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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92화 (89/229)

92화.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니면 뭡니까? 훔치러 온 겁니까?"

"아뇨.”

줄리엣은 싱긋 웃더니 대답했다.

"이걸 빌려주시지 않으면 법황청 지하에서 있었던 일들을 폭로 할 거예요, 전부.”

“추기경님, 저게 무슨 의미입니까?”

대신관이 어리둥절해서 물었지만 줄리엣의 말뜻을 알아들은 길리엄 추기경의 얼굴은 단번에 굳었다.

그제야 줄리엣이 일부러 베일을 끌어 내려 얼굴을 보였던 이유가 이해됐다.

줄리엣의 의도는 명백했다.

“....… 지금 신전을 협박하는 겁니까?”

“네, 정확히 들으셨네요."

길리엄 추기경은 귀를 의심했 했다. 대범함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기막혀해야 할지.

확실히 줄리엣의 말이 맞긴 했다.

루체른에서 있던 일이 이제야 간신히 정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바스티안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당사자가 나오면 법황청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노비아의 소울스톤 역시 법황청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모호한 물건이 되어 버리기도 했고.

굳은 얼굴로 줄리엣을 노려보던 길리엄 추기경은 그녀의 실수를 지적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그 협박이 성립할 수 있는 건 아가씨가 이곳에서 곱게 빠져나갔을 때의 일일 텐데요."

“사제님이 악당 같은 말을 하시네요.”

정작 줄리엣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싱긋 웃었다.

길리엄은 줄리엣의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당장 우리가 여기에서 소리를 지르기만 하면 경비병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의 지적은 옳았다.

줄리엣이 진상을 알리겠다고 그들을 협박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줄리엣이 멀쩡히 살아서 대신전 전을 나갔을 때의 이야기였다.

“글쎄요. 제 생각엔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한 줄리엣이 힐끔 창 쪽을 곁눈질했다.

길리엄 추기경과 대신관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커다란 시계뿐이었다.

뭐지?

"아, 됐다.”

줄리엣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바깥에서 폭로전으로 뭘 게요.”

줄리엣이 상자를 품에 안고 재빨리 어두운 방 안쪽 어딘가로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

“겨, 경비병!”

당황한 대신관이 닫혀 있던 입구 쪽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대신관을 반긴 것은 방안으로 자욱하게 밀려드는 연기였다.

“경비…?”

아차.

대신관이 즉각 털썩 쓰러지는 걸 본 길리엄 추기경은 그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사정인지 알아했다.

'수면 향……!

줄리엣은 애초에 그들을 설득하려고 한 게 아니다.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별관 내부에 수면 향이 충분히 퍼질 때까지.

*

자욱한 연기가 깔린 별관을 유유히 빠져나오면서도 줄리엣은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제노비아의 소울스톤이 그녀가 남동생에게 남긴 유산이라고 친다면, 줄리엣이 손해배상으로 소울스톤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미친 가짜 법황에게 납치당해 고생도 했고 그 덕분에 나비들도 잃어버렸지 않은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목숨도 위협당하고.’

줄리엣은 바람이 잘 부는 방향의 통로를 따라 신전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생각했다.

모나드 백작가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꼬박꼬박 성금을 내던 신심 깊은 가문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이곳에 자주 드나들어 대신전의 구조를 훤히 알았다.

그 때문에 정문을 제외하곤 경비가 삼엄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성직자가 소울스톤을 놓아두기 위해 은밀히 별관에 들어온 덕에 그들이 사람들에게 발견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나비들이 있었다면 훨씬 쉬웠겠지만….’

줄리엣은 로이가 카티아의 숲에서 가져온 약초로 수면 향을 만들었다.

그리고 저녁 예배를 알리는 향을 피우기 전에 그것을 별관의 향로에 조금씩 나눠 두었다.

처음에는 조금 졸릴 정도로 농도가 옅지만 점차 연기가 쌓이다.

보면 즉효가 돈다고 했다.

'숲에 신기한 약초가 가득하다더니.’

효과가 좋네.

신전을 빠져나오면서 줄리엣은 감탄했다.

‘아무리 그래도 신전을 빠져나오면서 몇 번쯤은 경비병들이랑 마주칠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은 반만 맞았다.

사실 그건 바깥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로이가 경비병들을 보이는 대로 기절시켜 둔 덕분이었다.

어쨌든 줄리엣이 그걸 알게 된 것은 신전을 완전히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예배 시간이라 그런지 신전 바깥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줄리엣은 혹여 나중에라도 경비병과 마주쳤을 때 의심을 피하고자 조금 먼 루트로 돌아 나오는 중이었다.

서둘러 담장을 넘다가 발각되느니, 천천히 열린 문들을 통해 걸어 나오는 게 덜 의심스러울 테니까.

이제 로이와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남은 거라곤 작은 쪽문 하나뿐이었다.

로이는 저 문을 지나면 나오는 높은 외벽 아래에서 기다리기로 했었다.

상자를 품에 숨긴 줄리엣은 느긋하게 문을 통과했다.

그러다 조금 높은 문턱에 걸려 잠시 중심을 잃었다.

“앗!”

"아, 조심하세요.”

하마터면 다리를 접질릴 뻔했는데 다행히 지나가던 여사제가 줄리엣을 부축해 주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베일이 떨어지지 않도록 고쳐 잡으며, 줄리 엣은 자신을 잡아 준 사람을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그러다 문득 여사제와 눈이 마주쳤다.

"......!"

줄리엣은 창백하게 질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청남색 눈동자. 저 눈은 분명…….

“대, 대신관님!”

그때, 신전 중앙에서 대신관을 부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대신관께서 쓰러지셨다!”

보관실에 쓰러진 두 사람을 발견한 모양인지 신전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추기경께서는 어디 계시냐!"

“추기경님!"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예배가 한창이던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차..'

줄리엣은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에 정신을 차렸다.

"저…… 잠시만요!"

그러나 그녀를 부축해 준 여사제는 줄리엣이 그녀를 미처 붙잡기도 전에 중앙 신전 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에 섞여 사라져 버렸다.

줄리엣은 그녀를 뒤쫓아 가지도 못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분명히 달리아였다.

**

경내가 소란스러워진 덕분에 오히려 줄리엣은 들키지 않고 안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줄리엣!”

바깥쪽 높은 담 아래에서 기다리던 로이가 줄리엣이 뛰어내리기를 기다려 받아 주었다.

“늦길래 걱정했습니다.”

로이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타박했다. 그때까지 혼이 조금 나가 있던 줄리엣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미안해요. 잠깐 좀 누굴 마주쳐서요."

“소울스톤은요?”

줄리엣은 손에 든 작은 상자를 들어 보였다. 소울스톤이 담긴 상자가 작게 달그락 거렸다.

“그게 소울스톤이군요.”

“네.”

“그걸로 저주를 깨뜨릴 수 있는 겁니까?"

"….… 글쎄요.”

줄리엣이 영롱한 구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길 바라야죠.”

신성력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줄리엣으로서는 이걸로 해결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노비아의 신성력은 정말로 대단하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저주의 종류가 뭔지 몰라도, 압도적으로 강한 힘이라면 저주도 결계처럼 깨뜨릴 수 있다.

고 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줄리엣은 방금 빠져나온 신전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달리아는 마력과 신성력을 둘다 사용할 줄 알았지.'

그건 이 세계의 법칙을 거스를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었다.

줄리엣 역시 마력을 타고나긴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 봐야 세계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녀의 앞에서는 초라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줄리엣?”

"아, 미안해요.”

잠시 옛날 일을 떠올렸던 줄리 엣은 싱긋 웃었다.

“이제 이걸 공작가에 가져다주러 가요.”

줄리엣은 로이의 눈치를 조금 살피며 말했다. 로이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죠.”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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