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93화 (90/229)

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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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은 날이 밝자마자 수도에 있는 공작저로 찾아갔다.

그런데 레녹스를 만날 수 없었다.

"…… 돌아갔다고요?"

“예, 아가씨.”

정확히는 공작저가 깨끗이 비어 있어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줄리엣은 할 말을 잃고 눈을 깜빡였다.

그런 줄리엣에게 공작저의 관리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제 저녁에 영지로 떠나셨습니다.”

결국 줄리엣은 급한 일이니 소울스톤을 공작성으로 보내 달라는 짧은 메모를 남긴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대규모의 인원치고는 무척이나 신속하고 조용한 귀환이었다.

게이트를 이용했을 테니 오래 걸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니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는 해도 곱씹을수록 조금씩 화가 났다.

'어떻게 말도 없이 북부로 떠나 버릴 수 있어? 사람 심란하게 해놓고, 그럼 내가 뭐가 돼?'

온실에 앉아 카티아 산 장미를 손질하던 줄리엣은 차갑게 내뱉었다.

“멍청이.”

“딱?”

2월은 조용한 계절이었다.

사교계에서는 살롱 모임이 활발하고, 사냥터에서는 여우 사냥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살롱에도 사냥에도 취미가 없는 줄리엣은 저택에 칩거중이었다.

물론 심심할 틈이 없었다. 걸핏하면 손님들이 번갈아 들락거려 백작저는 그 어느 해 겨울보다 북적거렸다.

“줄리엣, 줄리엣!”

수북이 쌓인 꽃 더미를 안은 훤칠한 미인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봐! 나 다 했어.”

엘자는 줄리엣의 앞에 깔끔하게 손질된 꽃 더미를 내려놓고 재촉했다.

“응? 봐 봐.”

“그래. 잘했네.”

그러자 엘자는 반짝반짝 기대감넘치는 눈으로 물었다.

“그럼 이제 파이 먹어도 돼?"

“응, 이베트한테 가서 달라고해.”

“만세!”

엘자는 환호성을 울리며 온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애도 아니고.

조금 웃으며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줄리엣은 힐끔 옆을 돌아보았다.

또 한 명의 라이칸슬로프가 앉아 있었다. 로이의 동료인 나단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자그마한 원예용 가위를 쥔 것이 어색할 법도 하건만 의외로 잘 어울렸 렸다.

실제로 그는 정교한 솜씨로 장미 줄기의 쓸모없는 잎을 다듬고 가시를 제거하는 중이었다.

옆에서 봐도 그 속도가 상당했다.

하지만 나단의 앞에는 아직 손질되지 않은 꽃이 더 많았다. 조금 전, 파이가 먹고 싶다고 징징대던 엘자가 나단에게 자기 꽃더미를 넘겼기 때문이다.

그 손놀림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줄리엣이 말했다.

"나단도 그만하고 엘자랑 같이 가서 차 들어요.”

"괜찮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

줄리엣은 두 번 권하지 않고 다시 장미꽃에 집중했다.

모나드 백작저에는 몇 년 만에 손님들로 북적거렸고, 줄리엣은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그들을 그냥 놀게 두지 않았다.

로이가 숲에서 가져다준 모종중에는 단 사흘 만에 꽃을 피우는 신기한 종도 있었다.

줄리엣은 놀고 있는 마법사를 잡아다가 텅 빈 온실에 불을 때고, 자연 친화력 높은 숲의 일족들을 데려다가 꽃을 가꾸게 했다.

새끼 용은 옆에서 빈둥거렸다.

남은 인력들은 꽃을 손질하는 노동에 동원되었다.

귀족 중에는 꽃에 가시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했다.

보통 귀족가에서 꽃꽂이에 사용하는 장미에는 가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그 꽃들은 다 어디서 오는가?

'그게 다 돈이고 노동이지.'

줄리엣은 그 진리를 어린 나이에 깨우쳤다.

사실 꽃을 손질해 내다 파는 건 겨울마다 온실을 가진 집들의 소일거리였다. 비교적 ‘우아한 취미'이자 돈벌이이기도 했고.

줄리엣이 고용한 인력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밥값은 잘했다.

그리고 줄리엣에게는 잡생각을 을잊을 만한 단순노동이 필요했다.

똑똑.

“줄리엣.”

누군가 유리 온실 입구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로이…….”

“로이 님!”

나단은 그가 퍽 반가웠던지 벌떡 일어나서 그를 반겼다.

하기야, 나단은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닌 것 같았다.

'온실에 갇혀서 꼬박 세 시간 동안 가위질이나 했으니 지겨울만도 하지.'

로이는 난처한 듯 웃더니 줄리 엣에게 말했다.

“잠깐 나와 볼래요?"

“네?”

“바깥에서 좀 이상한 걸 주웠거든요.”

줄리엣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로이가 추위에 떠는 다람쥐라도 주웠나 하고 생각했다.

“뭔데요? 아…….”

그러나 현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모포를 잔뜩 두른 어떤 중년 남자였다.

“무, 무, 무슨……. 누, 눈길을……!”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었다.

아무래도 진입로에 눈이 쌓여서 마차가 못 움직이는 바람에 맨몸으로 백작 저까지 올라온 듯했다.

최근 백작저를 찾는 사람들은 높게 쌓인 눈 더미에도 개의치 않고 잘만 찾아와 길을 터 두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줄리엣은 중년 남자를 안으로 들였다.

한참이나 몸을 녹이고서야 진정한 남자는 줄리엣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거만하게 말했다.

“그대가 줄리엣 모나드 양이 오?”

줄리엣은 다 알면서 왜 처음 보는 척 묻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네, 멜빈 시종장님.”

그는 황궁의 시종장인 멜빈 자작이었다. 줄리엣과는 7년 전 블루벨 파티에서부터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시종장은 멋쩍은 듯 헛기침했다.

"어, 어흠. 모나드 영애는……!”

“모나드 백작.”

"아, 그렇군……. 모나드 백작은 황후 폐하의 전언을 들으시오!"

"초대장은 다 거절한다고 했을 텐데요.”

줄리엣이 원예용 장갑을 벗으며 심드렁히 말했다.

“어허! 이건 그냥 초대장이 아니오!”

그러나 멜빈 자작은 굴하지 않고 들고 왔던 두루마리를 두 사람 앞에 척 하니 내밀었다.

이게 뭔가 싶어서 줄리엣과 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루마리에는 황금빛 인장이 멋들어지게 찍혀 있었다.

“당장 입궁하라는 폐하의 명이시오!”

* * *

북부의 공작성은 한파가 한창이었다.

공작저에 쌓인 눈은 햇빛을 받아 꼭 유리로 만들어진 양 찬란하게 빛났다. 하지만 정작 성은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주치의는 두려운 눈으로 어두운 침실 안을 힐끔거렸다.

“그 외에 별다른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주치의는 멈칫했다.

저렇게 공작의 침묵이 길어지는 것은 대개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는 며칠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 신성력이란 것, 몸에 직접 주입해도 효과가 있나?”

"예, 이론상으론 그렇습니다.”

무심코 대답했던 주치의는 그 의도를 알아듣고 창백하게 질렸었다.

"안 됩니다. 전하! 그건 부작용이…..!"

"상관없어.”

칼라일 공작이 제시한 해결책이란 것은 명쾌하지만 간단하지 않았다.

주치의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그 끔찍한 치료법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 방법은 효과가 확실히 있긴했다. 대신 확실한 부작용도 있겠지.

“눈이 멀면 환상을 보기도 하나?”

“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주치의는 어리둥절해졌다.

“혹 잠을 설치십니까? 그러면 수면 유도제를 처방해…….”

“아니, 됐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남자는 귀찮다는 듯 주치의를 물러가게 했다.

“나가 봐.”

"…예.”

덜컹.

주치의마저 떠난 후 어두운 방안에 홀로 남은 남자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늘진 공간에서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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