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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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가 모나드 백작저에 도착했을 때 줄리엣은 집에 없었다.
저택에 있던 하녀의 말에 의하면 아침 일찍부터 황궁에 갔다고 했다.
“그렇습니까.”
백작저의 사용인들은 로이에게 제법 호의적인 편이었다.
"아가씨는 곧 돌아오실 거예요.
안에서 기다리시겠어요?"
들어와 앉아 기다리라는 말에도 로이는 사양하고 외진 저택의 출입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수도 외곽에 있는 백작저는 입구까지 길가의 나무가 우거져 제법 풍경이 근사했다.
'황궁이라.'
로이는 그 말에 안도한 스스로 가 좀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품에서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냈다.
줄리엣은 카티아의 숲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며 궁금해했다.
로이는 그녀가 숲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게 내심 기꺼웠고, 올때마다 한 가지씩 그녀가 흥미있을 법한 숲의 물건들을 가져 다주었다.
개중에는 얼마를 주더라도 손에 넣기 어렵다는 진귀한 약초도 있었고, 대륙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신기한 꽃들도 있었다.
로이는 자그마한 유리병에 담긴 것을 들여다보았다. 이번 선물은 특히나 줄리엣이 흥미 있어 하던 것으로, 강력한 수면 효능이 있는 약초였다.
잠시 후,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낯익은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이는 싱긋 웃으며 마차가 멈춰 서기를 기다렸다.
“줄리엣.”
그러나 입구에 멈춰선 마차에서 내리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 울었어요?”
"안 울었는데요.”
붉어진 눈가를 하고서도 줄리엣은 고집스럽게 우겼다.
거짓말.
로이는 굳이 소리 내어 지적하는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 공작이 죽었나?'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로이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약하니까. 하지만 레녹스는 아니다.
로이는 어렸을 때부터 칼라일공작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북부에 터를 잡고 사는 덕분에 숲의 일족과는 마주칠 일이 없었지만, 뭐랄까…… 그는 보통의 인간과 달랐다.
'천 년 전부터 존재하던 가문이라 했던가.’
그리고 남자는 어쩐지 줄리엣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했다.
'성가시게도.’
최근 로이가 반한 여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그의 학습 능력 없는 형제들은 큰소리로 비웃었다.
하지만 로이는 그들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약해 빠진 것들이다.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게 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 남자였다.
로이는 연회장에서 자신과 검을 겨루던 그를 떠올렸다.
'정말, 성가셔.'
어쩐지 목이 탔다.
“줄리엣, 어디 다녀왔어요?"
떠보듯 묻자 잠시 침묵하던 줄리엣이 말했다.
“우리 집 고양이가…….”
“예?”
“전에 기르던 고양이가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보러 다녀왔어요.”
공작의 상태를 극비에 부쳐 달라는 엘리엇의 당부가 기억나 줄리엣은 고양이 핑계를 댔다.
굳이 로이에게 숨길 필요는 없겠지만, 레녹스의 이름을 꺼내는 것도 그리 현명하지 못할 것이다. 로이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로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순식간에 냉랭한 표정이 되었다.
“아하, 그런 것 치고는 금방 돌아왔네요.”
"네, 뭐…….”
"생각해 보니까 내 얘기는 하나도 못했네.”
실은 나비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워낙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다.
그래도 그곳에 머물러 봤자 줄리엣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병간호에 소질이 없었고, 공작가에는 실력 좋은 주치 의도 있으니.
대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 우는 거 말고.'
공작가의 주치의는 저주의 종류를 모르더라도, 압도적인 신성력이 있다면 신성 결계를 깼던 것처럼 저주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줄리엣은 모나드 백작저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제노비아의 소울스톤.
'그걸 손에 넣으면 방도가 있지 않을까.'
사실 신성력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게 없는 줄리엣이 떠올릴 수 있는 해결책은 그것뿐이었다.
'제노비아의 신성력은 불세출의 천재급이랬으니까, 어쩌면 레녹스에게 걸린 신성 저주도 풀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문제가 간단하지는 않았다.
'나 때문이야.'
줄리엣은 레녹스의 상태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이, 혹시 소울스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로이는 줄리엣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질문만으로 그녀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알아챈 듯했다.
“…… 네, 압니다.”
로이는 줄리엣을 곤경에 빠뜨렸던 그 물건에 꽤 흥미를 보였었다.
“무슨 추기경이란 자 말로는, 이곳 대신전으로 옮겨질 거라더군요.”
“수도? 왜 루체른이 아니고요?”
“사건을 최대한 은폐해야 하니까 멀리 두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겠죠.”
대신전이라.
줄리엣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로이는 불쑥 엉뚱한 걸 물었다.
“줄리엣, 그 남자가 좋아요?"
"...... 네?"
어쩐지 떼쓰는 어린애처럼, 로이가 집요하게 물었다. 나긋한 목소리와는 딴판이었다.
“줄리엣이 그랬잖아요, 지금은 누구도 좋아할 여유가 없다고.
그런데 왜……."
"아뇨.”
줄리엣의 대답은 단호했다.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로이가 조금 당황할 정도로.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줄리엣은 야트막한 한숨을 지었다.
둘의 관계는 설명해도 이해받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모두 이번 생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둘은 같은 사람이기도 해.’
줄리엣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레녹스를 대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완벽히 미워하지도 못했다.
7년 동안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마음에 품었다. 그리고 첫 번째 삶에서처럼 상처받는 것이 무서워, 상황이 일어나기도 전에 도망쳐 버렸다.
그녀가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이유는 레녹스조차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미래가 바뀌어 버린 이상, 그들의 과거는 영영 줄리엣 혼자만의 기억이 되어 버렸을 테니까.
“지금은 제 목숨을 빚졌으니까, 그걸 갚으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줄리엣은 담담히 말했다.
세상 오만하게 살던 남자가 제 부상을 숨기고 어두운 방 안에 틀어박힌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목숨 빚이라……."
로이는 그 말에 가볍게 웃더니 줄리엣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렇게 말하시면 어쩔 수 없네요. 가죠.”
줄리엣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건 내 문제예요. 굳이 로이가 도와줄 필요는…….”
"아뇨.”
로이는 어쩐지 곤란하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며 씩 웃었다.
“목숨 빚이라면, 나도 하나 있거든요.”
* * *
늦은 저녁.
예배가 한창인 시각이었다.
어린 사제들이 은은한 연기를 뿜어내는 향로 (tribulum)를 진자처럼 흔들며 경내를 누볐다.
엄숙한 연기가 대신전 전체에 에느리게 퍼져 나갔다.
수도의 대신관은 연신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 달 전, 대신전에서 아르고스의 눈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던 칼라일 공작은 그것을 엉뚱하게도 루체른으로 돌려보냈다.
대신관으로서는 반환처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 아니냐 따지고 싶었다.
뭐, 본래 법황청의 성유물이니 어디로 돌려보내는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항변한다면 할 말이 없긴했다.
대신관은 칼라일 공작에게 직접 따지는 대신 그동안 몇 차례 루체른에 성유물을 돌려주면 안 되겠느냐 징징거리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루체른에서는 영 미적지근한 답조차 더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고스의 눈 따위는 더 이상 대신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소울스톤이로군요!”
탐욕스러운 눈으로 대신관은 정신없이 작은 상자 안에 담긴 것을 훑어보았다.
그 역시 소울스톤을 몇 번 본적은 있다. 그러나 이토록 영롱한 색과 완벽한 모양을 가진 소울스톤은 처음이었다.
“쉿. 목소리를 좀 낮추시오, 대신관, 소울스톤이 이곳 대신전에 보관되어 있다는 건 당신과 나만 알아야 합니다.”
"아, 예! 물론이지요.”
대신관은 굽실거리며 상대방의 비위를 맞췄다.
소울스톤을 수도까지 가져온 이는 다름 아닌 길리엄 추기경이었다.
그는 법황청에서 지난번 사고를 완전히 수습할 때까지 이 물건은 잠시 숨겨 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제바스티안의 능력이 모두 이 소울스톤에서 비롯된 거였다니.'
루체른 입장에서도 꽤나 꺼림칙한 물건이긴 했다.
가짜 법황이 사용하던 신성력의 정체라니. 지난 몇 년 동안 법황청이 신성력도 없는 가짜 법황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하등 좋을 게 없었다.
“당분간만 신세 지겠소."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길리엄 추기경과 대신관은 소울 스톤이 든 상자를 예식에 사용하는 제구 보관실에 고이 숨겨 둔뒤 방을 나오려고 했다.
그때.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신관은 움찔했다.
“거기 누구냐!”
동시에 뒤를 돌아본 대신관과 과길리엄 추기경은 모두 흠칫 놀랐다.
검은 베일로 꼼꼼히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그들이 고이 내려 두고 나온 작은 상자를 열어보고 있었다.
"......?"
"누, 누구…….”
지나치게 태연한 태도에 두 성직자는 오싹함마저 느꼈다.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곳에서 나타나다니? 유령인가?
그러나 흰 사제복을 입은 정체 불명의 인물은 태연하게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대신관님."
그녀는 폭 하고 한숨을 쉬더니 눈 바로 아래까지 덮고 있던 베일을 끌어내려 얼굴을 보였다.
"아니, 아가씨는……?”
길리엄 추기경이 먼저 그녀를 를알아본 눈치였다.
“모나드 영애!”
대신관이 역시 줄리엣을 알아보고 경악해 소리쳤다. 그는 오랫동안 수도의 대신관이었던 만큼 모나드 백작가 사람들과도 안면이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줄리엣은 당황하기는커녕 도로 꼼꼼히 얼굴을 감춘 다음 침착하게 말했다.
“소울스톤을 가지러 왔어요. 빌려주시겠어요, 길리엄 추기경님?”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군요.”
길리엄 추기경은 줄리엣이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자 조금 놀랐다.
“소울스톤은 법황청의 물건입니다.”
줄리엣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지적했다.
“정확히는 죽은 제노비아의 물건이겠죠.”
“.……그녀는 루체른의 보육원에서 죽었습니다.”
"음,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줄리엣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를 착각하시는 것 같네요. 저는 허락을 받으러 온게 아니에요.”
왠지…… 전에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낯익은 기시감에 대신관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꼭 얼마 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