…"

“됐어요. 그만하세요."

한 편의 희극 같은 광경은 줄리 엣이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칼라일 공작은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줄리엣은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당장 나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 모나드 영애. 아니, 백작각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다음에 저희 영지에 방문하시.

면…….”

“입 다물고 꺼져요. 당장."

미리 짜 놓기라도 한 것처럼, 지은 죄가 있는 자들은 연회장 안에 조금도 더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쾅.

그들은 우르르 빠져나갔고, 문이 닫힌 다음 빈 연회장에 남은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황궁의 경비병들과 연회를 준비하던 시종들 몇몇을 제외하면 사실 단둘뿐이었다.

검을 집어넣은 남자는 천천히 플로어를 가로질렀다.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여자에게 다가간 레녹스는 그녀가 할 말을 알 것 같았다.

‘괜찮아요..'

"도와주시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줄리엣은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레녹스는 그 조용한 목소리가 대개 그를 화나게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저따위 헛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나?”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단한 성인 나셨군.”

처음부터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창백한 여자의 얼굴을 을보는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대체 그가 모르는 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저따위 소리를 가만히 앉아 듣고만 있었을지.

정확히는 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의식하기도 전에 비아냥거림부터 튀어나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따위”

“그렇지 않으면요?"

“뭐?”

“전하.”

줄리엣은 작게 한숨 쉰 다음 그의 팔을 밀어 냈다. 그녀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제 와 신경 쓰는 척하세요?”

신경 쓰는 척이라니.

그러나 줄리엣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투였다.

“그동안은 아무래도 상관 않으셨잖아요.”

“줄리엣.”

“사람들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지, 제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다니든지. 누구와 눈이 맞았든지 "

줄리엣이 그의 앞으로 반걸음 다가왔다.

“신경 쓰지 않으셨잖아요.”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느냐 따져 묻고 싶었다. 그것도 제 눈앞에서 그런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이제 와 신경 쓰는 척하실 필요 없어요.”

줄리엣은 조곤조곤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지금까지 죽 그러셨던 것처럼요.”

그런 다음 그녀는 다정히 손을 내밀어 그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레녹스는 그녀의 내리깐 속눈썹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친밀한 동작과는 달리, 그녀의 이어지는 말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전하.”

옷깃의 모양을 다시 잡아 준 줄리엣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입 맞출 듯 가까운 거리였다.

“전하도 알고 계셨잖아요.”

그러나 줄리엣은 피식 웃었다.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홀린 듯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레녹스는 그 낯선 표정의 정체가 비웃음이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하지만 좀처럼 이해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줄리엣이 단 한 번도 그에게 보여 준 적 없었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저 사람들이 아니죠.”

줄리엣은 잠시 사람들이 사라진 문 쪽을 힐끔거렸다가 다시 웃으며 다가와 그의 팔을 짚었다.

그리곤 그 완벽하게 붉은 입술로 그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지난 7년간, 멋대로 제가 입에 오르내리도록 방관하신 건 전하셨어요.”

레녹스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파삭.

그의 손아귀에서 유리잔이 덧없이 부서졌다. 피인지 포도주인지 모를 붉은 액체가 바닥에 뚝뚝떨어졌다. 엉망이 된 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줄리엣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 * *

칼라일 공작가는 사람들의 입에 좋지 않은 이야기로 오르내리는 일이 많았다.

호사가들을 열광케 할 만큼 극단적이고 어두운 가문의 역사로 책 수십 권을 너끈히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레녹스 칼라일은 타고나 길 무심한 성격이었고, 세간의 의평판 따위에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는 제가 그러해서 당연히 줄리엣 또한 그런 줄 알았다.

칼라일 성에는 스무 해 동안 안주인이 부재했다.

'그게 언제부터였더라.'

제발 결혼 좀 하시라 입을 모아 애원하던 보좌관들이 조용해졌던 것은 줄리엣 모나드가 공작성에 머무르기 시작하고도 몇 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전하,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번 모임에는 아가씨와 함께 참석해 주시는 것이 어떠할까요?”

충성스러운 보좌관이 그렇게 실토하고서야 알았다. 공작가의 가신들이 한참 전부터 안주인의 업무를 조금씩 줄리엣에게 자연스럽게 떠넘겨 왔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간단한 출납 장부 확인이었다고 했다. 영주가 확인해 주는 정도.

부재했을 때 급한 일들을 대신 그러다가 점점 북부의 안주인이 당연히 참석하고 주관해야 하는 행사들까지 이어진 것이다.

"저희가 부탁드린 일입니다. 아가씨는 그냥 받아 주셨을 뿐이고요."

그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지, 보좌관은 지레 먼저 줄리엣을 옹호했다. 의도된 월권행위는 들어주었을 뿐이라고.

아니었으며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레녹스는 담담히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잔뜩 눈치를 살피며 보좌관이 꺼낸 용건은 그런 이야기였다.

파트너를 동반하는 연회에 매번 혼자 나타나는 줄리엣을 두고 아무래도 좋지 않은 뒷말이 나오는 것 같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같이 참석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보좌관의 주장은 그랬다.

저들이 줄리엣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아무래도 그녀가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불안한 처지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랬던가?

그 무렵, 뭘 해 줘도 좀처럼 환히 웃어 주는 법이 없는 여자 때문에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미온적인 반응에 초조할지언정 그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로 대신한다는 건 안중에 없었다.

줄리엣은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일이었다.

쨍그랑!

그러나 느지막이 연회장에 도착한 레녹스가 본 것은 보란 듯 찻잔을 깨 버리고 자리를 떠나는 줄리엣의 모습이었다.

"화나셨어요?”

밖으로 나오던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고도 그는 그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안주인인 척, 멋대로 굴어서요?”

방금 찻주전자를 엎어 버리고 나온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은 것은 줄리엣의 잘못이 아니었다.

화가 난 것은 줄리엣이 성가신 일이 생겨도 제게 말하지 않는다는 걸 처음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기도 전에 줄리엣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나신 거 아니면 그만 가 볼게요.”

줄리엣은 울면서 일러바치기는 커녕, 그 이후로도 단 한 번도 그에게 저를 둘러싼 소문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물어도 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고, 줄리엣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익숙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굳이 줄리엣을 다그칠 필요 없이,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른 것들이 북부에 영원히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는 그 조용하고 신속한 절충안에 만족했고, 줄리엣은 눈물 한 번 비치는 일 없이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는 그것으로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줄리엣 모나드가 그를 버리고 달아나기 전까지는.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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