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9화 (86/229)

89화

*

침실 밖으로 나온 엘리엇은 복도를 걸어오는 줄리엣을 발견하고는 하얗게 질렸다.

실명 직전임에도 남의 일처럼 차분하던 레녹스가 윽박질러 가며 당부했던 유일한 하나.

그것은 줄리엣의 귀에 그의 몸상태가 들어가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엘리엇은 재빨리 침실 문을 닫으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나드 양!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전하를 만나러 왔어요.”

“들어가실 수 없……!”

"비켜요. 당장.”

싸늘한 목소리에 엘리엇은 물론이고 문을 지키고 섰던 하단마저 움찔했다.

그들이 주춤한 사이 줄리엣은 두 사람을 지나쳐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쾅!

“아가씨!”

침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엘리 엇은 줄리엣을 뒤따라 안으로 뛰어들었다.

엘리엇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침실 안에 아직 주치의가 있을 텐데.'

줄리엣이 주치의를 몰라볼 리 없을 테고…….

“뭐야.”

그러나 침실 안에는 느긋하게 옷을 갈아입던 공작 한 사람뿐이었다.

"아…….”

엘리엇은 응접실로 향하는 문을 힐끗거렸다.

간발의 차로 주치의가 몸을 숨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레녹스가 힐끔 문가를 보며 묻자 그제야 엘리엇은 제 주인에게 상황을 정리해 말해 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 전하. 줄리엣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나가.”

"예.”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줄리엣은 그 자리에 서서 셔츠를 갈아입는 공작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닌가?”

"네, 맞아요.”

"보다시피 바쁜 상황이라 빨리 끝내 줬으면 좋겠는데."

레녹스는 그녀를 세워 둔 채 느긋하게 풀린 단추를 마저 잠갔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이 묘하게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최대한 빨리 방해하지 않고 사라져 드릴게요.”

“앉지.”

레녹스가 의자를 가리키며 권했다.

커튼을 있는 대로 쳐 둔 침실 풍경은 그녀가 며칠 전 찾아왔을 때와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도 그는 여전히 저택에 두문불출 틀어박혀 있는 것 같다.

건강이 아직도 좋지 않은 건가?

줄리엣은 그 쪽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입을 열었다.

“황궁에 갔다가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요. 그걸 물으러 온 것뿐이에요.”

“이상한 얘기?”

“2황자님을 만났어요.”

“아하.”

레녹스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묻었다.

무슨 말인지 짐작했다는 듯 별로 놀라지도 않은 눈치였다.

“제가 황궁에 양녀로 입적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2황자 클로프는 줄리엣에게 대단한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그 내용이란 게 대단히 황당하긴했다.

"폐하가 줄리엣 양을 양녀로 삼겠다 하시더군요. 모르고 있었나요?”

"칼라일 공작이 직접 알현해서 요청했다더군요. 영애와 결혼을 을하고 싶다면서.”

클로프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줄리엣이 제 의붓동생이 되고 칼라일 공작과 결혼하면 그들은 인척 관계가 된다.

즉, 클로프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칼라일 공작의 윗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이 괴상한 가은 가족 놀이에 어울려 줄 생각 없었다.

“그 말 그대로야.”

레녹스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대가 제국 유일의 황녀가 되는 거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줄리엣은 속지 않았다.

“제 신분 때문에요?”

모나드 백작가는 소위 공작가와의 혼사를 준비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일까.

글랜필드 같은 졸부도 황실과 혼맥을 쌓는 요즘 세상에 새삼스럽긴 했다.

하지만 칼라일 공작가는 지금의 황실보다 역사가 더 긴 제국 유일의 가문이니 그럴 수 있겠다 .

싶기도 했다.

“아니.”

그러나 이어지는 레녹스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네가 신전에서 결혼하는 걸 원할 것 같아서.”

생각지 못한 말에 줄리엣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공작가와 신전의 악연은 유명하다. 레녹스 칼라일의 대에 와서는 신전과의 관계가 아예 파탄났다.

그는 북부의 신전을 없애 버렸고, 신전은 레녹스 칼라일을 파문해 버렸다.

파문당한 이상 공작은 사제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할 수도, 언젠가 태어날 후계자의 세례를 받을 수도 없는 신분이었다.

"맞아, 그랬지.”

정작 칼라일 공작 본인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명확히 못 박았고, 그런 신전의 극단적인 대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를황제의 양녀로 만든다는 건 제법 괜찮은 해결책처럼 들렸다.

신전은 종교적 우호 관계인 황실의 혼사라면 무조건 축복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

"그럼 어차피 끝난 이야기 네요. 저는 제 부모님 외의 가족은 필요 없어요.”

줄리엣은 담담히 통보했다.

"폐하께 가서 깨끗이 없던 일로 하겠다고 말해 주세요. 저는 원치 않는다고요.”

"분부대로 하지, 황녀 전하.”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잔뜩 비꼬는 투로 대꾸했다.

“용건은 그게 끝인가?"

내리깐 레녹스의 눈매가 서늘했다.

줄리엣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레녹스가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더 순순히 물러나는 것도 의아했다.

문득 줄리엣은 이 방에서 잃어버렸던 물건이 떠올랐다.

"아, 머리핀이요.”

“머리핀?”

“네, 며칠 전에 여기 왔을 때 잃어버렸어요. 본 적 없으세요?”

레녹스는 의자에 몸을 더 깊게 묻으며 심드렁히 물었다.

“중요한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찾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금색 핀인데 나뭇잎 모양에 진주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주변을 둘러보던 줄리엣은 멈칫했다.

“…… 진주가 달린 거예요."

두 사람의 가운데에 있는 작은 마호가니 협탁.

그 위에 그녀의 머리핀이 있었다.

누군가 방을 청소하다 주워 거기에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모르겠는데.”

…… 그런데 왜?

줄리엣의 의아한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왜 레녹스는 저걸 보지 못하지?

"엘리엇에게 찾아보라고 하지.”

레녹스는 정말로 바로 눈앞의 의머리핀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단조롭게 대꾸했다.

줄리엣은 잠시 멍하니 그의 옆얼굴을 보다가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줄리엣이 방 안에 들어온 이래 단 한 번도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걸어 잠근 방문이며 유달리 어두운 조명. 단추가 모두 채워져 있지 않아 어딘가 어수선한 옷차림.

심지어 의자에 몸을 묻고 있는 모양에서 어딘가 방어적인 태도가 느껴졌다. 그답지 않게.

보통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줄리엣은 그녀의 유모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 익숙했다.

본능적으로 그렇다.

사람은 시야가 차단되면 자연스레 방어적인 자세로 조금 더 비스듬히 앉게 된다.

예기치 못한 자극에 대비하기 위해서.

'설마.’

“전하.”

줄리엣은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 예전에 제게 푸른색이 잘 어울린다고 하신 말 기억나세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줄리엣의 손이 그의 무릎을 짚었다.

“제가 오늘 입은 옷이요. 전하가 좋아하시는 색인데…….”

그러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획 감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주저앉혔다.

"줄리엣 모나드.”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했다. 그는 줄리엣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바로 눈치챘다.

“기회를 줄 때 그냥 모른 척 떠났어야지.”

화를 간신히 억누른 목소리로 레녹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렇게 떠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자신의 상태를 눈치챘더라도 떠보지 말았어야 한다.

전혀 몰랐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을, 이곳을 떠났어야 했다.

그가 시력을 잃었건 죽어 가고 있건 말건 저와는 아무 상관없다.

는 듯이.

그렇게 떠났어야 했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더 이상 멀쩡한 척 속일 수가 없잖아.”

이러면 자신은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은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았다.

줄리엣은 그게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보이지 않으니 눈을 맞출 수 없는 거겠지.'

줄리엣은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으로 간신히 속삭였다.

“레녹스.”

“지금 제가 안 보이시는 거죠?”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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