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95화 (92/229)

95화.

*

“안 됩니다.”

“엑!”

황후궁의 시녀장이 깐깐한 얼굴로 단칼에 거절했다. 엘자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줄리엣 지켜 주러온 건데?"

“신분이 확실치 않은 사람을 연회장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시녀장은 노골적으로 엘자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엄연히 연회는 황실 가족분들을 위한 자리니까요.”

아무래도 엘자의 말투를 보고 그녀가 귀족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엘자의 정체를 알면 기겁하겠네.’

시녀장은 그들에게 황후궁의 손님방 하나를 내주었다.

“그럼 나 여기 있어?"

풀 죽은 얼굴이었던 엘자는 손님방에 가득한 먹을거리를 보고 다시 표정이 밝아졌다.

“조심히 다녀와, 줄리엣!”

“응, 그래.”

엘자를 뒤로 한 채 줄리엣은 소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시녀장이 말하던 가족 운운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연회장에는 황실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가득했다.

“아니, 모나드 영애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세상에. 모나드 영애!”

줄리엣을 발견한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우르르 몰려왔다. 물론 호의적인 환영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는 지난번처럼 그녀의 역성을 들어 줄 귀부인들도 없겠다, 마침 잘 만났다는 듯한 태도였다.

“칼라일 공작께서는 함께 오지 않으신 모양이죠?"

“아니! 아직 못 들으셨습니까?

공작께서는…...."

“모나드 백작.”

그러나 줄리엣이 유치한 시비에 휘말리기 직전,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이 있었다.

온화한 얼굴로 나타난 황후였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광영을 누리시길.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자, 우리 저쪽에서 담소나 나눌까요?”

줄리엣이 무릎을 굽혀 인사하자, 황후는 줄리엣을 데리고 은밀한 얘기를 나눌 만한 테이블로 이동했다.

“칼라일 공작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는데, 답신이 오지 않았어요.”

아. 역시.

줄리엣은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속으로는 조소했다. 조금 전 황후가 그녀를 구해 준 것이 단순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듯했다.

매년 황실은 지치지도 않고 레녹스를 여우 사냥에 초대했다.

올해에도 답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레녹스가 이런 귀찮은 초대에 응할 리가.'

“공작의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

“염려해 주신 덕분에 건강하시답니다.”

줄리엣은 적당히 둘러댔다.

황후가 세간에 떠도는 공작의 이별 소식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모른 척 줄리엣을 이런 자리로 불러낸 것은 떠보려는 의도였다.

물론 줄리엣은 황후의 속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시간 끌지 않고 바로 상자를 내밀었다.

"폐하.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는 이걸 돌려 드리러 왔어요."

“뭐? ”

“이게 뭐지요? 어머나…….”

상자 속의 물건을 확인한 황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기분이 몹시 언짢아 보였다.

“이건 내가 모나드 백작에게 준 거잖아요. 마음에 들지 않나요?"

"아뇨. 그럴 리가요, 폐하.”

줄리엣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설명했다.

"아시겠지만, 저는 그분께 이별을 통보받았답니다. 결혼식도 없을 거고요. 그러니 말씀은 거둬주시는 게….”

하지만 황후는 줄리엣의 말을 듣지도 않고 끊었다.

“그렇다고 꼭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

“네?”

“굳이 공작과 결혼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가족이 되어 줄 수 있지 않겠어요?”

황후는 인자하게 웃으며 줄리엣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나는 늘 딸이 가지고 싶었답니다.”

물론 줄리엣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줄리엣은 문득 황후의 귓불에서 빛나는 큼직한 사파이어 귀걸이한 쌍을 보았다.

‘거울에 박혀 있던 보석도 사파이어였지.’

"폐하, 혹시 공작님께 사파이어 광산을 받으셨나요?”

줄리엣의 말에 황후가 멈칫했 했다.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줄리엣은 그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했다. 그녀는 칼라일 공작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을 들일수록 문제가 빠르게, 수월하게 해결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어쩐지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황실이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백작 영애를 대뜸 양녀로 삼을 리 없지 않은가.

그것을 웃돌 만큼 큰 이득이 있으면 모를까.

그 억지에 가까운 제안을 황제가 받아들인 이유는 사파이어 광산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양녀 이야기가 없던 것으로 될 것 같으니 광산도 도로 회수해 갈까 염려하는 게 분명했다.

줄리엣은 작게 한숨지었다.

“폐하께서 저를 양녀로 삼지 않으셔도 칼라일 공작은 이미 드렸던 광산을 회수하지 않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믿어 주세요, 폐하. 공작님은 제가 잘 안답니다."

광산을 도로 회수하느니 그것을 빌미로 다른 제안을 해 오겠지.

하지만 줄리엣은 그 말을 굳이 황후에게 전해 주진 않았다.

황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줄리엣을 훑어보았다. 그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사파이어 광산이 그대로 남는다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겠지.

“좋습니다.”

잠시 생각해 보던 황후는 조금 전과는 딴판인 얼굴로 꼭 붙잡고 있던 줄리엣의 손을 매몰차게 놓았다.

“단, 폐하께는 모나드 백작이 직접 말씀드리도록 하세요."

* * *

그런 이유로 줄리엣은 여우 사냥에 참여하게 되었다.

"폐하의 눈에 들고 싶어 안달이 났군요.”

“공작에게 버림받았으니 두 분폐하께 잘 보이려는 속셈이겠죠.”

줄리엣이 여우 사냥에 참가하는 이유는 눈에 띄고 싶어 안달 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상금이 욕심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황후의 심술궂은 숙제 때문이었다. 직접 황제에게 가서 제안을 거절하라는.

“어흠!”

황후에게서 상황을 어떻게 전해 들은 것인지는 몰라도, 황제는 줄리엣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기 바빴다.

“오늘 사냥 일정이 끝난 다음 독대할 기회를 주시겠답니다."

시종장이 몰래 다가와 일정을 을전해 주었다.

“덧붙여, 모나드 백작은 꼭 사냥에 참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줄리엣은 한숨을 내쉬었다.

몰락한 귀족 주제에 감히 분에 넘치는 양녀 자리를 거절해서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하루쯤 사냥터를 돌아다니는 거야 상관없지만 황제가 사냥터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아무리 빨라도 저녁일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 안에 용건을 해결하고 집에 돌아가기는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몰라 승마복을 가져와서다행이었다.

줄리엣은 맵시 있는 블레이저와 몸에 꼭 맞는 팬츠, 잘 길들인가죽 부츠로 갈아 신었다.

일전에 헬레나가 “사 두면 다 쓸 일이 있다”며 맞춰 주었던 옷들 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줄리엣은 움직이기 편하도록 머리를 땋아 꼼꼼히 틀어 올리며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고 있던 엘자가 눈을 뜨며 말했다.

“줄리엣.”

“응?”

“이상하다. 자꾸 익숙한 냄새가나.”

셰리주 네 병과 술이 든 초콜릿을 세 상자나 먹어 치운 엘자는 침대 위에 엎드려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더라…?"

웅얼거리던 엘자는 다시 푹 하고 잠들어 버렸다. 잠꼬대였던 모양이었다.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엘자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알겠어.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하지만 나비들도 사라진 상황에 빈손으로 사냥터를 배회하는 건 싫었으므로 줄리엣은 석궁을 하나 가져다 달라고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귀족 영애가 석궁이라니.

시종은 안 어울리는 조합에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금방 몇 개를 가져다주었다.

줄리엣은 그중 가장 가볍고 손크기에 잘 맞는 것을 골라 들었다.

눈 쌓인 사냥터는 근사했지만 추웠다.

'집에 가고 싶다.'

밖으로 나온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따뜻한 실내가 그리워졌다.

시계 초침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줄리엣 양.”

2황자 클로프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어려운 무기를 고르셨군요."

클로프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줄리엣에게 친한 척을 했다.

“석궁이란 게 생긴 건 화려해서 예뻐 보이겠지만 생각보다 위험한 물건입니다.”

“맞습니다. 어휴, 함부로 가지고 놀다가는 큰일 나지요.”

“레이디의 고운 손에 좀 더 어울리는 무기는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자수용 바늘이라든지요.”

낄낄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줄리엣은 냉담한 얼굴로 어디까지 하나 싶어 듣고만 있었다.

“괜히 설치지 말고 얌전히 앉아 응원이나 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정 그걸 들고 다니고 싶으시다면 제가 사용법을 가르쳐 드리…….”

철커덕.

석궁을 아래로 향하게 들고 있던 줄리엣은 주저 없이 화살을 당기다 놓았다.

팡!

눈 깜짝할 사이 발사된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멀리 숲으로 날아갔다.

그것도 2황자의 머리 바로 위를 지나서.

털썩.

2황자와 일행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어머.”

줄리엣은 그들에게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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