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펑!
줄리엣은 램프를 쏘는 것과 동시에 재빨리 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
간발의 차로 요란한 폭발음을 피하긴 했지만 위험했던 모양이다.
귀가 먹먹해지더니, 이내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읏…….”
줄리엣은 조금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고 일어나려고 노력했다.
속이 메스꺼웠다.
간단한 일반 상식이다.
건조한 겨울에 불붙기 쉬운 가루가 날리는 밀폐된 공간에서 불장난은 하지 말 것.
“상식이 없는 늑대라 다행이야…….”
하긴. 숲에 사는 라이칸슬로프가 분진폭발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리 없겠지.
사냥터지기가 제설 작업에 쓸 숯가루가 젖지 않게 매달아 두어서 다행이었다.
'진짜 될 줄은 몰랐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줄리엣은 눈 위로 다시 쓰러졌다. 저 폭발음이라면 귀가 멀지 않은 이상 사람들이 달려올 터였다.
그러면 쓰러진 2황자 일행을 발견할 테고, 그녀도…….
그러나 줄리엣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크르릉!
"크아악! 이 계집이……!”
줄리엣은 조금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등에 불이 붙은 채, 창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반인반수가 있었다.
잔뜩 화가 난 그레이엄은 금방이라도 줄리엣을 향해 달려들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라이칸슬로프의 괴물 같은 회복력을 확인한 줄리엣은 할 말을 잃었다.
줄리엣은 창백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기진맥진해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 이번에는 진짜로 죽나 보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순식간에 이상할 정도로 온몸에 힘이 빠졌다.
풀썩 하고 눈 위로 줄리엣은 쓰러졌다.
그때였다.
팔랑.
어디선가 어울리지 않게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나비 한 마리가 소복이 눈 쌓인 숲 한가운데 나타났다.
쓰러진 인간 여자를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했던 그레이엄은 순간 멈칫했다.
"뭐? 뭐…… 뭐야 이건?"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닌 듯, 밝은 빛을 뿌리던 나비들의 수가 조용히 그러나 순식간에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장면이었지만 그레이엄은 공포밖에 느끼지 못했다.
정확한 이유를 몰랐지만, 그레이엄은 본능적인 불길함에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아아악!"
잠시 후, 숲을 뒤흔들 만큼 쩌렁쩌렁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숲은 또다시 평화로운 적막에 휩싸였다.
6. 독
줄리엣은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눈 덮인 숲 한가운데 있었는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적인 늑대 인간의 모습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눈밭에서 의식을 잃으면 얼어 죽지 않을까.'
담담히 생각하면서도 줄리엣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끼익.
그때, 있는 줄도 몰랐던 눈앞의 거대한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작고 푸른 나비 한 마리가 유유히 튀어나왔다.
'아.’
앙증맞은 크기의 나비가 제 주변을 나풀거리며 맴도는 것을 보다가, 줄리엣은 문득 눈앞의 거대한 문을 이전에도 본 적 있다.
는 것을 눈치챘다.
물끄러미 문을 쳐다보는데, 나비가 그녀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느리게 날개를 접었다 폈다.
끼이익.
갑자기 장면이 바뀌었다.
고개를 드니 줄리엣은 익숙한 풍경 안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낯익은 침실이었다. 그녀는 호화로운 사주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줄리엣은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 이거 그날의 기억이구나.'
줄리엣은 단번에 깨달았다.
이거 주마등인가? 죽기 전에 떠오른다는 그거?
줄리엣은 속으로 조금 씁쓸해졌다.
주마등이라면, 하필 왜 이날의 기억일까. 이건 현생도 아니고, 첫 번째 삶에서의 기억이었는데.
"……이제 후련하시겠어요.”
그녀의 입에서 기억 속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쏘아보았지만, 그녀는 눈물로 엉망이 된 방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골칫거리가 사라졌으니까요.”
문가에 선 남자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
"… 괜찮으실 겁니다."
“그냥 잠든 것뿐이시니 곧 의식을”
두런두런.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줄리엣은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뜨기 무섭게 장갑 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줄리엣.”
난폭하지만 유리 세공품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와 눈빛이었다.
그러나 저와 시선을 맞추는 남자를 보고도 줄리엣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 꿈에서 봤던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결국 확인하지 못했던 남자의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날의 기억은 줄리엣이 두 번의 삶 동안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기억이었다.
그런데 마치 그 부분만 누가 억지로 잘라 낸 것처럼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조용히 문가에 선 남자는 대체 어떤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더라?
“...… 레녹스.”
차라리 직접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물어도 그는 대답하지 못할 터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의 전생에서만 일어났던 일이니까.
그건 온전히 줄리엣 혼자만의 기억이었다. 겪은 적도 없는 상황에 대해 감상을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줄리엣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일으키다가 저지당했다.
곧장 날선 목소리가 들렸고 고삐를 쥐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뭐 하는 거야.”
"아.”
줄리엣은 그제야 고도가 좀 높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냥 기대어 있는 게 아니라, 말 위에 함께 타고 있는 거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쩐지 몸이 불편하다 했더니 움직이기 곤란할 정도로 몇 겹인지 모를 망토에 꽁꽁 감싸여 있었다.
게다가 바로 위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레녹스의 표정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남자가 그녀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든지.’
줄리엣은 별로 겁먹지도 않았다.
방금 전의 기억 때문에 줄리엣은 혼란스러웠다. 깊이 묻어뒀던 해묵은 감정이 되살아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에 횃불을 든 황궁 기사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줄리엣은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숲에서 쓰러진 이후, 소란을 들은 황궁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레녹스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춥고 아직 머리가 몽롱해서 판단이 느렸다. 줄리엣은 그에게 시력은 괜찮은지 물어야 한다는 것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아.’
주변에서 빛을 내는 것들은 기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만이 아니었다.
반짝반짝.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애초에 사라졌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너무 멀쩡하게 나비들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돌아왔네.”
한편으로는 조금 전의 꿈이 생각나서 묘해졌다.
“늑대는요?”
“…그 짐승 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안 좋아요.”
안긴 자세가 불편해서 줄리엣은 몸을 조금 뒤척거렸다. 레녹스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 짓도요.”
깜깜해진 하늘을 보자 줄리엣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아직 숲에 있었다. 줄리 엣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곳은 황궁의 사냥터일 것이다.
그녀가 발견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숲의 어디쯤에서 발견되었는지는 몰라도 이쯤 이동했다면 황궁의 건물들의 불빛이 보여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궁의 본관은커녕 반대 방향으로, 점점 더 깊은 숲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딜 가는 거지?'
“레녹스.”
줄리엣은 한숨과 함께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내려 주세요.”
"어딜.”
"내려놔요. 당장.”
레녹스는 그녀를 내려놓지는 않았지만 말을 멈췄다. 그들은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말을 멈춰세운 채 말없이 날선 시선만 교환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