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90화 (87/229)

90화.

“어떻게….”

한숨처럼 흘러나온 속삭임에 레녹스는 움찔했다.

가늘게 떨리는 손이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당장이라도 그 손목을 잡아 저지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그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서 타인의 손이 제 뺨을 건드리는 것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누군가 제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전쟁터에서 구르던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같은 거였다.

사람의 머리에는 서른아홉 가지의 급소가 있고 그중 열여섯은 훈련받지 않은 사람도 정확히 짚기만 하면 손쉽게 상대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자신의 몸에 닿은 상대를 밀어내는 것은 어린애 손목을 꺾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닿는 손길에 죽을 만큼 황홀하고 비참해 밀어 낼 수엇었다.

“줄리엣.”

그는 위험할 정도로 낮게 가라 앉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제발…… 그만 울어."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눈앞의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줄리엣은 그의 앞에서 좀처럼 우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우는 여자를 달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당장 그치게만 할 수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한 달간 미친 듯 되찾고 싶었던 존재가 제 품 안에 앉아 있는데…… 정작 그 여자는 하염없이 울고 있다.

그를 동정해서.

그 사실이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꼴좋게 됐군, 레녹스 칼라일.'

눈이 멀쩡했을 때도 그를 버리고 미련 없이 도망쳤던 여자였다.

그래도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줄리엣은 죄책감을 느끼겠지.

그러면 그를 가엾게 여길 테고 그리고…….

그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 다음은 뭘까?

“젠장. 누가 죽기라도 했어?"

“안, 울어요.”

험악하게 말을 내뱉자 꾹꾹 눌러 참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여자가 간신히 대답했다.

어린애도 속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 * *

줄리엣은 그가 우는 여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들의 관계는 최대한 그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이 조건이었으므로 그녀는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줄리엣.”

그러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울지 말라고 했잖아.”

협박하는 건지 애원을 하는 건지 모를 어조로 남자가 재차 말했다.

보통이라면 등을 보이고 자리를 떠나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서 그렇겠지.

줄리엣은 재빨리 뺨을 훔쳤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레녹….”

곧장 문 너머에서 소음이 들려오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콰당!

"....."

다음 순간 줄리엣은 곧장 그를 밀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대로 침실을 가로질러 가서 응접실로 향하는 문을 활짝열어젖혔다.

드르륵.

“그……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가의 주치의뿐 아니라 엘리 엇을 비롯한 낯익은 공작가의 비서들이 응접실 문가에 조르륵 붙어 있었다.

*

“돌아갈게요.”

주치의를 닦달해 자초지종을 들은 줄리엣은 저택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깔끔한 태도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 저…….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오겠다는 말조차 남기지 않는 줄리엣과 그런 그녀를 잡지 않는 레녹스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엘리엇이 얼른 일어섰다.

잠시 후, 창밖에서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돌아온 엘리엇이 알렸다.

“모나드 양은 댁으로 가셨습니다.”

“알겠으니 나가 봐."

“.....…예.”

레녹스는 새삼스럽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영영 눈을 잃으면 이 여자를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으니.

얄팍한 동정심과 죄책감을 자극하면 껍데기만이라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은 지쳐 넌더리를 내더라도 줄리엣은 그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교묘히 죄책감을 자극한다면, 그러면 될까?

'어림도 없지.’

레녹스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는 처음부터 제가 줄리엣을 값싼 동정심으로 얽어 잡아 둘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자존심의 문제라거나 그녀가 저를 동정하는 걸 도저히 견딜 수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줄리엣은 몰랐겠지만, 어쩌면 관심도 없었겠지만 그는 어떻게든 그 여자에게 좋은 것만 안기려고 노력했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형편없이 망가진 것으로 여자의 발목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는 습관적으로 손안의 비둘기 모양 은 세공품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떠올렸다.

'이까짓 싸구려.'

스스로가 값싼 은장식이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의 일을 떠올렸다.

*

줄리엣은 종종 레녹스에게 도착하는 선물을 확인하고 돌려보내는 일을 했었다.

줄리엣은 안목이 높아 레녹스에게 어울리는 색과 모양을 잘 골라냈고, 그런 그녀를 레녹스는 믿었다.

한데 그날은 왜 지나치지 못했더라?

그는 우연히 그녀가 어떤 문서 들을 꽤 흥미롭다는 듯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앞으로 온 청혼서들이었다.

“그냥… 책상 정리를 하다가……

요.”

우연히 봤어요.

애초에 그녀가 봐서는 안 되는 문서는 없었다.

정작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청혼서인데 줄리엣은 유심히 읽는 것으로도 모자라 차곡차곡 분류까지 해 놓았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사과하는 여자를 보고 그는 순간 아연해졌다.

그게 연인의 앞으로 들어오는 청혼서를 보고 지을 표정인가?

저 스스로도 어쩌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레녹스는 그 표정이 몹시도 거슬렸다.

줄리엣의 얼굴에는 배신감이나 슬퍼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 차분한 얼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을 찾아야 하는 줄도 모르면서 그는 그저 그게 묘하게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그 감정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바로 다음 날, 우연히 성의 연회장에서 즐겁다는 듯 생기 넘치는 얼굴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여자를 발견한 직후였다.

별로 대단한 광경은 아니었다.

북부의 귀족들은 대부분 거만하고 불친절했다.

줄리엣은 그를 대신해 의무적으로 연회에 참석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자리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특정한 종류의 관심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올곧고 좋은 것은 굳이 공들이지 않아도 티가 난다.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줄리엣 모나드는 더욱 그러했다.

매일같이 보는 그의 눈에도 반짝반짝 빛이 났으니, 남들의 눈에는 오죽했을까.

줄리엣은 그들 중 어느 귀족의 서기관이라는 남자와 잠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다. 얼핏 듣기로 그 역시 제도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관심도 흥미도 없는 분야의 가벼운 잡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날 줄리엣의 얼굴에서 제가 필사적으로 발견하기를 바랐던 종류의 감정이 뭐였는지를 스스로에게서 찾아냈다.

그 이후, 그는 여느 때처럼 했다.

주제를 모르고 집적거리던 것들을 거슬리는 족족 치워 버렸던 것처럼.

레녹스는 대화 상대를 잃은 줄리엣을 위로하고자 뭔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줄리엣은 호화로운 패물을 거들떠보기는커녕, 대화 상대를 다시 보지 못해 조금 실망한 듯한 눈치였다.

그리고는 성의 뒤뜰에서 고작 초라한 은 조각을 들고 기뻐하는 여자를 발견했을 때의 일이란.

"이까짓 싸구려가 좋아?”

"싸구려 아니에요. 돌려주세요.”

레녹스는 그녀가 제 예측을 번번이 벗어날 때마다 화가 났다.

값비싼 물건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싸구려 은 조각에나 관심을 보이다니.

레녹스는 손안에서 뭉툭해진 비둘기의 날개 끝을 만지작거리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작 지금은 제가 그런 싸구려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벨로키타나.”

그는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화르륵.

벽에 기대 있던 검이 불꽃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매끄러운 검은 털을 가진 맹수 한 마리가 그곳에 나타났다.

(그래, 이제 겨우 나랑 이야기할 생각이 드셨나?)

“입 다물어.”

(말버릇하고는.)

말과는 다르게 거대한 흑표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래서 조건이 뭐야?)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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