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가 공작성으로 도망치듯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레녹스는 검게 변이된 손, 혹은 손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흐릿한 시야로 오랜 시간 천천히 손을 훑었다. 익숙한 피부색과 원래의 모양대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다시 벗은 몸에 가운을 걸쳤다.
칼라일 가문의 아이들은 모친의 배 속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마력을 타고난다.
"버러지 같은 것.”
그중 몇몇은 사람 같지 않은 형태로 태어나기도 했다.
마력을 타고난 신체에 억지로 신성력을 주입하니 격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두 가지는 서로 섞일 수 없는 전혀 다른 힘이기 때문이다.
가운을 여미며 레녹스는 줄리엣이 이 꼴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무서워하는 게 없는 침착한 성정의 여자라고는 해도 이걸 보면 겁에 질렸을지도 모르겠다.
일시적이지만 뭐에라도 씐 것처럼 피부가 변형되는 장면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직접 본다면 동정인지 죄책감인지 모를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지.
'줄리엣.’
그는 이따금 놀란 듯, 겁에 질린 듯 울음을 억눌러 참던 여자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저는 돌아갈게요.”
그렇게 말하던 순간,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레녹스는 공작저로 돌아온 내내 줄리엣이 어떤 표정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가 궁금했다.
수도에서 올라오는 동안 들은 보고에 의하면 줄리엣은 줄곧 모나드 백작저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줄리엣은 저런 남자에게 발목잡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레녹스는 완전히 정상적인 모양으로 돌아온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느리지만 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조금 이상한 일을 겪고 있었다.
본래 그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 편이었다.
'치료의 부작용인가.'
그러나 최근 들어, 정확히는 신성력을 강제로 주입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는 좀 기이한 꿈을 반복해서 꾸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꿈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기억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꿈의 내용은 매번 똑같다.
꿈속의 그는 어딘가를 걷다가 웬 문 앞에 멈춰 선다. 문이 열린 방 안에 앉아 있는 것은 어떤 여자였다.
그러나 그가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 기이한 꿈은 끝이 나곤 했다.
'울고 있었던가.'
울음소리를 들은 적은 없지만 그는 어쩐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는 묘한 기시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곤 했는 데….
레녹스는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꿈속의 장소가 바로 이곳, 북부의 칼라일 성이었기 때문이다.
낯익은 장소, 낯익은 침실.
레녹스는 그 안에서 울고 있는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줄리엣일지도 모른다 .
고 생각했지만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그런 적은 없다.
“전하, 수도에서 온 서신들입니다.”
엘리엇이 칼라일 공작의 앞에 우편물들을 내려놓았다.
그중 맨 위에 있는 황실의 직인 이 찍힌 우편물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황제는 눈 여우 사냥철이 되면 그에게 초대장을 보내오곤 했다.
물론 칼라일 공작이 그 초대에 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목적 없는 사냥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물을 도륙하는 것은 익숙했어도 여우를 사냥하는 편은 아니었다.
레녹스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그러나 공작의 비서는 손수 우편물 중 하나를 골라내 다시 그의 앞에 밀어 놓더니, 그 옆에 자그마한 상자를 함께 꺼내 놓았다.
“이게 뭐지?”
“직접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엇이 뭔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재촉했다.
잘그락 소리를 내면서 모습을 을드러낸 것은 낯익은 물건이었다.
루체른에서 봤던 소울스톤이었다.
“....…하."
레녹스는 이걸 누가 보냈는지 이름을 보지 않고도 알 것 같았다.
“...…책임감 하나는 끝내 주는군.”
레녹스는 어쩌면 진짜로 눈이 멀어 버린 척하면 줄리엣을 영원히 독점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레녹스는 잠시 묘한 기분으로 소울스톤을 내려다보았다. 줄리 엣이 그에게 무언가를 보낸 것은 오랜만이었다.
“쪽지도 있습니다.”
엘리엇이 은근한 어조로 지적했다.
상자 안에는 짤막한 내용의 편지도 들어 있었다. 엘리엇은 내 심 흐뭇한 기분으로 칼라일 공작이 편지를 꺼내 읽는 것을 지켜보았다.
수도에서 보내온 우편을 확인하는 공작의 분위기가 최근 들어 가장 누그러져 있던 것이다.
엘리엇은 과연 줄리엣의 편지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 괜히 기웃거렸다. 그러나 길지도 않은 편지를 단번에 읽어 내려간 칼라일공작의 표정은 험악해졌다.
“....… 전하?" ”
“젠장.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레녹스는 욕설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안식 연휴에 초대하셨습니다.”
안식 연휴란 사냥을 좋아하는 황제가 귀족들을 초대하여 여우 사냥을 하는 것을 말했다.
연휴라고 해 봤자 낮에는 황제와 여우 사냥을 하고 밤에는 황후가 주관하는 작은 연회가 열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황제 부부가 줄리엣에게 보내온 것은 우아한 초대장뿐만이 아니었다.
웬 작은 상자도 함께였다.
“이건 뭐죠?”
상자 안에는 뚜껑이 달린 고풍스러운 손거울이 들어 있었다.
줄리엣은 참 황후다운 우아한 방식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직접 네 가지 예물을 챙겨 주는 오랜 관습이 있었다. 오래된 것, 빌린 것, 새로운 것 그리고 파란 것.
거울은 대표적인 예물 중 하나였는데, 황후는 그것을 보냄으로써 양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린 것이다.
줄리엣은 파란 사파이어가 뚜껑에 아로새겨진 거울을 유심히 살펴보다 입을 열었다.
“오래된 물건은 아니네요.”
오히려 거울은 최근에 세공한 것처럼 반짝반짝했다.
줄리엣은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도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직접 돌려 드리러 가야겠군요.”
레녹스를 통해 거절했지만, 아무래도 직접 찾아가서 돌려주는 게 예의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황후를 찾아가 공작과 헤어졌다는 설명을 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몰라 줄리엣이 심란해하는 사이 로이가 불쑥 말했다.
“같이 가 줄까요?"
“황궁에요?”
“네, 나를 이용하면 되잖아요.
도와줄게요.”
로이가 의미심장하게 손을 내밀었다.
줄리엣은 그의 '이용하라'는 말뜻을 깨달았다. 이 손을 잡고 초대에 응하면, 사람들 눈앞에는 영락없는 연인 사이로 보일 테니까.
줄리엣의 표정을 살피던 로이가 덧붙였다.
“친구라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그러면 좋겠지만…….”
줄리엣은 잠시 유혹을 느꼈다.
어쨌든 황후를 설득하려면 칼라일 공작과 헤어졌으며 이제는 아무 사이가 아니란 얘기를 해야 한다.
만약 로이와 동행하면 구구절절칼라일 공작과의 관계가 끝났다.
는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겠지.
백 마디 말이나 변명보다는 근사한 다른 남자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테니까.
하지만 로이를 구설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헤어진 지 얼마 안된 상태에서 로이와 연회에 참석하면 귀족들에게 어떤 뒷이야기를 들을지도 뻔했다.
"아뇨, 괜찮아요. 혼자 다녀올게요. 로이도 요즘 힘들잖아요."
최근 로이는 부쩍 바빠 보였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많이 곤두서 있었다. 가족 간에 다 툼이 있다 했던가.
그의 아버지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있다 했다.
바쁘면 오지 않으면 될 텐데, 로이는 꼬박꼬박 들러서 줄리엣의 안부를 확인하고 갔다.
"너무 걱정 말아요, 로이. 곧 형을 찾을 거예요.”
줄리엣은 그를 위로 했다.
로이의 형제 중 몇몇이 숲을 나가 버려서 행방불명되었다고 엘자가 지나가듯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 고마워요, 줄리엣."
로이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툭 하고 기댔다.
잠시 놀랐지만 줄리엣은 내색하지 않고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열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형이랑 싸우고 집 나온 어린애였는데 가족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서 줄리엣은 로이가 조금 기특해졌다.
“대신, 다음에는 꼭 같이 가요.
응?”
고개를 든 로이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졸랐다. 라이칸슬로프는 폐쇄적인 성격이라 들었는데, 로이는 항상 그녀에게 적극적이었다.
“줄리엣의 친한 사람들을 소개받고 싶거든요. 꼭이요.”
친한 사람들이라……. 그렇진 않은데.
줄리엣은 자신을 바라보던 싸늘한 시선과 속삭임을 떠올렸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다음에는 같이 가요.”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도 이 다정하고 잘생긴 청년과는 누구든 친해지고 싶어 할 것이다.
“금방 돌아올게요. 줄리엣, 몸조심해요.”
로이는 아쉬운 듯 인사를 남기고 카티아의 숲으로 떠났다. 같이 가 주겠다 제안했지만 바쁘긴한 모양이었다.
줄리엣도 황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어디 가, 줄리엣?"
줄리엣이 막 저택을 나서려는데 엘자가 부엌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황궁에. 하루면 다시 돌아올 거야.”
“으응, 그렇구나.”
엘자는 파이 한 조각을 물더니 졸랑졸랑 줄리엣을 따라와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줄리엣은 조금 웃으며 물었다.
"왜, 엘자?”
“로이가 줄리엣 혼자 두지 말랬어.”
로이가?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엘자의 외모는 눈부셔서, 평범한 옷을 입고 있는데도 황궁에 에가기에 손색없어 보였다.
‘동행인을 데려오지 말라는 얘기는 없었으니까, 엘자랑 같이 가도 되는 거겠지.'
“그래. 그럼 엘자도 같이 가자.”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