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내려주세요.”
그는 필사적으로 줄리엣의 표정에서 어떤 감정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조금 떨어져 걷던 횃불을 든 다른 사람들도 멈춰 섰다.
“..……좋아. 돌아가지.”
결국, 먼저 고집을 꺾은 것은 그였다.
그는 줄리엣을 내려 주지는 않았지만 북부로 데려가겠다는 계획은 단념했다.
줄리엣은 그가 말머리를 멀리 보이는 황궁 불빛 쪽으로 돌린 다음에야 몸을 기대어 왔다.
“전하, 왜 여기 계세요?”
'일찍도 묻는군.’ 레녹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누가 마물도 잃은 주제에…….”
레녹스는 푸르스름한 빛을 뿌리는 나비들을 쏘아보았다.
“겁도 없이 돌아다니는 덕분이지.”
“편지 잘 받으셨나 보네요."
줄리엣의 목소리가 평온했다.
하지만 그녀의 태평한 대답과는 달리 그는 목이 탔다.
레녹스는 고삐를 쥐지 않은 다른 팔에 힘을 주었다. 머리를 기댄 줄리엣이 호흡할 때마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어쩐지 여기 없는 것 같았다.
소울스톤을 확인하는 순간, 그가 느꼈던 안도감은 정말로 찰나였다.
[나비들이 사라졌어요.]
짧은 메모를 확인한 즉시 그는 북부를 떠났다.
게이트를 열게 하고, 줄리엣의 행방을 확인한 후 겨우 제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제시간이라고 해 봐야, 사냥터깊은 곳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줄리엣을 발견했을 뿐이지만, 그녀의 옆에는 혼이 나간 것처럼 멍한 상태의 라이칸슬로프 하나와 쌩쌩하게 나풀거리는 나비들이 있었다.
“눈은요?”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다 나은 건가요?”
“……아니.”
대답과 동시에 레녹스는 허리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줄리엣은 순간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결백했다.
주치의 말이, 생각보다 회복 속도가 빠르긴 하지만 무리하면 영영 시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었으니까.
어떤 여자가 자꾸 우는 성가신 꿈을 꾼다는 걸 제외하면,
“…… 나아지는 중이야."
“다행이다.”
줄리엣은 어쩐지 짐을 덜어낸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반응 때문에 레녹스는 또다시 미묘해졌다.
저를 동정하는 것도 싫고 안타까워하며 돌보려 드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정말로 자책감 뿐이었나?
심지어 줄리엣은 그를 보고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원래도 침착한 성격이긴 했지만. 이건 좀 다르지 않나.
레녹스는 조금 전, 줄리엣이 눈을 떴던 순간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겁에 질린 것도 같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그런 표정을 지었던 주제에. 이제는 차분하다 못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무심한 태도에 그는 어쩐지 초조해졌다.
목이 탔다.
야심한 시각임에도 여기저기 횃불을 밝혀 놓아 황궁은 대낮 같았다.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아, 세상에…!”
“황후!”
숲에서 돌아온 일행들을 보고 황후는 거의 졸도하듯 쓰러졌다.
시종들이 우르르 그녀를 부축했다.
“저는 괜찮아요.”
말에서 내려온 줄리엣은 다친 데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였다.
“줄리엣!”
허겁지겁 달려오는 엘자의 모습도 보였다.
“의사! 의사부터!"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체 숲에서 무슨 일이…….”
“일단 좀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싶어요.”
줄리엣이 조금 날카롭게 말한 것 같았다.
다음에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린
“이,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황후궁의 시녀장은 엄한 얼굴로 사람들을 몰아냈다.
“공작님께서도요! 물러나세요!"
시녀장이 앞을 가로막는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손안의 줄리엣을 내려놓기 싫어졌다.
"내려놔요.”
레녹스는 마지못해 줄리엣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줄리엣은 그를 힐끔 한 번 돌아보았을 뿐이다. 다음 순간 그녀는 시녀장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에 시선을 을고정한 레녹스는 장갑을 천천히 벗었다.
“폐하."
"왜, 왜 그러나 공작."
“황궁 경비가 형편없더군요.”
“그, 그런가?”
이 대화의 향방을 가늠하던 황제는 조금 헷갈린다고 생각했다.
여우 사냥이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은 갑자기 웬 이종족이 난입했기 때문이었다.
“예. 충성스러운 신하된 도리로, 도저히 좌시할 수 없겠군요.”
하지만 레녹스는 책임을 묻기는 커녕 온화하게 싱긋 웃기까지 했다.
대체 언제부터 충성스러웠는지 황제는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칼라일 공작의 매끄러운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분간 저와 제 수하들이 황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허락하시겠지요?”
“무, 물론 허가하네.”
황제는 나긋한 칼라일 공작의 태도가 무표정일 때보다 몇 배는 위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줄리엣! 괜찮아?"
“엘자.”
엘자는 연신 울상이었다.
“미안해. 내가……. 로이가 잘돌보라고 말했는데."
줄리엣은 부축해 주는 엘자의 의팔을 잡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 좀 도와줘.”
“응!"
엘자는 손재주는 없었지만 엉망이 된 드레스를 벗기는 데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황궁의 시녀들은 기겁했지만, 줄리엣의 말대로 막상 더러워진 옷을 벗고 산발이 된 머리를 넘기자 이렇다 할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숲속에서 구르느라 팔다리 여기저기에 자잘한 생채기가 났을 뿐.
시녀들은 잠시 필요한 물품과 과옷가지를 가지러 자리를 비웠다.
“얌전히 앉아 계세요."
시키는 대로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니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
“엘자.”
줄리엣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조심스레 엘자를 불렀다.
엘자 역시 슬금슬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욕조 가까이 다가왔다.
“왜, 줄리엣?”
줄리엣은 걸고 있던 은 열쇠를 꺼내 엘자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엘자는 그레이엄과는 달리, 멀뚱멀뚱 가만히 보기만 했다.
하긴, 로이는 물론이고 엘자와 나단도 열쇠를 여러 번 보았지만 아까의 늑대처럼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이거 왜?”
“숲에서 로이의 형제라는 늑대를 만났어.”
엘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기 이름이 그레이엄이랬어.”
“그레이엄? 그레이엄이 여길 왔단 말이야? 어떻게…….”
줄리엣은 경악하는 엘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레이엄이 이걸 ‘스노우드롭' 이라고 불렀어.”
“…스노우드롭?”
그러자 엘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뭔지 알아?"
“응, 알아.”
엘자는 줄리엣과 은 열쇠를 한번 번갈아 보더니,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꽃 이름이야."
“……그래, 그렇지."
줄리엣은 맥이 조금 풀려서 웃었다.
“그건 나도 알아.”
퐁퐁퐁.
욕조에 더운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엘자의 말은 끝난게 아니었다.
“그건 아주, 아주 위험하고 오래된 거라고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
그녀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무 사악해서 숲 밖으로 추방된 존재들인데, 절대 숲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엘자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녀의 말은 꼭 옛날이야기처럼 두리뭉실했다.
(.......)
줄리엣은 엘자의 모호한 말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가떠들던 나비들이 그 단어를 소리 내어 내뱉은 이후부터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게 이상했다.
이건 삼백 년 된, 제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물건이었다.
모나드 백작가가 세워진 뒤로부터 계속, 줄리엣의 가문에 전해 지던 물건이다.
그런데 어째서 라이칸슬로프들이 이 열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그것도, 정작 모나드 가문사람들은 알지도 못했던 이름을?
아티팩트.
줄리엣이 알기로, 아티팩트들에 이름 따위는 없었다.
‘아티팩트'라는 용어조차 설명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보물들을 지칭하기 위해 편의상 만들어진 단어였으니까.
뭐, 예를 들어 유명한 보석들에 '태양의 눈물'이니 하는 식으로 흔히 거창한 이름을 붙이곤 했지만, 아티팩트에 이름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이었다.
모나드가에 전해지는 이 은 열쇠가 겉으로는 그저 장난감처럼 평범한 은 세공품이듯, 아티팩트들은 얼핏 봐서는 그렇게 귀해 보이지 않는 골동품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너희 이름이야?”
(.......)
하지만 나비들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