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보셨어요?”
“봤지요.”
여우 사냥은 엉망이 되었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기간을 일 년 중 가장 좋아했고, 열심히 사냥을 계획한 황제조차도 더 이상 여우 사냥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황궁에 머물던 귀빈들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알현실 앞을 기웃거렸다.
“생각보다 훨씬 더 인간 같던걸요.”
“솔직히 그 정도가 아니잖습니까.”
황후가 공들여 꾸민 연회장은 순식간에 한가해졌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사람들은 꼭 근처에 피치 못할 용건이 있다는 듯 야외를 노골적으로 어슬렁거렸다.
“황제를 만나고 싶소."
"입궁을 허가하오.”
황궁의 수문장은 난생 처음 보는 사절단의 출입을 허가했다.
라이칸슬로프,
옛날이야기에서 흔히 들었던 신비로운 이종족들은 하나같이 키가 훤칠하고 외모까지 아름다웠다.
그러나 참고인 자격으로 알현실 한쪽에 앉아서 낯익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던 줄리엣은 꼭 자기가 죄를 지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협.”
줄리엣의 옆에 서 있던 엘자가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줄리엣은 잠시 엘자를 힐끔 보았다.
로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러바친 게 엘자였던 모양이었다.
줄리엣의 처지는 조금 애매했다. 황제와 사람들은 아직 침입자와 줄리엣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황궁에 난입한 그레이엄의 목적은 그녀였고, 그 과정에서 2황자와 그의 일행들은 거슬리니까 습격당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황제는 이런 자초지종을 알지도 못했고, 어디까지나 괴한이 궁에 침입해서 그의 아들을 해치고 모나드 백작 또한 해하려 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로이가 왔다.
쿵.
알현실의 문이 묵직한 소리를 를내며 열렸다. 이방인들 중에서도 로이는 단연 돋보였다.
"나는 로드 헤바론의 아들, 로미오 바스칼이다."
로이는 줄리엣이 언젠가 한 번 봤던 독특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고대의 사제들이 입던 카타나처럼 보였다.
그러나 로이는 줄리엣이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제와 대화하는 내내 로이는 줄리엣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인간의 군주여, 그를 넘겨주시오.”
생경한 눈으로 이종족 청년을 훑어보던 황제는 움찔했다.
"흠흠. 그대의 동족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나?"
모처럼의 위엄을 담아 황제가 근엄하게 일갈했다.
“감히 내 궁에 침입한 걸로도 모자라, 내 아들과 제국민을 해하려 했소!”
종결 어미가 조금 오락가락 하는 걸로 보아 황제도 이 상황이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카티아의 라이칸슬로프.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타국의 왕족이었다. 하지만 대표라고 나선 자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의 의외양이자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로이는 눈썹 하나 까딱않은 채 황제의 말을 다 듣고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그를 넘겨 달라는 겁니다."
“방금 내 말을 듣기는 한 건가?"
황제가 노한 기색으로 물었지만 로이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일족의 법으로 처벌하게 해 주시오. 목을 효수하고 사지를 자르는 것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겠소.”
알현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2황자의 안색이 변할 정도였다.
사실 2황자의 부상은 엄살에 불과했고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굳이 꼽자면 폭발한 사냥터의 창고 정도가 재산적 피해의 전부였다.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줄리엣이 폭발로 날려 먹은 물건이었다.
“금전적 피해는 죄인과 같은 무게의 금으로 보상하겠소.”
툭.
로이가 제 옆에 놓여 있던 묵직한 자루를 발로 찼다. 자루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니….”
입구가 벌어져 안에 든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신 황금이었다.
그리고 라이칸슬로프 사절들의 신분은 순식간에 귀빈으로 격상 되었다.
**
알현실에서 나온 줄리엣은 한가한 연회장 구석에 앉아 있었다.
사절단과 황제가 죄인을 어떻게 이송할 것인지를 의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할 일이 없어진 줄리엣은 연회장으로 쫓겨났다. 이종족을 구경하느라 연회장에는 오히려 사람이 적었다.
“줄리엣.”
로이가 줄리엣을 찾아 연회장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엘자가 줄리엣이 여기 있다고 알려 줬어요.”
회의장에서 잠시 빠져나온 듯, 로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네.”
줄리엣은 허겁지겁 연회장으로 쫓아 들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을 그의 어깨 너머로 힐끔 보며 대충 대답했다.
플로어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다가온 로이의 모습은 반짝반짝 꾸며진 연회장과 잘 어울렸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안색이 창백해요.”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로이가 데운 포도주가 든 유리잔을 가져 다주었다.
“마셔요."
따끈한 잔을 받아 들긴 했지만 줄리엣은 적당히 입술을 적시는 시늉만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한 것은 줄리엣뿐인 모양이었다.
로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어디다친 데는"
“나는 괜찮아요.”
아까 전, 알현실에서 봤던 로이 와는 달리 평소의 로이였다.
“…… 로이,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은 보는 눈이 많잖아요.”
줄리엣이 주변을 힐끔 보며 만류했지만 로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줄리엣.”
그는 되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로이는 말을 들을 기세가 아니었다.
“.…내가 싫어요?"
언젠가처럼 그녀의 한 손을 붙잡고 로이가 물었다. 줄리엣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건……, 그레이엄이 한 짓이잖아요. 줄리엣이 그런 일로 내가 싫다고 하면…….”
“로이.”
줄리엣은 조금 한숨을 쉰 다음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그레이엄이라는 그 남자, 로이의 형이죠? 그 행방불명됐다는."
줄리엣이 묻자 로이는 그녀를 물끄러미 마주 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그레이엄은 내 셋째 형이에요.”
“그 사람이 나를 숲으로 끌고 가겠다고 했어요."
"알아요. 미안해요.”
“왜 싸운 거예요?"
“..… 줄리엣에 대해 나쁜 말을 했어요.”
로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레이엄은 면전에서 그녀를 모욕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핵심은 아니겠지.”
줄리엣은 예쁜 호박색 눈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그 녀석이 얼마나 악랄한 짓을 저질렀는지 아나?"
그레이엄이 말한 것처럼 악랄한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줄리엣은 로미오 바스칼이라는 남자에 대해 얼마나 아는 지를 생각해 보았다.
상냥하고, 다정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줄리엣은 은로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레이엄 때문에 나한테 화났어요?”
조심스럽게 묻는 로이는 풀죽은 강아지 같았다. 쓰다듬고 달래주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애처로운.
줄리엣은 무심코 손을 뻗어 로이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로이가 갑자기 조금 낯설게 느껴져서 그래요.”
"…나는 줄리엣을 속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로이는 불쑥 이상한 말을 했다.
“그 남자와는 달라요.”
딱히 레녹스도 속인 적은 없는데. 줄리엣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꼭 거짓말을 입 밖으로 내야 거짓말인 건 아니에요."
말해야 하는데 말해 주지 않고 숨기는 것도 속이는 거지.
줄리엣은 로이가 여전히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줄리엣도 나한테 모든 걸 다 말해 주지 않잖아요."
로이가 조금 서늘한 눈으로 줄리엣을 올려다보았다.
"로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요.
나중에 다 말해 줄 테니까…….”
로이는 붙잡은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나직이 되뇌었다.
“나는 그 남자처럼 줄리엣을 상처 입히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예요."
***
로이가 회의장으로 돌아간 직후, 혼자 남겨진 줄리엣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로이가 좀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사실 줄리엣은 그에게 신경 쓸 틈이 별로 없었다. 로이의 문제 외에도 생각할 게 잔뜩 있었다.
나비들이 돌아온 것은 다행이지만, '스노우드롭'이라는 이상한 이름은...
“정말대단하시네요,모나드양.”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줄리엣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반갑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솔직히 감탄했답니다.”
줄리엣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왜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상황들은 꼭 연달아 일어날까?
“이제야 설명이 되네요.”
“왜 그렇게 갑작스레 공작에게 내쳐졌나 했더니…….”
“역시,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추문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빛냈다.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모나드 영애, 정말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아무 남자나 침대에 끌어들였다가…….”
“공작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소문이요.”
“제가 듣기로는 공작의 관심을 끌려고 그랬다던데요. 맞나요?"
"어머, 하지만 아까의 그 이종족 청년과는 꽤 깊은 관계로 보이던걸요.”
악의 넘치는 조롱에 줄리엣은 싱긋 웃었다.
'아주 신들 나셨어.'
지금은 편들어 줄 사람도 없겠다, 이번에야말로 줄리엣이 잔꾀로 상황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줄리엣은 이 불쾌한 관심들을 차단하는 방법을 두 가지 알았다.
하나는 레녹스 칼라일에게 다른 연인이 생기는 거였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관심을 잃고 새 연인을 물어뜯기 시작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줄리엣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러니 줄리엣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그래요, 다 맞는 말이랍니다.'
하고 긍정해 주는 것.
어차피 다시 볼일도 없을 사람들이다. 까짓것,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줄리엣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조금 전 로이가 가져다주었던 와인 잔을 든 채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리잔이라도 던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폭력을 쓸 생각은 없었다.
헐뜯을 거면 헐뜯으라지. 그깟자존심.
줄리엣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그 말씀이 맞아요. 제가 공작님께 이별을 통보받은 이유는…….”
“아니지.”
그러나 나직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뚜벅.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줄리엣을 응시하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뒤를 돌아보았다.
“차인 건 나였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틀린가?”
입구 쪽에 선 남자를 확인한 연회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