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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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여우는 마수지만 성격이 온순하고 몸집이 작은 생물이었다.
줄리엣은 토끼보다 조금 더 큰 마수 사냥에 토벌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 것일까 싶었지만 한가한 수도 귀족들의 사냥 놀이려 니 생각했다.
적어도 황궁의 숲에는 눈여우보다. 위험한 생물은 살지 않으니 안전하긴 하겠지.
“부디 몸조심하세요, 황자님!"
하지만 눈물을 글썽이는 예비황자비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파티마는 지난번 일로 단단히 화가 났는지 줄리엣을 보고도 눈인사조차 받아 주지 않았다.
줄리엣은 일부러 사냥 행렬의 의맨 뒤로 빠졌다. 말을 타고 눈덮인 숲을 조용히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기, 핏자국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2황자의 일행이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왔다는 게 거 슬리긴 했지만.
“눈여우일까요?”
"핏자국으로 보면 큰 놈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시끄럽게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기 싫어 줄리엣은 말고삐를 돌렸다.
조금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퍼억.
털썩.
조금 전까지 떠들던 말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
히히힝!
뒤를 돌아보자 2황자 일행이 타고 왔던 말들이 숲 저쪽으로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2황자님……?”
뒤를 돌아보니 2황자는 물론이고 그의 일행들이 죄다 눈밭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에 어떤 커다란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발소리도 못 들었는데.'
줄리엣은 긴장해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사람은 낯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정체를 알수 있었다.
'늑대다.'
**
로이와 그 일행들 말고 다른 라이칸슬로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황후궁에 남아 있을 엘자가 떠올랐다.
“익숙한 냄새가 나, 줄리엣.”
그 기척의 정체가 바로 저 남자였던 모양이다.
“인간 여자. 그대가 줄리엣 모나드인가?”
줄리엣은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자신도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쪽은 누구신데요?"
"나는 그레이엄이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줄리엣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레이엄이라는 남자는 덩치가 크고 위압적이었지만, 뭔가 좀 이상했다. 꼭 뭐에라도 쫓기는 사람처럼 행색이 초라했고, 부상을 입었는지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조금 전 2황자 일행이 발견한 핏자국은 그레이엄의 것이었던 듯했다.
“로이의 형제분이신가요?”
형이 행방불명이라고 했던가.
어쩐지 그 행방불명된 형제가 눈앞의 사람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로이…… 하!"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레이엄의 얼굴에 사나운 표정이 떠올랐다.
“로미오 녀석이 인간 계집에게 홀렸다더니.”
노골적인 적의가 꼭 로이를 맨처음 만났을 때 같았다.
그레이엄은 위협적으로 줄리엣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같이 좀 가 주실까.”
"어딜요?"
"너를 카티아의 숲으로 데려 갈거다.”
“왜요?”
“젠장, 그 새끼가 내 목을 부러 뜨렸다고.…!"
의외로 묻는 족족 순순히 대답해 주던 그레이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말을 듣고 줄리엣은 이 그레이엄이라는 남자가 로이가 목을 부러뜨렸다는 셋째 형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대답이 아닌데요.
그거랑 내가 무슨 상관이에요?"
줄리엣이 침착하게 지적했다.
로이에게 원한이 있다고 그녀를 끌고 가겠다는 이야기가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너를 끌고 가면 그 건방진 로미오 놈도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거다.”
요컨대, 협박용 인질이란 말이었다.
“내가 가기 싫다면?"
“그러면 폭력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그르릉.
듣기만 해도 위협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줄리엣은 눈살을 찌푸렸다.
“.....… 또야?”
“뭐?”
그레이엄을 앞두고 줄리엣은 한숨을 폭 하고 내쉬었다. 이쯤 되니 온 우주의 기운이 그녀의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나비도 없는데.'
심지어 인적도 드문 숲 한가운데였다.
기절한 2황자 일행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석궁을 고쳐 쥔 줄리엣은 케이프의 고리를 끌었다.
툭. 외투가 바닥에 떨어졌다.
도망을 치든 석궁을 쏘든, 방해가 될 것 같았으니까.
“잠깐.”
그런데 줄곧 위압적이던 그레이 엄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하나 묻겠는데, 인간 여자.”
그의 시선은 줄리엣의 목 언저리에 꽂혀 있었다.
"네가 왜 스노우드롭을 가지고 있지?”
“......?"
무슨 드롭?
줄리엣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케이프를 벗은 덕분에 목에 걸고 있던 은 열쇠가 드러나긴 했다.
이걸 말하는 건가?
“설마, 로미오 녀석이 찾아낸 건가? 아니지. 그놈은 저것의 존재를 알기에는 너무 어린데"
그레이엄이라는 늑대는 혼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반신반의 하며 줄리엣은 은 열쇠를 들어 보였다.
“이거 말이야?"
“그렇다. 어째서 하찮은 인간 계집 따위가….”
그 말을 듣고 있던 인간 여자는 기분이 상해 버렸다.
더 이상 저 늑대가 왜 백작가의 가보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로이는 단 한 번도 줄리엣을 그렇게 부른 적 없었다.
왜 라이칸슬로프가 거만하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어쨌든 줄리엣은 화가 났고, 눈앞의 늑대가 혼자 당황해 횡설수 설하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은 그녀에게 기회였다.
푸륵.
줄리엣은 겁에 질린 말을 달래듯 토닥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스노우드롭이라니,어떻게"
그레이엄이 중얼거리는 틈을 타서 도망치기로 했다.
줄리엣은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미리 봐 두었던 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히히힝!
"어딜!”
뒤늦게 알아챈 그레이엄이 포효하며 뒤를 쫓아왔다.
늑대가 쫓아오자 공포에 질린 말은 전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자신이 잡히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알았다. 눈쌓인 숲속에서 늑대를 따돌린다.
는 건 불가능했다.
'저거다.'
정신없이 달리면서 두리번거리던 줄리엣의 눈에 때마침 적당한 것이 들어왔다.
사냥터지기의 숙소 겸 창고인 인것 같은 작은 건물이었다.
줄리엣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말을 세우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쾅!
"......!"
그러나 그녀가 문을 닫기도 전에 줄곧 줄리엣을 뒤따라오던 존재가 문틈으로 팔을 꽉 집어넣었다.
우드득.
문이 뜯겨 나가듯 억지로 열렸다.
“하!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레이엄이 득의양양한 표정으 으로 창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어떡할까.
그레이엄으로부터 최대한 멀어 지도록 뒷걸음치는 한편, 줄리엣은 시간을 좀 벌어 보기로 했다.
저 늑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면서, 최대한 문을 등지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로이의 형인데, 왜 사이가 나쁘죠?"
줄리엣은 대충 아무 말이나 떠오르는 대로 했다. 의외로 그레이엄은 그녀의 미끼를 물었다.
“인간 여자, 너는 그놈이 내게 얼마나 악랄한 짓을 벌이고 있는지 상상도 못할 거다."
그레이엄이 음울하게 대꾸했다.
“놈에 비하면 내가 벌인 일들은…….”
그 내용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당장 급한 건 그녀의 목숨이었다.
줄리엣은 그가 주절거리도록 내버려 둔 다음, 힐끔 손에 들고 있던 석궁을 내려다보았다.
쏠 수는 있다.
북부의 공작성에는 웬만한 무기는 다 갖춰져 있었고, 줄리엣은 그것들을 다루는 법을 배웠었다.
하지만 줄리엣은 자기 솜씨가 썩 훌륭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줄리엣은 힐끔 눈앞의 그레이엄을 쳐다보았다.
열차에서 본 로이의 본체는 열차칸 하나를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늑대였다.
그런 종족을 이깟 석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꿈은 꾸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비도 없고..'
심지어 남은 화살도 두 개뿐이다. 줄리엣은 새삼스레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절감했다.
'어쩔 수 없지.'
결론을 내리자 행동은 빨랐다.
팡!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에 그레이엄이 움찔했다.
그러나 줄리엣이 쏜 화살은 그를 빗겨 갔다.
퍽!
소리와 함께 그의 뒤쪽, 천장에 매달려 있던 웬 자루가 떨어져 내렸다.
“하! 이 계집이……!”
“하이…!"
희열과 안도가 뒤섞인 표정으로 그레이엄이 이를 드러냈다.
조준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면서 발을 내딛는 순간.
와르르.
묵직한 자루가 찢어지면서 뭔가 가루 같은 게 빈 창고 전체에 나풀나풀 쏟아졌다.
모래 바람처럼 가루가 날려 시야를 확인하기 어려워졌지만 그레이엄은 인간 계집의 어리석음에 코웃음 쳤다.
“이깟 잔꾀로 상황을 모면해 볼 생각이었나 보지?”
어둠 속에서 더 능력을 발휘하는 늑대의 시야에 이런 수작이 소용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석궁을 다시 당겨 화살을 장전했다.
철커덕.
“쫄았으면서.”
"뭐?"
그레이엄은 그녀의 여유 있는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죽을 위기에 처한 인간치고는 너무 침착하지 않은가.
그러나 분명 그녀가 방금 장전한 화살이 마지막이었다.
줄리엣은 태연하게 석궁을 겨눴다.
이 인간 여자가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심산으로 그레이엄은 이를 드러냈다.
“잘 가, 멍청한 늑대야.”
핑!
쨍그랑!
이번에도 그녀의 화살은 그레이 엄을 빗겨 갔다.
하지만 그녀의 조준은 정확히, 천장 한가운데에 걸려 있던 램프를 깨뜨렸다.
퍼퍼펑!
"......!"
공기가 폭발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